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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이 성경이 되기까지

《성경 번역의 역사》 두 번째 이야기

2025.08.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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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츠피라 HaTzefira

읽고 파, 나팔 소리를 알아차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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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3년을 동고동락하던 제자들조차, 그들 가운데 누가 더 높은지를 알고싶어했습니다(마 20:20-28).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 교회는  바울파, 아볼로파, 베드로파로 나뉘어 당파를 이루기까지 했습니다. 서로 '다른 복음'을 따르는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가 확장되고 다양한 사상과 해석이 등장하면서 교회는 점차 '정통'을 가리기 위한 기준을 필요로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66권의 완성된 책'으로 받아들이는 데 익숙합니다. 이 66권의 책들이 언제부터 성경이 되었는지,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의 형태에 이르게 되었는지, 나아가 그 문서들이 왜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겨졌는지 고민해 보셨나요?

지난 시간에 이어 살펴볼 『성경 번역의 역사』에서 래리 스톤은 이런 물음을 던집니다.

❝성경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인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정경'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특정 시점에 교회를 통해 확정된 공식적인 목록을 떠올립니다. 실제로 신약성경 27권의 목록을 히포 공의회(393년), 카르타고 공의회(397년)에서 확정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공의회에서 새로운 성경을 만들어내거나, 처음으로 경전을 선포한 것은 아닙니다. 이미 교회에서 수십 년, 혹은 수백 년 동안 예배와 교훈, 교육의 자리에서 사용되던 문서들을 공식적으로 확인하고 고정한 것에 가까웠습니다.

 

정경은 어느 날 갑자기 결정된 것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오랜 시간 기능하며 정경이 되어간 것이라고 합니다. 문뜩 질문이 생깁니다. 단순히 정경의 목록 안에 어떤 책이 들어갔느냐가 아닙니다. '정경'이라는 것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더 나아가 어떤 기록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졌는가- 그것을 알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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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넓히기 위해, 우리는 유대교와 기독교뿐 아니라, 그 이전부터 형성되어온 고대근동 전체의 문헌 문화와 권위 개념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문헌을 신성하게 여기는 문화는 고대 유대교보다 훨씬 이전부터 이스라엘을 포함한 고대근동 전역에 널리 퍼져있었습니다. 문헌은 단순히 지식을 보존하는 수단이 아니었습니다. 공동체의 정체성을 구성하고, 신과 인간 사이의 질서를 매개하며, 사회 전체를 형성하는 거룩한 기호 체계였습니다.

 

기원전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사용된 점토판. 설형문자가 새겨진 이 문서는 신의 명령과 법을 기록하여 성소에 보관하던 용도로 사용되었다. 고대인들에게는 단순한 텍스트가 아니라, 신과의 언약을 지속하는 신성한 매체였다.
ⓒ Photo by Archaeology News Network via Flickr
기원전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사용된 점토판. 설형문자가 새겨진 이 문서는 신의 명령과 법을 기록하여 성소에 보관하던 용도로 사용되었다. 고대인들에게는 단순한 텍스트가 아니라, 신과의 언약을 지속하는 신성한 매체였다.
ⓒ Photo by Archaeology News Network via Flickr

고대 메소포타미아에는 '신의 명령'을 점토판에 새기고 그것을 성소에 보관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이 점토판 문헌은 단순히 읽기 위한 텍스트가 아니라, 신과의 언약을 지속시키는 매체로 작용했습니다. 고대 이집트 사제들은 의례 때마다 특정 문장을 암송했고, 그 문장들은 신의 영역을 인간에게 지속적으로 연결해주는 신성한 언어로 여겨졌습니다. 이처럼 고대 문헌은 반드시 '문서'의 형태로 남아있지 않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고대의 문헌은 실행되고 암송되며 살아 있는 기억의 장치에 가까웠습니다. 이를 '신성한 문헌 (sacred writings)'이라 칭합니다. 

