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지난 8월 27일, 사고실험이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주최하는 <2024 뉴미디어 콘텐츠상> 웹교양 부문 작품상을 수상했습니다. 다음날부터는 회사 스튜디오 이사가 있었고, 한 주 동안 우당탕탕 가구와 장비를 세팅했고, 지난주 목요일에는 새로운 시즌의 첫 촬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제가 EO에 입사한 지 4년째 되는 날입니다.
1 사실 최근에 몇 번이고 글을 쓰다 멈추길 반복했습니다. 7월 말 Q&A 영상에서 호기롭게 채널 독립을 선언하고 휴가를 떠났지만, 돌아오자마자 한 달 내내 불안이 습관이 된 삶을 살았습니다. 어떤 내용을 쓰더라도 읽는 분들이 제 불안을 눈치채고 말 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첫 촬영이 끝나니 마음이 조금 편해지기도 했고, 더 이상 미루면 이 레터의 존재를 잊어버리실 것 같아서, 오늘만큼은 의식의 흐름대로 글을 써보려고 합니다.
2 처음 뉴미디어 콘텐츠상의 존재를 알게 된 건 3년 전, PD로 일한 지 만 1년이 되던 시점의 일입니다. 당시 즐겨보던 유튜브 채널 중에 odg라는 곳이 있었습니다. 기획과 연출이 워낙 탁월해서 많이 배우던 채널이었는데, 그해 웹교양 부문 작품상을 받는 모습을 보며 언젠가 나도 저 상을 받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다음 해인 2022년에는 제가 만든 영상 중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한 영상을 출품했지만, 후보에 오르지 못하고 탈락했습니다.
3 인생이 참 신기합니다. 그때만 해도 정말 이 상을 받게 될 줄도 몰랐고, 다큐멘터리가 아닌 토크 프로그램으로 받을 줄은 더 몰랐고, 제가 그 프로그램의 진행자 역할을 하고 있을 거라는 건 상상도 못했습니다.
4 사고실험은 처음에 네다섯 분의 게스트를 모시는 걸 목표로, 그러니까 많으면 10편 정도를 만들어보는 걸 염두에 두고 시작했습니다. 영상 도입부를 프로그램이나 진행자에 대한 소개 대신 "안녕하세요, 최성운의 사고실험입니다"라는 멋대가리 없는 문장으로 갈음했던 이유도 마땅히 꾸며서 말할 만한 내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진행자의 캐릭터를 보완하기 위해 '지적 대화'라는 키워드를 넣어서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방안도 검토했지만, 결국 드랍하고 말았습니다.
5 어차피 시청자가 판단할 거야. 진행자가 누구든 프로그램 컨셉이 뭐든 사람들이 알아서 판단할 테니까, 먼저 구구절절 설명하려고 들지 말자- 라고, 생각했습니다.
6 사고실험을 그만두려고 했던 첫 번째 순간이 기억납니다. 파일럿 에피소드가 다행히 좋은 반응을 얻었지만, 막상 프로그램 정식 론칭 이후에 내보낸 네 편이 연달아 저조한 성적을 기록했습니다. 다음 차례로 나갈 예정이었던 에피소드는 때마침 터진 외부 이슈로 인해 발행을 취소했습니다. 남은 기회가 줄어들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처음의 성공이 반짝 운이었을 뿐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고개를 들었습니다.
7 그중 저를 가장 괴롭혔던 건, 제가 카메라 앞에서 진행을 한다는 설정부터가 잘못됐을 수 있다는 의심이었습니다. EO의 많은 인터뷰들을 포함해, 유튜브 지식교양 콘텐츠의 대다수는 1인칭 시점에서 진행되는 구조를 가집니다. 정보의 밀도가 높고 몰입이 저해될 소지가 적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1인칭으로 만들 수 있는 인터뷰를 굳이 2인 대화 포맷으로 만들고자 한다면 손실되는 단위 시간당 정보량 이상의 가치가 존재해야 하고, 보통은 진행자의 인지도나 게스트와의 케미스트리가 그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스스로가 그만큼의 리턴을 만들어내는 존재라는 확신이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8 사람들이 왜 굳이 유명하지도 않은 네 모습을 영상에서 봐야 해? 마음속 목소리가 속삭였습니다. 너 때문에 더 잘될 수 있던 이야기들이 꺾이는 걸 보고 있어도 괜찮겠어? 아니,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 가까스로 타일러님을 다음 번 게스트로 모시는 데 성공했지만, 동시에 그게 스스로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9 그 무렵, 두 번째 게스트로 출연해주셨던 에누마 이수인 대표님께서 밥을 사주셨습니다. 요즘 PD님의 고민은 뭐냐고 물으시는 수인님께, 만약 타일러님 에피소드마저 흥행시키지 못한다면 이 프로그램을 접어야 할 것 같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회사 동료들을 볼 낯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진행자를 믿고 출연해주신 게스트분들께도 죄송한 일이라고.
