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오늘 레터는 [사고실험] 서윤정 프레시 매니저님 에피소드를 어떻게 기획하고 제작했는지에 대한 비하인드를 담고 있습니다. 글을 쓰다 보니, 하나의 영상이 만들어지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우연과 행운이 중첩되어야 하는지 다시금 실감하게 됩니다. 만일 영상을 아직 보지 못하셨다면, 한번 시청하신 다음 레터를 읽어주시면 더 재밌을 거예요.
1 '프레시 매니저 명예의 전당'에 대한 기사를 접한 건 지난 3월, 이재용 회계사님과 김지윤 박사님이 출연해주신 에피소드가 연달아 흥행에 성공했던 시점이었습니다. 자신감이 붙은 저는 두 분처럼 인지도와 깊이를 동시에 보유하신 분들을 모셔오기 위한 노력에 나섰는데요. 하지만 잇따른 섭외 불발로 마음고생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눈물겨운 섭외 실패의 역사는 그 뒤로도 계속...)
2 3건의 거절이 도착했던 어느 날, [사고실험]을 아껴주는 친구와 저녁을 먹었습니다. 대화를 나누던 중에 문득 제가 '인지도가 높은' 게스트를 모시는 데 지나치게 매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고실험]에서 가장 중요한 건 게스트만이 들려주실 수 있는 관점과 서사인데, 인지도의 우선순위를 더 높이는 과정에서 시야가 좁아지고 만 것이죠. 돌이켜보면 제가 EO에 입사해 처음으로 인터뷰했던 분은 소상공인 재도전 프로젝트에 참여하신 제천의 꽃집 사장님이셨습니다. 대외적으로 알려진 분은 전혀 아니었지만 진정한 기업가정신을 가진 분이셨고, 그 영상이 많은 분들의 사랑을 받았던 기억을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다음날 출근길 지하철에서 '프레시 매니저 명예의 전당' 기사를 읽게 되었죠.
3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놀라움이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1년에 2억 4천만 원치를 파실 수 있지?'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제가 유년기에 만나뵌 야쿠르트 아주머니에 대한 기억을 거쳐, 프레시 매니저라는 직업의 역사를 반추하는 데 이르렀습니다. 50년 동안 끊임없이 변화하고 적응해온 직업. 우리 모두가 한번쯤 만나본 적 있지만 한번도 깊은 이야기를 들어본 적 없는 사람.
4 검색해보니 hy(구 한국야쿠르트)에서 올해 명예의전당 입상자 두 분을 인터뷰한 블로그 포스트가 있었습니다. 읽자마자 좋은 이야기가 되겠다는 예감이 들었습니다. 공식 이메일, 유튜브,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네이버 블로그 등 가능한 모든 채널로 메시지를 띄웠습니다. 일주일 동안 아무 회신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원래 공식적인 채널로 문의를 드릴 때는 회신율이 현저하게 낮은 편이긴 합니다. 너무 많은 메일이 도착하기도 할 테고, 65만이라는 구독자 수가 매력적이지 않을 수도 있고, 또 메일을 받아보신 분이 의사결정권자가 아닐 경우 상부에 보고하시는 데 어려움도 있을 테고요. 'EO라는 기업가정신을 다루는 채널에서 최성운이라는 PD가 진행하는 사고실험이라는데요...' '그게 뭔데?'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 제대로 닿기만 하면 성사될 거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시도한 탐색에서, 몇 년 전 보도자료에 적힌 홍보실 전화번호를 발견했습니다.
5 hy 홍보팀 OOO입니다, 하고 침착한 목소리의 남성분이 답했습니다. 주절주절 말을 시작했습니다. 'EO'라는 채널에 대해서, '최성운의 사고실험'이라는 프로그램에 대해서, 제가 왜 수상한 사람이 아닌지에 대해서. 다행히 직원분은 저를 수상한 사람으로 여기지 않으셨고, 내부 논의를 해보겠다며 통화를 마치셨습니다. 5분도 되지 않아 긍정의 의사를 전달하는 전화가 다시 걸려왔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분은 차장 직급이셨고, 그렇기에 빠른 의사결정이 내려질 수 있었던 것으로 짐작합니다. 우연히 찾은 전화번호가 그분 자리의 번호였던 것마저도 행운이었습니다.
6 한편, 아까 올해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신 프레시 매니저님은 두 분이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원래 저의 계획은 두 분을 함께 모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저 대신 매니저님들과 소통해주시던 차장님으로부터 두 분 모두가 출연하시는 건 어렵겠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한 분이 '유퀴즈'에 섭외되셨는데, 아무래도 촬영을 하는 날에는 본래 전달 업무에 지장을 받으시기 때문에 연달아 출연을 요청드리기가 조심스럽다는 이유였습니다.