 

이러한 문화적 토대 위에서 유대교의 문헌 전통이 형성되었습니다. 모세가 기록한 다섯 권의 율법서, 토라는 단순히 고대 이스라엘의 '법률문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토라는 출애굽 공동체의 삶을 떠받친 살아 있는 텍스트였습니다. 그들은 제사와 절기, 공동체 교육을 통해 반복적으로 낭독하고 암송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했습니다. 그들에게 말씀은 눈으로 확인되는 문서가 되기 이전부터 아주 당연하게 입으로 암송되고, 귀로 들려지고, 몸으로 살아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정경이 형성되었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의 책이 완성된 사건이 아닙니다. 그 속에 구성된 책들이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사용되었는가, 그리고 동시에 그 책들이 공동체를 어떻게 살게 하였는가를 이해해야 하는, 범위가 넓은 문제입니다. 그 시작은 고대근동에서 비롯되었고, 유대 전통 속에서 유대만의 독창적인 형태로 구조화되었으며, 초기 기독교에 계승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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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는 처음부터 하나의 '성경'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사도들과 제자들은 유대인의 경전을 통해 복음을 해석하며 가르쳤고. 예수님에 관한 기억과 그분의 가르침은 구술과 서신의 형태로 전승되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며, 공동체의 확장과 함께 초대교회는 다양하고 복잡한 문제들을 마주했습니다. 예수님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은 세대들이 역사 무대 위에서 사라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의 전승들이 점차 '문헌화' 되기 시작했고, 그 책들이 초대교회 안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가운데 가장 먼저 정경의 기능을 한 책이 있습니다. 바로 바울의 편지입니다.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라고 스스로를 칭했던 바울(빌 3:5)은 곳곳에 흩어진 교회들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믿음과 의로움,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했습니다. 그의 서신은 실천적인 권면은 물론 신학적 설명을 모두 담고 있었기 때문에, 다양한 지역 교회에서 예배와 교육에 사용되었습니다. 이미 일부 초대교회 안에서 바울 서신이 정경과 같이 기능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바울의 편지가 성경과 같이 여겨졌다고 증언하기도 했습니다(벧후 3:15-16).

 

이후 복음서가 기록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 죽음과 부활을 전하는 복음서는 여러 형태로 존재했다가, 점차 사도적 전승을 기반으로 한 마가, 마태, 누가, 요한의 복음서가 핵심 문서로 자리잡게 됩니다. 

 

2세기에 이르러 교회를 강타한 문제는 '이단'의 문제였습니다. 그가운데 마르키온이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마르시온이 최초의 신약 성경 목록을 작성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교회가 구약을 완전히 배제하고, 유대교적 성향을 보이는 사도들의 책을 제외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교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오히려 교회가 사용하고 있던 문서들을 의식적으로 '정경'으로 자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마르키온(Marcion, 2세기)은 스스로 사도 바울의 정통 후계자임을 자처하며, 루가복음 변개본과 바울서신 10편만을 ‘정경’으로 인정했다. 그는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을 철저히 분리하고, 오히려 바울의 복음을 ‘순수한 복음’이라 선언했다. 이 극단적 선택은 정통 교회로 하여금 “무엇이 진정한 경전인가”를 다시 묻도록 촉발하였다.
마르키온(Marcion, 2세기)은 스스로 사도 바울의 정통 후계자임을 자처하며, 루가복음 변개본과 바울서신 10편만을 ‘정경’으로 인정했다. 그는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을 철저히 분리하고, 오히려 바울의 복음을 ‘순수한 복음’이라 선언했다. 이 극단적 선택은 정통 교회로 하여금 “무엇이 진정한 경전인가”를 다시 묻도록 촉발하였다.

그는 창조주를 율법과 복수만을 행하는 신으로 비난하여,
우리 주님의 아버지와 전혀 다르다고 평가하고, 그를 우리 복음에서 배제했다.