10 그러자 수인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겪는 문제의 70%는 세상의 탓으로 돌릴 줄 알아야 한다고, 모든 게 내 탓이라고 생각하면 정작 아무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고.
11 세상 누구보다 남 탓을 안 하실 것 같은 수인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수긍하는 마음도 들었지만, 대번에 의심이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정말 이번에도 결과가 안 좋아도 내 탓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미리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어서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최선을 다했습니다. 불필요한 문장, 단어, 프레임 하나하나 찾아내서 삭제했습니다. 제 분량을 줄일 수 있을 만큼 줄이고 깎았습니다. 사람들이 보고 싶어하는 건 타일러니까, 방해만 되지 말자. 진행자의 존재감이 공기 같다고 욕 먹어도 된다. 영상만 잘 되면, 일단 살아남기만 하면...
12 타일러님 에피소드 1부는 일주일 만에 20만 조회수를 넘기며 흥행에 성공했습니다. 돌이켜보면 흥행의 가장 중요한 요인은 소재였지, 진행자의 분량이 몇 초 줄어들고 말고는 아니었을 겁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쏟아서 성과를 냈다는 감각이 중요했습니다. 최소한 몇 번은 더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습니다. 그렇게 몇 번 더, 몇 번 더가 이어져서 지금까지 왔습니다.
13 채널 독립을 앞둔 지금의 심정도 타일러님 에피소드를 편집하던 때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모든 대중콘텐츠는 비즈니스 밸류를 창출해야 합니다. 직접 돈을 벌지 못한다면 트래픽을 모아오든, 회사 브랜딩에 도움이 되든, 사회적 의미를 입증해서 정부지원금을 타오든 종국에는 자신의 가치를 돈으로 치환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남의 돈으로 콘텐츠를 만들면서 자아실현에 만족하는 건 배임이라고 배웠습니다.
14 부끄럽게도 사고실험은 지금까지 돈을 버는 콘텐츠는 아니었습니다. 그 말은 다른 누군가가 - EO 한국콘텐츠팀, 이오플래닛팀, 글로벌팀 - 저 대신 벌어왔다는 뜻입니다. 트래픽을 버는 일이든 돈을 버는 일이든 똑같이 어렵기 마련인데, 카메라 앞에 섰다는 이유로 혼자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게 죄송하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채널을 독립하는 이상 이제 팀원들의 덕만 보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지금까지보다 더 치열하게 신규 채널의 생존과 지속가능성을 고민해야 합니다.
(혹시 모를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말씀드리면, 회사로부터 당장 비즈니스 실적을 가져오라는 압력을 받고 있는 건 결코 아닙니다. EO의 리더십들은 저보다 저의 가능성을 더 크게 믿어주는 분들입니다)
15 시상식 전날에는 친구들과의 정기 독서모임이 있었습니다. 그날의 주제는 ‘커리어’였습니다. 강남역 인근의 카페에서 3시간 가까이 토론을 빙자한 수다를 떨다가, 마지막으로 직업인으로서 각자의 강점과 약점에 대해 말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16 저는 제 약점이 '여유 부족'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동안은 스스로의 여유 부족을 타인에게 전가하지 않는 것이 과제였다면, 채널을 독립하는 시점이 되니 이 약점이 더 뼈아프게 다가온다고. 여유가 없는 사람은 매력도 떨어질 텐데, 그게 신규 채널의 이미지에 영향을 줄까 봐 두렵다고 말했습니다.
17 그러자 한 친구가 대답했습니다. 그만큼 네가 진심이라서 그런 게 아닐까. 짝사랑에 빠진 사람은 좋아하는 상대 앞에서 여유가 없어지는 게 당연하니까, 너의 시청자들도 그걸 알아봐주지 않을까.
