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만큼, 아니 남자보다 더 뛰어나야 했던 그 시절 여군들은, 그래서 진짜 군인이 될 수 있었을까요? 제 답은 ‘그렇다’이면서 동시에 ‘그렇지 않다’입니다. 이게 무슨 궤변이냐 하면… 여군들은 성공했지만, 군과 사회는 성공하지 못했거든요. 군은 당시의 여군들을 여성-‘군인’이기보다 ‘여성’-군인으로 취급함으로써, 이들을 온전한 군인으로 받아들이는 데에 실패했습니다. ‘상상된’ 남성과 싸워야만 했던 여군들은 남자의 몸을 갖지 않았다는 그 하나의 이유만으로 늘 2등 군인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여자의용군을 그려내는 수식어로 흔히 사용됐던 ‘어린 딸들, 연약한 몸, 나약한 소녀’ 따위의 표현들은 이들이 정규군이 되고서도 여성의 몸을 벗어날 수 없었음을 보여주죠.
대통령께서 “나라를 되찾은 다음 이렇게 전쟁을 하게 되어 여성들까지 참전한 데 대해 할 말이 없고 너무나 여러분들에게 감사한다. 여러분들 때문에 더 큰 힘을 얻게 되었다.”라고 하시면서 눈시울을 적셨다.
― 여자의용군 1기 원숙경(최상호, 2012)
여자의용군 1기생 교육 중 훈련소에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은 여성들까지 참전하게 만든 데에 대한 미안함을 내비칩니다. 이 대통령은 여자의용군 2기생 수료식에서도 “어린 딸들이 전방에 나가서 고생하게 되어서 마음이 아프다”(최상호, 2012)라고 이야기한 바 있지요. 이는 마치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만난 소련의 참전 남성이 “우리 남자들에게는 죄책감, 즉 여자들을 싸우게 했다는 죄책감”이 있다고 고백한 것을 떠오르게 합니다(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2015). 이러한 죄책감이나 불편함은 여성은 응당 남성에 의해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생각에서 비롯합니다. 군인이라 할지라도 여성이라면 남성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사고방식은 특히 여군의 전사(戰死)를 둘러싼 남성들의 반응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1951년 5월 18일 강원도 평창군 속사리에서 벌어진 전투 중 여자의용군 2기 출신 3사단 본부중대 소속 이등중사 권이순이 전사하고 맙니다.
오전 10시경 전사한 여군하사 장례식이 곧 시작되었습니다. …(중략)… 모두들 잠시 침묵이 이어졌습니다. 얼굴을 보니 저마다 눈물만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부사단장께서 입을 열어 “육본에서 왜 여군을 일선에 배치하였는지”하며 못마땅한 표정이었습니다. 너무나 애처로워 그러셨겠지요.
― 조봉석 예비역 중령(최상호, 2012)
총탄이 빗발치는 최전선의 전투현장에서 전사한 권이순 이등중사의 소식은 이후 남군들 사이에 ‘아무리 전쟁 중이긴 하나 여군까지 전방에 투입해서 전사하게 해서야 되겠느냐’하는 거센 비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보다 앞서 1951년 2월 후방지역에서 민사 정훈 및 대적 귀순공작을 수행하던 여군 하사 곽용순이 전사한 사실이 언론에 널리 알려지며 ‘대한여성의 귀감’으로 칭송된 것과 달리, 권이순 이등중사의 전사 소식은 언론에 보도되지도 않았죠.
남성 군인들은 여군의 전사를 두고 ‘전장에서 전우가 사망’한 것이 아니라, ‘전장에서 여성을 지키지 못한’ 것으로 받아들이곤 했습니다. 그게 그러니까 여성을 지키는 건 일종의 기사도 같은 것 아니냐고요?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이들은 오빠의 승리를 비는 편지 대신 입대 지원서를 썼고, 높은 경쟁률을 통과하고 ‘빡센(!)’ 훈련까지 수료한 여성들이었다는 것이죠. 레이디나 공주가 아니라요. 그러니 다시 곱씹어보면 남군들의 이러한 반응은 여군을 동일한 훈련을 거쳐, 동등한 지위와 자격으로, 함께 국가안보를 수행하는 동료로 인식하지 못한 결과인 셈입니다.
군 지휘부는 결국 전방에 배치되었던 여군 전원의 후방 배치를 결정했고, 전방 군단 및 사단의 여군들은 1951년 8월 12일 제6사단을 마지막으로 전원 후방으로 철수합니다. 이 시기 여자의용군의 대거 제대가 이어져 1951년 8월 한 달 사이의 전역자만 218명에 달했습니다. 여자의용군 1~2기 총원(874명)의 25%에 달하는 대규모 전역이었죠.
결국 전쟁이라는 특수한 맥락에서 예외적으로 여성이 군에 들어갈 수는 있게 됐어도, 이들이 군의 ‘어디든’ 갈 수는 없었습니다. 여자가 군대에 들어온다 해도, 이들이 갈 수 있는 곳은 일선 전투부대는 아니어야만 했어요. 왜냐? 여성들은 보호받아야 했으니까요. 이러한 보호의 논리는 여군이 할 일, 여군이 갈 곳을 제약하면서 자연스럽게 남군과 여군 사이의 위계를 형성하고 강화하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여군들은 혹독한 훈련을 받고 군인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하는 일이라고는 전화 당번이나 차 당번이 고작이었다.
