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독자님, 안녕하세요. 베를린에 머문 지 어느덧 5일 차입니다. 시간이 아주 빠른 듯-느린 듯 한 기분이에요. 프롤로그 이후 첫 편지 발송이 좀 늦었죠? 머릿속 글감 조각이 퍼즐처럼 마구 뒤엉켜 분류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어요.
오늘은 저의 베를린 첫 숙소, 그리고 호스트 베아트릭스 할머니, 그리고 그와 대화를 나누며 생각한 것들을 풀어보려고 해요.
베아트릭스의 방은 예약한 3개의 숙소 중에 제가 가장 기대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매우 큰일 났습니다. 처음부터 너무 좋은 곳에 머물게 되어서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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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ment
새소리가 들리는 서베를린의 동네
이 숙소를 고른 이유는 공간 그 자체도 있었지만 무언가 남달라 보이는 호스트 소개 때문이었어요. '어린이책 작가'라는 직업, 좋아하는 것은 '노래 부르기'라고 써둔 깨알 포인트, 호스트의 취향이 20년 넘게 쌓여 있다는 앤틱풍 집까지. 후기도 하나같이 칭찬 일색이었고요. 베를린의 무드가 잔뜩 담긴 힙하고 모던한 방도 좋겠지만, 누군가 오랜 세월 동안 정성껏 빚어낸 공간이 너무 궁금했어요.
이렇게 기대를 한 보따리 품고 도착한 숙소의 첫인상은, 와... 정말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환상적이었답니다. 담쟁이 덩굴이 둘러싼 노란색 건물 외관도 심상치 않았지만, 내부는 더 끝내줬거든요. 일단 규모부터가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컸어요. 입구부터 묘사하자면, 복도 한쪽에는 할머니의 멋쟁이 외투와 가방 등 패션 소품이, 반대편에는 꾸준히 수집한 듯한 미니어처 자동차와 기차 모형이 진열되어 있었어요.
5일 동안 저의 방이 될 공간은 반투명한 유리로 덮인 아치형 문을 열면 나옵니다. 일반 아파트의 1.5배는 될 것 같은 높은 천장에는 고풍스러운 옛 양식이 새겨져 있고, 흰색 나무 창밖으로는 푸릇푸릇 프라이빗 정원이 한눈에 들어와요. 여기 와서 새소리와 부서지는 햇살에 눈이 저절로 떠지는 경험을... 매일 하고 있답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구석구석 숨겨져 있는 예술작품과 고가구였는데요, 창문 아래, 옷장 위, 침대 옆, 벽면 등 물건을 올려둘 수 있는 곳은 모두 아트토이나 미술 작품이 한자리씩 꿰차고 있어요. 그 조합이 하나도 번잡스럽지 않고 아주 앙증맞은 것을 보면 역시 할머니의 안목이 뛰어나구나 싶었습니다. 도대체 언제 만들어졌을지 짐작도 가지 않는 옷장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작품이었어요. 화장실과 주방의 아름다움까지 말하려면 끝이 없을 정도고요.
이 정도로 호들갑을 떨면...아마 실제 모습이 너무 궁금하시겠죠?
정말정말 슬프게도... 제가 보여드릴 수 있는 건 정원 뿐이랍니다. 베아트릭스와 약속을 했거든요. 집 내부의 사진은 온라인에 게시하지 않기로요. (실컷 기대시켜 놓고 죄송해요. 여러분의 상상에 맡길게요.)
체크인한 다음 날, 모닝커피를 한잔하며 이야기를 나눴는데, 이런 말을 덧붙이며 부탁하더라고요.
집은 누군가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의 집합체라고 생각해요. 베아트릭스는 25년이나 한집에서 살았으니 공간 안에 담긴 농도가 더 짙을 거고요. 제가 실제로 와서 봤을 때 사진보다 더 멋지다고 느껴졌던 이유 역시 공간의 전경만으로는 느끼지 못할, 가까이 들여다봤을 때만 느껴지는 디테일한 이야기 때문이지 않았을까요?
이곳은 게스트를 받는 집이기 때문에 에어비앤비에 방 사진도 올라가 있지만, 그 이상은 절대 오픈하지 않고 있대요. 제가 공간에 관해 무언갈 물어보면 2절 3절까지 이어가며 신나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귀여운 분이지만 그걸 굳이 불특정 다수에게 하고 싶지는 않은, 또한 나의 긴 시간을 대변하고 있는 소중한 공간이 단순히 이미지 소비로 끝나지는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지 않았을까- 하고 감히 짐작만 해봅니다.
나는 어디까지 오픈하고 싶은 사람일까
베아트릭스와 이야기를 마치고 제 안에 종종 떠오르던 고민을 다시 꺼내 봤어요. 클릭 한 번으로 누군가의 하루를 엿볼 수 있고, 또 각자가 그것을 자발적으로 나누고 있는 시대에 살며 요즘 이런 생각을 해요. 우리는 분명 누군가와 연결되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나만 보는 일기장이 아닌 타인과 공유하는 SNS에 일상을 올리지만, 그게 자연스러워진 만큼 너무 과잉되어 있지는 않는가 하고요.
우리 삶의 크고 작은 이벤트는 이야깃거리가 될 수 있지만, 전부 콘텐츠화해야 할 필요는 없을 거예요. 내가 가진 것 중에는 밖으로 꺼냈을 때 더 가치가 있는 것도, 아직은 설익어서 잠시 묵혀두어야 하는 것도, 결이 맞는 소수와만 나누고 싶은 것도 있을 테지요.