7 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EO'에 출연하셨던 인터뷰이가 '유퀴즈'에 출연하시는 일은 왕왕 있었지만 이렇게 동 타이밍에 섭외가 겹친 건 처음이었습니다. 역시 사람들 생각은 다 비슷하구나 싶기도 했고, 하필이면 맞은편에 유재석님이 있다고 상상하니 이유 모를 웃음이 나왔습니다. 곧이어 걱정의 파도가 연쇄적으로 닥쳤습니다.
8 촬영에 익숙하지 않은 분이 나랑 1대1 대화를 부담스럽게 여기진 않으실까? 아무래도 두 분은 같은 일을 하시는 만큼 함께 나누실 수 있는 공감대가 넓었을 텐데. 그리고 한 분만 나오셔도 분량이 괜찮을까? 분량이 웬만큼 나오려면 출연하시는 분의 개인사까지도 깊게 여쭤봐야 할 텐데. 그런데 개인사를 얘기하는 걸 과연 허락해주실까?... 다시 한번 서윤정 매니저님이 회사와 하셨던 인터뷰를 탐독했습니다. 뭔가 한 꼭지 더 다룰 수 있는 이야기가 없을까, 머리를 굴리면서요. 그때 인터뷰 마지막 부분의 '라디오 DJ' 라는 단어가 눈에 새롭게 들어왔습니다.
9 그러니까, 많은 분들이 좋게 봐주신 라디오 사연은 처음부터 기획했던 게 아니었습니다. 원래 계획대로 두 분을 모두 모셨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장면이었죠. 촬영 전날까지도 정말 이걸 진행하는 게 맞을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첫째로는 내가 한 번도 뵌 적 없는 윤정님의 마음에 가 닿는 글을 써낼 수 있을까? 라는 이유에서였고요. 여기가 진짜 라디오 부스도 아닌데, 혹시나 그 상황을 억지처럼 느끼시면 어떡하나 걱정이 들었습니다. 둘째로는 그동안 [사고실험]에서 이런 '연출'을 해본 적 없다 보니, 보시는 분들이 작위적이라고 느끼진 않으실까 하는 게 이유였습니다. 진심을 담되 지나치게 힘을 주지는 말자, 그리고 현장에서 윤정님이 안 좋아하실 것 같으면 바로 포기하자, 라고 생각하면서 사연을 썼습니다.
10 다시 한번, 라디오 사연은 온전한 선의에서 출발한 아이디어가 아니었습니다. 모두 의도적인 계산 속에서 일어난 일이었죠.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사연을 쓰는 동안에는, PD로서 '그림이 괜찮을까?'라는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고요. 촬영 현장에서는, 윤정님이 점점 마음을 열어주시는 걸 느끼고서 진행해도 괜찮겠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마침내 윤정님께 헤드셋을 씌워드릴 때는, 혼자 속으로 ‘괜찮은 그림이 될 거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제 예상은 틀렸습니다.
11 그 사연, 진심을 다해 썼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제가 상상으로 지어낸 윤정님의 입장이었습니다. 조악하지만 않으면 된다고, 실소가 나오지만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연에 윤정님의 목소리가 입혀지는 순간, 저는 그 문장들이 진짜가 되는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19년이라는 시간의 두께가 그걸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사연을 읽는 목소리는 제 맞은편에 앉아계신 윤정님처럼 들리기도 했고, 처음 유니폼을 입고 카트를 끌고 나섰던 윤정님처럼 들리기도 했습니다. 제가 감히 짐작할 수 없었던 19년의 시간은, 정말 짐작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저의 알량한 계산을 아득히 뛰어넘어버렸습니다.
12 저는 제가 현장에서 느낀 감정을 항상 보시는 분들께 손실 없이 전달하려고 애쓰고, 어느 정도 그 일에 자신도 있는 편입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자신이 없었습니다. 어쨌든 내가 쓴 사연이니까, 나 혼자만 아는 감정에 취해서 오버하는 건 아닐까? 저 혼자 오버한다는 평가를 듣는 거라면 차라리 괜찮았습니다. 혹시라도 저로 인해 윤정님의 진정성까지 깎여나가기라도 할까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편집 과정에서는 최대한 사연 파트가 하나의 음악처럼 들리길 바라면서 만들었습니다. 특히 제가 좋아하는 장면은, 윤정님께서 "순간 되게 울컥하네요"라고 말씀하신 뒤에 이어지는 12초 동안의 침묵인데요. [사고실험]은 대체로 정보량이 (지나치게) 많은 콘텐츠지만, 때로는 침묵이 말보다 훨씬 더 많은 정보를 담을 수 있다는 걸 배웠습니다.