터툴리안, 『마르키온 반박문』(Adversus Marcionem) IV.6

 

 

이후 3세기에는 오리게네스가 교회에서 통용되는 문서들을 세 범주로 나누었습니다. 교회가 보편적으로 인정한 문서들, 논쟁이 있었으나 사용되던 문서들, 그리고 정경 밖의 문서들. 이 분류는 4세기 말 히포(393)와 카르타고(397) 공의회에서 신약을 27권으로 공인하는 과정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때 '공인'은 새로운 결정을 내렸다기 보다, 이미 교회 안에서 사용되고 있는 문서들을 공식적으로 교회의 문서로 확인하고, 정리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신약 정경화가 순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후서, 유다서, 요한계시록을 일부 지역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반대로 헤르마스의 목자, 디다케, 베드로묵시룩 등은 오히려 널리 읽혔지만 정경에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앞서 언급했던 것과 같이 내용의 우열로 정경을 결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신약 정경은 공의회의 결정 이전에, 교회 공동체 안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되었는지, 또한 사도적 권위가 인정되는지, 교회 공동체에서 실천되고 있는지-의 여부를 고려했던 것입니다.

 

이 문헌들이 정경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에 사용된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서 지속적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정경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John Barton, Holy Writings, Sacred Text: The Canon in Early Christianity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7),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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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완전히 새로운 종교로서 출발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그리고 초대교회는 모두 유대적 배경 안에서 살아가고 있었으며, 문헌관 역시 고대근동과 유대 문헌 문화 속에서 형성되었습니다. 이 흔적은 신약 성경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과 부활 사건을 두고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누가복음 24장 44절

 

Marc Chagall, “Jewish Jesus” (1938)ⓒ The Jewish Museum, New York
Marc Chagall, “Jewish Jesus” (1938)
ⓒ The Jewish Museum, New York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이라는 표현은 히브리 성경의 삼분법(타나크 Tanakh)—토라(율법), 느비임(예언서), 케투빔(성문서)—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이는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히브리 성경의 성경 이해, 곧 내용뿐만 아니라 그 구조를 받아들이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구약을 다수 인용합니다. 그가 성경을 인용할 때  “기록되었으되(καθὼς γέγραπται)", “성경이 말하되(ἡ γραφὴ λέγει)"와 같은 표현을 자주 사용합니다. 전자는 '완료 수동태'를 사용하여 '이미 기록된 문서가, 여전히 유효하게 서 있다'는 뉘앙스를 강조합니다. 후자는 현재 능동태로 성경이 지금도 말하고 있음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바울은 과거에 기록된 문서를 단순히 인용한 것이 아니라, 현재적 권위로 끌어와 설교와 논증의 근거로 삼았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렇게 구약을 인용하여 복음을 전한 바울과 복음서 기자들은 자신의 글이 '성경'이 될 것이라는 자의식 없이 가르침을 기록했다는 점입니다. 신약 문서들은 처음부터 정경을 채우기 위해 작성된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필요에 따라 작성되었고, 후에 반복적으로 사용되면서 정경으로 기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히포와 카르타고 공의회가 이루어지기 전에 말입니다. 이는 유대 전통이 문헌을 다루는 방식과 일치하는 지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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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문헌관을 계승해준 유대교는 어떻게 정경을 형성했을까요?

 

유대 문헌 전통의 가장 핵심적인 특징은 모든 문서가 동일한 권위를 갖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유대교는 아주 일찍부터 문헌을 영감의 질적 위계에 따라 구분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구약성경'이라고 부르는 히브리 성경은 사실 세 개의 층위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러한 삼분법은 단순히 책의 내용이나 장르에 따른 구분이 아니라, 문헌의 영감, 권위, 기능의 차이를 반영한 체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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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높은 권위를 지닌 토라는 모세에게 직접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겨집니다. 어떤 해석도 더하거나 뺄 수 없습니다. 율법 해석과 교리 판단, 예배 형식 등 모든 유대교의 실천의 중심에 토라가 있습니다. 이러한 토라는 법이자 ‘정체성’이며, 하나님의 음성 자체로 여겨집니다. 심지어 탈무드는 '토라를 의심하는 자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까지 말합니다. 

