12월 3일 밤 느닷없는 메시지가 핸드폰 화면에 떴다. 윤 대통령 “종북 세력 척결/헌정질서 지키기 위해 계엄 선포”. 종북 세력? 지금 이게 2025년도라고? 계엄령(Kriegsrecht; Krieg: 전쟁, Recht: 법)은 전쟁 및 기타 비상사태 시 최후의 질서유지 차원에서 발동하는 것인데? 너무 황당했고 뭔가 착오가 있겠지 싶었다. 얼마 뒤 계엄사령부 포고령 전문이 속보로 떴다. 집회 및 언론의 자유 등 국민의 기본권을 침탈하고 “처단”과 같은 폭력적 단어가 난무하는 계엄 포고령이었다. 분노가 치밀었다. 어떻게 감히 ‘국민’을 처단한다는 말인가? 그것도 누구보다 자유민주주의를 부르짖던 자가?
곧이어 국회에 특전사부대가 헬기를 타고 진입했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전투복을 입고 기관단총으로 중무장한 공수부대원들이 계엄 해제를 막기 위해 국회 출입을 통제하고 국회 회의실 진입을 시도했다. 순간 5.18 계엄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고 이 순간만큼은 두려움이 밀려왔다. 다행히 국회의 빠른 대처와 그 자리를 지키는 수천 명의 시민 덕에 급박했던 상황은 일단락되었지만 계엄이 불러일으킨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혼란 등 그 후폭풍은 너무나도 컸다. 그리고 12.3 친위 쿠테타는 한국 민주주의 심장에 직격탄을 던졌다.
12.3 계엄은 이미 한국 정치·사회에 만연해있던 혐오와 보복, 그리고 양극화에 다시금 불을 지폈다. 특히 극우세력의 급부상, 그뿐만 아니라 헌정사상 최초 사법기관 테러였던 1.19 서부지법 폭동과 중국인 대상 무차별 폭언·폭행 사건 등 극우세력의 폭력은 민주주의 위기를 절실하게 느끼게 해주었다. 여기에는 기존 노년층의 태극기부대뿐 아니라 유튜브, SNS와 온라인 커뮤니티에 머물러있었던 젊은 극우세력도 포함된다. 놀랍게도 그들은 지난 총선이 부정선거였고 그 배후에는 중국이 있었으며 중국이 한국을 점령하려 한다는 음모론을 굳게 믿고 있고, 그러므로 계엄은 정당했다고 한다. 더 우려스러운 점은 여당인 국민의 힘이 이들과 거리를 두지 않고 오히려 동조하며 선동에 가세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여당이 과거 시민들을 폭력으로 억압했던 ‘백골단’을 자처한 극우청년 조직에 이어 12.3 계엄령을 ‘국민 깨우는 계몽령’이었다며 극우 발언을 이어가고 있는 한국사 강사 전한길까지 국회로 불러들였다는 것이 현재 한국 정치의 현실이다.
극우의 대중화와 제도권 밖의 극우세력이 제도정치 안으로 들어온 것은 비단 한국 만의 상황이 아니다. 부정선거 음모론과 미국 국회의사당 폭동, 그리고 ‘(극우) 포퓰리스트’ 트럼프의 재집권까지 최근 한국 정치·사회의 모습과 닮아있다. 유럽 역시 예외는 아니다. 지난 2월 23일 ‘신호등 연정’의 붕괴로 조기 선거를 치른 독일의 총선 결과만 보아도 이러한 흐름은 자명하다. 독일의 위한 대안(Alternative für Deutschland, AfD, 이후 대안당)은 2013년에 창당된 내셔널리즘, 반이민 정책을 내세우는 포퓰리스트 극우 정당으로 2015년 대규모 난민 유입 이후로 큰 호응을 얻어왔고 이번 총선에서 20.8%를 득표해 무려 제2당의 자리에 올랐다. 대안당 지지자 분포를 보면 여성보단 남성, 노년보다는 청년층, 서독보단 동독, 화이트칼라보다는 블루칼라 노동자층에서 우세를 띈다. 그러나 이 차이는 점점 줄어들고 있으며 분명한 점은 극우정당이 이미 대중화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번 총선으로 가장 큰 야당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는 것이다.
더 우려스러운 것은 이번 선거에서 28.5%의 득표율로 제1당을 차지한 독일의 전통적 보수당인 기독민주당(CDU, 이후 기민당)·기독사회당(CSU, 이후 기사당)의 행보다. 총선 한 달 전 기민당은 강경한 우파 이민정책을 의결에 부치기 위해 대안당과도 손을 잡았다. ‘헌법 적대적’ 활동으로 인해 감시 대상인 극우 정당 대안당과 협력하지 않겠다는 (대안당 외) 원내정당들의 ‘금기’를 실질적으로 깬 것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기민/기사당의 지지율에 유의미한 변동은 없었다. 곧 독일 총리가 될 프리드리히 메르츠(Friedrich Merz) 기민당 대표는 전통적 우파로 강경한 이민/난민 정책, 강력한 국방 정책 등을 추구할 것으로 보인다.
반면 사회민주당(SPD, 이후 사민당)은 이번 총선에서 16.5%를 얻으며 연방하원 선거 역사상 가장 최악의 성적을 거두었다. 지난 2021년 총선 16년 만에 근소한 차이로 제1당이 되었지만 집권 직후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여 에너지 대란을 겪었고 독일 경제는 역성장하게 되었다. 사실 외부적 요인과 불안은 규모는 다르지만 늘 있었다. 이에 만족스럽게 대응하지 못했고, 기존 정치세력들의 무능은 극우 급부상과 정치 우경화에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개인적으로 이미 우경화가 된 사민당이 이번 기민/사민 연정에 약소정당으로 참여 함으로써 점점 더 그 색깔을 잃어버리고 더 낮은 지지율이라는 결과를 초래하지는 않을지 걱정된다. 물론 사민당이 이번 연정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과반수 획득을 위해서는 기민당/대안당 연정만이 옵션으로 남기에 현실적으로 다른 대안은 없다.
그렇다고 좌절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현실과 미래는 점점 더 암흑 속으로 빠져들 것이다. 민주주의가 시험대에 올라와 있는 만큼, 그 어느 때 보다 모두의 힘이 필요한 때이다. 반 윤 vs 반 이를 넘어서 어떻게 하면 세계적인 민주주의 위기를 극복하고 더 건강한 민주주의 만들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하고 행동하자.
/성다인
프리드리히 에버트재단 한국사무소에서 남북관계와 동아시아 지정학을 담당하고 있다.70년이 넘은 전쟁을 끝내고 한반도에 평화를 뿌리내리는 일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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