― 여자배속장교 박을희(국민일보, 1998. 7. 17.)
육군본부 제6중대 중대장으로 여군반을 담당했던 박을희 당시 중위는 여자의용군이 훈련을 다 마치고 군인이 되었음에도 제대로 된 업무영역이 확립되지 않은 채 ‘사무실 당번’으로 취급받았음을 이야기합니다. 교육대 수료 후 경무대로 배치됐던 1기생 이점례는 추운 겨울 경무대의 유리창 청소를 해야 했다고 고백한 바 있죠(최상호, 2012). 그를 비롯한 몇몇 여군들은 상부에 항의하며 업무 변경을 요청하기도 했다지만, 그보다 더 많은 수의 여군들은 그저 묵묵히 주어진 일들을 해내며 아쉬움과 답답함, 실망과 불만을 오가는 깊은 고민에 빠졌을지 모릅니다.
문제는 이들 여자의용군에게 명확한 임무를 부여하지 못하고 여군 인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국방부와 군의 문제가, 여군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물론이고 나아가 여자의용군 폐지 주장으로 이어졌다는 겁니다. 주어진 ‘여성의 일’을 수행했을 뿐인 여군들은 되레 비난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제대로 된 일을 준 적도 없으면서, 왜 제대로 일하지 않냐며 눈을 흘기고 으름장을 놓는 모습들을 보며, 여군들은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요?
1951년 10월 6일 여군 폐지론을 둘러싼 논란을 다룬 부산일보의 기사는 여군들이 흔히 “무엇을 하는 것이냐”하는 눈치를 받아가며 “하잘것없는 잡역에 종사하며 충분한 역량을 발휘 못 하고 있음은 어느 모로나 안타까운 일”이라고 쓰고 있습니다(부산일보, 1951. 10. 6.). 한술 더 떠서 1951년 11월 모 의원은 국회에서 여군이 “일선에서 어떠한 수고를 하는지 모르지만” 후방에서는 “여장교 때문에 우리 군의 군기를 문란하게 하는 예가 많다”는 말을 “자주 듣게” 된다고 여군을 폐지하자고 주장합니다(국회회의록, 1951. 11. 24.). 이쯤 되면 나라가 이들을 지켜주지 못한 것은 이들이 군대에 오도록 해서가 아니라, 군대에 온 이들을 이러한 처지에 놓이도록 했기 때문이라고 말해야겠지요.
이러한 배경에서 여군 지도부는 여군 무용론, 여군 폐지론을 반박할 방안으로 ‘남군보다 더 잘할 수 있는 업무영역을 발굴’하는 것을 목표로 삼게 됩니다. 여군들도 행정병, 통신병, 타자병, 교환병 등의 기술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상부를 설득하고, 당시 개발 초기였던 공병우 박사의 한글타자기를 여군이 먼저 도입·숙달해 주특기로 확보할 계획을 추진하게 되죠. 이게 받아들여진 데에는 이들 여군이 행정 및 기술 분야를 담당케 해서 이에 투입되던 남군들을 전투 분야로 활용할 수 있다는 판단이 크게 작용했고요. 결국 여군이 군대 내에서 존재가치와 필요성을 인정받은 것은 역설적이게도 타자와 경리, 통신 등 일부 분야를 여군의 주특기로, 즉 ‘여성의 일’로 만듦으로써 가능했습니다.
나아가 여군의 존속을 위해 시도된 ‘여군병과’의 확립은, 또한 역설적이게도 여성 군인들이 여군병과의 담을 넘지 못한 채 타 병과로 진출하지 못하게 만드는 장벽이 되어버렸습니다. 여성 군인들이 남군과 동일하게 각종 병과로 배치될 수 있었던 것은 여군 창설 후 40여 년에 가까운 시간이 흐른 뒤였죠. 그러고도 끝까지 금녀의 구역으로 남아있던 포병·기갑·방공·군종 병과가 여군에게도 개방된 것은 무려 2014년의 일이었습니다(국방일보, 2014. 2. 20.).
그때 그 시절, 드높았던 군대의 문턱을 넘은 여성들을 기다리는 것은 ‘군인’의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드넓은 공간의 한 귀퉁이, 견고한 울타리로 둘러싸인 좁디 좁은 ‘여’-군의 자리였지요.
참고문헌
국민일보, 1998. 7. 17.
국방일보, 2014. 2. 20.
국회회의록, 1951. 11. 24.
김엘림(2021). 「6·25 전쟁기 여성의 참전과 그들의 전쟁 경험: 페미니스트 안보연구의 접근」, 서울대학교 외교학 석사학위논문.
부산일보, 1951. 10. 6.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2015).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박은정 역, 문학동네.
최상호(2012). 『6·25전쟁 여군 참전사』,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김엘림
언론정보학과 북한학에 발을 담그고 미디어, 사회, 젠더, 통일, 평화 같은 것들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평화를 더 배워보겠다며 시작한 국제정치학 공부 중에 전쟁과 젠더의 교차에 눈길이 머무르면서, 6.25 전쟁기 여성의 전쟁 경험을 연구했다. 피스모모 평화페미니즘 연구소와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웹진 <다양성+Asia>에 함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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