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기억의 무덤에서 돌아온 [사고실험] 레터입니다. 이번 글은 "재능은 일회용, 결핍은 내 무기" 디자이너 박시영과 나눈 일과 사랑에 대한 수다" 영상과 관련해서 써봤습니다. 모두 여름 건강히 보내시기를!
0 6월은 많이 바빴다. 몸보다도 여러 개로 나누어진 자아가 바빴다. 매주 파이디자인스쿨에서 전문가로서 수업을 했고, 서로 다른 채널들에 진행자와 패널로 출연했고, 본업인 사고실험 촬영도 3번이나 있었다. 매사 최선을 다한다곤 했지만 모든 일에서 조금씩 미끄러지는 기분이었다. 초보 프리랜서의 삶은 예상보다도 훨씬 더 어려웠다.
1 먹고 살기 위해, 또 맡은 책임을 다하기 위해 여러 자아를 앞세우는 동안 가장 뒤로 밀려난 건 PD로서의 자아였다. 시영님과의 촬영은 끝내줬다. 내 인생에 남을 대화를 나눴다는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영상의 러닝타임이 적게 잡아도 2시간은 나올 것 같았고, 처음 다뤄보는 분량을 작업하는 동안 완성은 자꾸만 늦어졌다. 틈틈이 스토리라인 편집은 했지만 마무리 단계에서 절대적으로 몰입할 시간이 부족했다. 제발 3일만. 아무 일정도 알림도 없이 오직 편집만 할 수 있는 3일이 주어지기를 빌었다.
2 그 사이 스토리캠프에서 촬영했던 영화 애호가 모임 팟캐스트가 초대박이 났다. 민경단군종범 세 분한테 업혀가긴 했지만 나 역시도 나름의 역할을 한 것 같아 뿌듯했다. 사람들이 우리의 대화를 보며 깔깔 웃고 스트레스를 푸는 걸 보고 있노라면 행복해졌다. 같은 날 샤로잡다에서 처음 시도해본 기획인 수학자 월드컵 특집도 예상보다 좋은 반응을 얻고 있었다.
3 문득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나도 이 영상들이 너무너무 좋고 재밌는데, 그래서 통으로 서너 번씩 보고 댓글도 다 읽었는데, 만일 앞으로 내가 만든 영상보다 내가 출연한 영상이 더 좋아지면 어쩌지. 지금까지 내게 가장 중요했던 PD라는 정체성이, 더 이상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게 돼버리면 어쩌지. (왜 그딴 걱정을 사서 하냐고 묻는다면 당신이 맞다. 멘헤라여서 그랬다)
4 PD로서의 효능감을 느끼려면 빨리 영상을 완성해서 올려야 했다. 이미 채널은 3주째 업로드가 없으면서 죽어가고 있었다. 그냥 시영님 에피소드를 1, 2부로 쪼갤까. 근데 시즌 2부터는 게스트 한 분당 한 편만 올리겠다고 가오잡고 선언했었는데. 해도해도 분량이 너무 기니까 타협해도 되지 않을까. 복귀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멈춰있긴 그래. 두 개로 쪼개면 노출도 늘어나고 좋잖아. 솔직히 사람들도 2시간짜리는 보기 힘들 거라고…
5 타협을 막은 건 희미한 직관의 힘이었다. 작년 11월에 휴재공지 글을 올리던 순간을 떠올렸다. 누가 유튜브에서 그따위 긴 글을 읽어주기나 할까 싶던 두려움과, 그 뒤로 메일함에 도착했던 수많은 반응을 기억했다. 그 시점부터 나는 직관의 말을 듣는 빈도가 높아졌다.
6 명백한 플레이북이 존재하는 상황에서는 당연히 논리의 말을 듣는 게 옳다. 그리고 그 결정은 당연한 만큼 빠르게 잊혀진다. 반대로 불확실성 속에서 직관에 의거한 의사결정이 성공했을 때, 그 감각은 몸에 새겨진다. 새겨지고 남아서 다음번의 나를 돕는다. 그게 내가 작년에 얻은 가장 큰 레슨이었다.
7 그리고 직관에 따르면 이번 에피소드는 한 편으로 완결되어야만 했다. 노출이 어쩌고 조회수가 어쩌고 이전에, 우리 둘의 대화가 큰 호를 그리다 하나의 점으로 수렴하는 감각을 포기해서는 안 돼. 2시간을 온전히 써야만 닿을 수 있는 마음이 있고, 그게 사고실험을 사고실험으로 만드는 거니까. 그의 말은 이번에도 옳았다.
덧. 마지막 몬트리올 담배 에피소드는 예전 같았으면 절대 현장에서 하지도, 편집에 넣지도 않았을 얘기였다. 그 순간 내 앞에 있던 게 시영님이라서, 이 사람에게는 어떤 얘기를 해도 안전할 것 같아서 튀어나온 말이었다. 무엇보다도 스스로 솔직해질 수 있게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시영님. 그리고 영상 봐주신 모든 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저에게 가장 소중한 건 PD로서의 정체성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했어요🙇♂️
의견을 남겨주세요
지영
성운님 글 볼때마다 저렇게 잘하시는 분도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구나 이런 느낌이 들어, 공감과 위로를 받게 되네요 어쩌다가 들어오게 됐는데 응원합니다 :)
의견을 남겨주세요
서영
비공개버전으로 공개해 주시면 안될까요~너무 궁금한데용~^^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