그래서 저도 여행하는 동안 어떤 이야기를 꺼내고, 또 어떤 것은 제 안에만 남겨두고 싶은지 매일 헷갈려하고 있어요. 혹은 꼭 그걸 밖으로 꺼내야만 할 것인가?도요. (그러기엔 뉴스레터가 스불재가 되어 버렸지만...)
모든 업로드를 무겁게 해야 한다는 훈수를 두려던 것은 아니고요, 그저 제 안에 있는 화두를 같이 나누고 싶었습니다. 사람마다 지닌 삶의 카드는 여러 장이고, 그중에 어떤 것을 어느 시점에 다른 이에게 내놓을 것인가도 각자의 선택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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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나는 여행기 보내줄 줄 알았더니 결론도 없는 요상한 담론을 늘어놓는 내용에 실망하셨다면... 유감입니다(ㅠㅠ)
그런데 누군가는 '여행의 준비물은 적당한 생각거리다'라고 하더라고요. 저 역시 낯선 동네에서 걷고, 뛰고, 멍때리면서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또 비워가는 나날을 보내는 중입니다. 물론 베를린의 매력도 많이 담아올 예정이니 너무 멀리.. 가진 마세요오
- 2024. 05. 04 | 곧 떠날 평화로운 이 동네에서의 시간을 추억하며, 베를린에서 씀
local story
평화로운 부촌, 샤를로텐부르크
첫 숙소가 위치한 샤를로텐부르크는 서베를린의 전통적인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동네에요. 전체적으로 연령대가 높고 오래 거주한 주민들이 많이 모여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머물러보니 여유와 기품이 넘쳐흐르는 어른들이 느긋하게 살아가는 동네처럼 느껴졌어요. 걷다 보면 명품 숍이나 골동품점, 가구점 등도 많이 보여요.
샤를로텐부르크 궁전과 동물원-티어가르텐 공원을 양쪽에 끼고 있어서 산책하기도 좋은 지역입니다. 흔히 베를린 하면 떠올리는 '힙함' 보다는 단정하고 여유 낭낭한 서유럽 느낌이 더 강해요.
단기 여행자들이 많이 오는 지역은 아닌 것 같은데, 막상 지내보니 숙소를 잡기에도 나쁘지 않아요. 주요 관광지가 몰려 있는 미떼지구와 그리 멀지 않고 무엇보다 동네가 무척 조용하고 평화로워서 아침-밤에 좋습니다.
place
Savignyplatz 근처 가볼 만한 곳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동네는 아니지만, 혹시라도 베를린에서 미떼 말고 다른 동네도 궁금하다! 이 근처에 숙소를 잡았다! 하시는 분들을 위해 제가 숙소 근처를 총총 돌아다니면서 진짜로 방문해 본 곳만 추천합니다.
Jazz bar | A-Trane : 1992년에 오픈한 인터내셔널 재즈클럽. 전 세계 유명 뮤지션을 초청해서 공연하는 경우도 많아서 운이 좋으면 화려한 라인업을 만나게 될지도 몰라요. 인기 공연의 경우 예약이 마감되는 경우도 있으니, 웹사이트에서 미리 일정을 확인하고 가세요. 저는 오늘 다녀왔는데.... 2시간 넘게 꽉꽉 채운 공연 정말 최고였다는 소감만 짧게 남깁니다. (노래 듣다 눈물 찔끔 흘림)
Restaurant | Madame Ngo Une Brasserie Hanoi : 길게 늘어선 아시아 푸드 거리에서 가장 인기 많은 곳중 하나. 제가 아직 베트남은 못가봐서 현지 쌀국수랑 비교는 못하겠고... 한국과 비교했을 때는 꽤 준수한 수준이었습니다. 같은 라인에 대만 레스토랑 Lon Men's Noodle House도 인기가 많아요. 뜨끈한 국물과 면을 함께 먹고 싶을 때 둘 중 하나 가면 좋을 듯
Shop | Hüsken Antiques : 우연히 발견한 숙소 근처 골동품 샵. 겉에서 봤을 때도 어마어마한 물건들이 많아 보였는데 실제로 들어가니 집 하나만큼 통째로 샵으로 운영 중이었어요. 조명, 그릇, 오브제 등 딱 봐도 오래되고 비싸보이는 물건들이 한가득이라 아이쇼핑 하기 좋습니다. (찐 쇼핑은..초큼 비싸요..) 골동품에 관심이 많다면 'antiques' or 'antik' 라고 검색해보세요. 근처에서 비슷한 대형 골동품 숍들을 많이 찾을 수 있을 거예요.
Bookshop | Bücherbogen am Savignyplatz GmbH : S반 정거장 바로 옆에 있는 예술 서점으로 규모가 꽤 큽니다. 건축, 디자인, 사진, 패션 등 분야 좋아하시는 분들은 볼 거리가 많을 것 같아요. 크고 두꺼운 예술책, 사진집 등 왕왕 발견할 수 있고 영문책도 많이 보였어요. 분류도 체계적으로 잘 되어 있고 굴다리처럼 이어지는 공간 구획도 재미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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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첫 사진보고 기절했어요. 이렇게 귀엽고 멋진 할머니의 집은 어떨까? 궁금해서라도 베를린에 가고싶어졌달까요! 설님의 이야기에 공감합니다. 너무 많은 것을 보여주려 하는 삶은 진짜 중요한 가치를 잊게 만드는 것 같아요. 그 순간에 몰입하고 만끽하는 걸 방해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때론 어떤 행동을 할 때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행동하는 건 아닌지 살피게 되더라고요.
Moment in Berl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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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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