13 이번 에피소드를 만들면서 배운 점이 참 많습니다. 우선 윤정님께서는, 타인에게 선의를 베푸는 법뿐만 아니라 타인의 선의를 받아들이는 법도 가르쳐주셨습니다. 선물은 드리는 사람의 몫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사람의 몫이라는 걸, 불완전한 저의 의도가 타인으로 인해 완성되는 경험을 시켜주셨습니다. 그리고 시청자분들께는, 진심을 다한 결과물은 누군가 반드시 알아봐준다는 사실을 다시 배웠습니다. 지독한 결과주의자인 제가 숫자로 스스로의 가치를 깎아내리지 않게 도와주셨습니다. 제가 무언가 진심을 담아서 만들 때, 사려깊은 눈들이 반드시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전감을 주는지 아시려나요. 제작자로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주, 많이, 고맙습니다. 마지막으로 윤정님이 낭독해주셨던 사연을 붙이면서 글을 마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서울에 사는 31살 남자입니다. 야쿠르트에 얽힌 기억 하나가 떠올라서 이렇게 사연을 보내봅니다.
초등학교를 다니던 때, 수업을 마친 오후 3시에는 항상 야쿠르트 아주머니 한 분이 교문 근처에 서 계셨습니다. 막상 100원짜리 야쿠르트 하나를 사먹을 거였으면서도, 카트 안에 뭐가 들었는지 궁금해서 온통 만지고 헤집고 그랬던 것 같아요. 하지만 아주머니는 단 한 번도 귀찮게 군다고 나무라신 적이 없었지요.
매일 아주머니와 말을 나누었던 건 아닙니다. 가끔은 그 자리에 계셔도 보지 못하고 지나쳤을 때가 더 많았을 거예요. 어차피 야쿠르트 아주머니는 내일도 그 자리에 계실 게 당연했고, 저한테는 더 재밌고 중요한 일들이 많았으니까요. 그때는 매일 같은 자리에 같은 시간에 서 계신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조금 자라서 어른이 되어보니,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다른 사람들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에는 그 어려운 일을 매일매일 해내시는 분들이 계시다는 것도요. 버스 기사님들도, 소방관 분들도, 그리고 이제는 프레시 매니저로 이름이 바뀐 야쿠르트 아주머니분들도 말이죠.
사실 제가 내일 야쿠르트 아주머니 한 분을 만나뵙고 인터뷰하기로 했습니다. 그분은 무려 19년 동안 일을 해오셨다고 하더라고요. 19년 동안 그분은 얼마나 많은 약속을 지켜오셨을까요. 매일매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하루에 위안이 되셨을까요.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을 때에도, 힘을 끌어모아 내딛은 발걸음의 수를 감히 헤아릴 수가 있을까요.
그 분의 오랜 꿈이 라디오 DJ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생각해보니 라디오 DJ도 매일매일 청취자와의 약속을 지키는 직업이네요. 지금까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그분이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다른 사람들의 하루들이 쌓여서, 언젠가 그분이 미래의 자신을 위해 내걸었던 약속이 선물처럼 지켜지는 날이 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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쿼카킴
마침 딱 선선한 금요일 저녁에, 내가 뭘 기다리는지 나도 모르지만 의식하지 않았는데도 발이 저절로 동동대던 찰나에 뉴스레터 알림이 왔어요. 선물같기도 하고, 나는 기억하지 못했지만 누군가가 지켜준 ’약속‘같기도 합니다. 짐작컨대 이번 레터는 아주 빨리 써내리셨을 것 같아요. 윤정님 영상 에피소드를 빨리 풀어내고 싶어서 서둘러 키보드를 두드리시는 모습이 그려질 만큼 신남이 느껴지네요. ㅋㅋㅋ 오늘 학교에서 있었던 멋진 일을 빨리 이야기하고 싶어서 집까지 쉬지않고 뛰어온 아이의 이야기 속에 간간히 섞인 턱밑 숨소리처럼, 이번 레터의 빠르고 산뜻한 문장들을 읽으면서 저도 숨가쁘고 설레어지는 기분이 들었답니다. 사실 질문이나 출연자와의 티키타카 흐름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그리고 성운님이 감정을 굳이 숨기시는 분이 아닌 것이 영상만으로도 보여서 ’아 이번에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긴장하셨네‘, ’평소보다도 더 워딩에 신경을 쓰시는구나‘ 하는 인상을 충분히 받을 수 있었는데, 성운님의 관점에서 카메라가 돌아가기까지의 떨림을 이렇게 글로 담아주시니 너무 좋아요. 다음번 뉴스레터도 기다리겠습니다 :) (부담x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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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 Janghyun
조금 취해있으면 어떤가요, 괜찮습니다. 모든 메이킹이 그렇듯 시간이 지나면 마침표를 넣고 정리해야 하는 게 우리의 임무인데, 인연처럼 만난 콘텐츠에 메이커가 조금 푹 취해있어도 괜찮습니다. 모든 감동은 받아들이는 사람의 몫이니까요. 멀리서 늘 응원합니다. 하반기 파이팅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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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애
마음을 울리는 좋은 인터뷰 잘 보았습니다. 덕분에 세상이 더 아름답게 보입니다:) 성공담이나 비즈니스, 돈 얘기만 중시되는 와중에 '사람'에 집중한 이야기라 귀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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