18 그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그 문장이 머리를 맴돌았습니다. 짝사랑, 이 죽일 놈의 짝사랑...
19 시상식 당일에는 인스타 스토리로 간단히 수상 소식을 알렸습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축하가 도착했습니다. 특별히 신기했던 건, 서로 다른 세 분의 구독자께서 동일하게 “You deserve it!”이라는 메시지를 보내주셨던 일입니다. 그 문장을 입 안에서 조용히 굴릴 때의 울림이 참 좋았습니다.
20 Deserve라는 단어는 한국어로 ”~ 할 자격이 있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무언가와 사랑에 빠지고 싶은 사람에게는, 그로 인해 불안에 떨 자격도 동시에 주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하는 일을 사랑하는 한 저는 언제까지나 불안에 떨 겁니다. 바꿔 말하면, 잃어버리고 싶지 않아서 불안해질 만큼 사랑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사고실험을 지켜봐주신, 그리고 앞으로 함께 해주실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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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days
서로 다른 세 분의 구독자, 한 사람 더 보태주세요. 자격 충분합니다. 너무 잘 보고 있는 1인입니다. 채널 독립하신다면 어떤 프로그램으로 만나뵙는 걸까요? 설레는 맘으로 기다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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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운님 정말 고맙습니다.
저는 평소에 운전을 많이합니다. 그래서 저는 최성운의 사고실험을 주로 mp3 음성파일로 변환해 듣는 사람입니다. 처음에는 영상을 틀어놓고 운전했었는데 운전중 시선을 분산시켜 위험함을 느껴 mp3로 들어볼까? 음질이 좋아 들을만 한거 같은데? 하고 시도해봤죠. 그리고 매우 만족했습니다. 그래서 저한테는 재밌는 화면보다는 음성의 질, 목소리 등이 중요한데 최성운의 사고실험이 다른 유튜브 채널에 비해 압도적으로 음성의 질과 목소리가 좋고 대화 내용이 편안함을 느꼈습니다. 처음에는 유튜브에서 왜 저렇게 음향에 진심이지? 라고 생각했었다가 이제는 음향에 진심이지 않은 채널은 잘 보지도 않게 되었네요 사람들은 우리의 어떤 모습에 감동을 받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그게 당연한거고 그래서 별거 아니라고 하고 넘기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공은 남들이 칭찬하는 우리의 모습을 발전시켜야 더 쉽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네요. 저도 odg 채널 구독자인데요, 이제는 최성운의 사고 실험을 더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됐습니다. 유튜브에서 하는 짧은 멘트 등 기교도 중요하지만 본질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최성운의 사고 실험의 본질은 간접 경험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마치 다 듣고 나면 책을 한권 읽는듯한 기분이 드는거죠. 저는 이낙준 님 편을 듣고 또듣고 마치 유명가수 mp3파일처럼 폰에 넣어갖고 다닙니다. 이낙준, 최성운 님 덕분에 제 인생이 바뀌고, 제 가족들 인생이 바뀌고 있는 중이니까요. 본인을 과소평가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스윗한 목소리, 차분한 진행, 깔끔하고 지적인 외모 최성운님의 당연하지만 엄첨난 강점 같습니다. 항상 응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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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테리어 여자
바로 위 댓글 중 '스윗한 목소리, 차분한 진행, 깔끔하고 지적인 외모' 이 문장이 제 생각과 똑같았어요. 너무나 진행을 잘 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고민이 있으실 줄은 생각도 못했어요. 성운님이 계셔서 프로그램이 더 빛이 났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또 이만큼의 부담감을 안고 계셨기에 더 좋은 프로그램이 만들어졌던 것 같아서 감사 드려요. 다른 사람들에게 얼굴이 공개되고, 편집이 되더라도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이 보인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인 것 같아요. 좋은 컨텐츠 만들어주셔서 정말 감사하고 매 영상의 댓글에 '질문자의 질문 수준이 대단하다'는 말에 항상 좋아요 남기고 갑니다. 성운님이 어떤 방향으로 더 나아가시든 늘 응원할게요. 상 받으신 거 너무너무 축하 드립니다. You deserve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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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yeonjiy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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