 

네비임은 토라를 뒤잇는 권위를 가집니다. 비록 모세처럼 직접 계시는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영감을 주신 예언자들이 토라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 내용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들은 토라에 근거해 백성을 꾸짖거나, 회개를 촉구했고, 미래를 예언했습니다. 그들의 말로 새로운 율법을 제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하나님의 계시의 연장으로 여겨졌습니다.

 

마지막 층위인 케투빔은 예배와 묵상, 지혜의 자료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문서들의 정경적 권위는 공동체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었습니다. 어떤 문헌은 긴 시간 동안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아가서의 경우, 그 언어가 지나치게 감각적이고 세속적이라는 이유로 비판받았고, 전도서는 허무주의적이라는 평가 때문에 논란이 되었습니다. 에스더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성전에서 낭독되기 부적절하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 문헌은 절기 예식과 결합되기도 하고, 랍비의 해석 전통이 점차 발전하면서 결국 정경에 포함되었습니다.

 

정경의 형성은 이처럼 실천과 반복, 해석과 수용이 누적되어 마련되었습니다. 공동체가 그것을 읽고 암송하고, 예배에서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가운데, 문헌은 점차 거룩한 권위를 획득해 나갔습니다. 문헌이 성경이 된 것이 아니라, 문헌이 공동체 안에서 성경으로 이미 기능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 정경으로 인식된 것입니다. 

 

문헌 구성은 지역마다 차이를 보였습니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대 공동체는 보수적인 모세오경 중심 경향을 유지했지만, 알렉산드리아 등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그리스어로 번역된 70인역을 사용했고, 그 안에는 외경이라 불리는 문서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초대 기독교는 이러한 70인역을 통해 유대 문헌을 수용했고, 후대까지 그 영향이 이어졌습니다.

 

즉, 히브리의 정경은 고정된 목록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기능화된 전승 체계 속에서 기독교의 정경보다 더 유연한 성격을 보였습니다. 공동체의 사용 방식과 문헌에 대한 신학적 수용 여부에 따라 그 권위가 달라진 것이지요. 

 

여기서 잠깐, 우리에게 유대교가 정경을 정한 회의로 알려진 '얌니아 공의회'. 심지어는 이번 메인 도서인 <성경 번역의 역사>에서도 얌니아 공의회에서 히브리 정경이 확정되었다고 언급됩니다. 서기 90년경, 이스라엘 얌니아에서 유대 랍비들이 모여 구약 성경의 목록을 확정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설명은 현대 학계에서 정확하지 않은 가설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이 주장의 허구성은 20세기 중반 이후 유대교 학자들과 기독교 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꾸준히 밝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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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파 랍비이자 유대 문헌사의 권위자인 Shnayer Z. Leiman(슈나이어 Z. 레이만)은 그의 저서에서 얌니아에서 열린 것이 공의회가 아니며, 정경 결정이 이루어진 적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Shnayer Z. Leiman — 유대 정경화 연구의 권위자이며, 탈무드 및 미드라쉬 문헌을 통해 히브리 성경 정경의 형성과정을 조명한 학자. 현재 미국 예시바대학교(Yeshiva University)에서 유대학 및 고전문헌학을 가르치고 있다.
ⓒ Touro University
Shnayer Z. Leiman — 유대 정경화 연구의 권위자이며, 탈무드 및 미드라쉬 문헌을 통해 히브리 성경 정경의 형성과정을 조명한 학자. 현재 미국 예시바대학교(Yeshiva University)에서 유대학 및 고전문헌학을 가르치고 있다.
ⓒ Touro University

유대교의 문헌 정경화에 대해서, '유대교의 자료' 어느 것에도 얌니아 공의회에 대해 언급하지 않습니다.  기독교 학계에서 얌니아 공의회를 지목한 근거는 단 하나, 바빌로니아 탈무드의 일부 구절입니다. 해당 구절은 모세에서 에스라에 이르기까지의 책과 저자를 나열하고 있습니다. 예언서와 성문서, 토라의 구분 없이 나열된 이 목록에는 에스겔서와 다니엘서와 같이 논란이 있던 문헌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충분한 고려 없이 이 구절을 마주한다면, '정경 목록'의 인상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구절은 정경 목록에 대한 서술이 아니었습니다.

탈무드 바바 바트라 14b-15a를 의역ⓒ Babylonian Talmud, Baba Batra 14b–15a
탈무드 바바 바트라 14b-15a를 의역
ⓒ Babylonian Talmud, Baba Batra 14b–15a

19세기 독일의 유대사 연구자들은 유대교의 고대 문헌과 초기 랍비 전통을 연구하면서, 성경 정경이 반드시 어떠한 제도적 회의에서 확정되었을 것이라고 유추했습니다. 완벽하게 '기독교인의 시선'이었습니다. 기독교적 패턴을 유대교에 동일하게 적용하려는 시도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바빌로니아 탈무드의 구절을 인용하면서 해당 목록이 당대 유대교의 성경 구성과 정경 인식을 반영하고 있으며, 그 최종적인 결정이 얌니아 회의를 통해 이루어졌다고 주장했습니다. 

 

얌니아는 어떤 곳이었을까요?

기원후 70년, 로마군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었을 때, 성전 중심의 유대교는 함께 붕괴된 것과 다름 없었습니다. 이에 성전을 대체할 학문 중심의 랍비 유대교가 형성되었던 것입니다.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는 예루살렘 함락 전 로마군에 투항했고, 얌니아에 일종의 랍비 '아카데미' 설립을 허가받았습니다.

 

이후 얌니아는 랍비 교육과 율법 토론의 중심지로 부상했습니다. 얌니아 아카데미는 후에 랍비를 육성하는 예시바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얌니아는 이미 유대교 내부에 존재했던 '교육과 토론'의 역할을 담당했던 곳이지, 정치적 공의회를 위한 장소는 아니었습니다. 성전 신앙에서 문헌 신앙으로 강제 이주된 그들의 새로운 중심지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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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안에서 자연스럽게 성경에 대한 다양한 주제들이 다루어졌지만, 정경 목록을 확정하는 정치적 공의회의 장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정결한(거룩한, 흠없는)것은 무엇인가', '공동채 내에서 사용할 수 있는가, 혹은 어떻게 사용되는가'의 여부였습니다. 얌니아에서 토론이 벌어진 이후에도 문헌에 대한 논쟁은 계속되었고, 지역에 따라 수용되는 문서 역시 달랐습니다. 히브리의 문헌관에서는 어쩌면 당연한 현상입니다.

 

히브리 성경은 특정 시점에 공식적으로 '결정된' 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을 포함한 다양한 히브리 공동체가 문헌을 해석하고, 그것을 가르치고, 또 예배에서 사용하고, 삶에서 실천해가는 과정 속에서 권위를 얻은 문서들이 있었을 뿐입니다. 이러한 연구와 주장이 이어지자 F. F. Bruce(프레드릭 페비 브루스)와 같은 저명한 성서학자들 역시 위의 연구 결과를 따라 얌니아 공의회에 대한 표현을 수정하는 추세를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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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처럼 유연한 유대인의 성경을 교회는 어떻게 정경화하고, 자신들의 성경에 포함시켰을까요? 

초대교회가 구약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간단히 '히브리 성경을 채택했다'는 말로 정리되지 않습니다. 실제로 1-2세기 지중해 세계에서 가장 널리 읽히던 구약은 70인역이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히브리어판 대신 사용한 70인역은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후, 빠르게 퍼져나간 기독교의 복음 선포 현장에서 자연스럽게 교회의 구약으로 자리잡았습니다. 70인역에는 토빗서, 유딧서, 지혜서, 벤 시라서 등 히브리 본문에 포함되지 않은 문서들이 있었지만, 사도와 교부들은 이를 거리낌 없이 사용했습니다.

 

2세기의 저스틴, 이레네우스, 오리게네스와 같은 그리스어 교부들은 설교와 변증에서 70인역을 표준 본문으로 사용하였고, 라틴어권에서도 초기 번역은 70인역 계통을 따랐습니다. 이 단계에서 '교회의 구약'은 이미 히브리 24권(개신교 분법 39권)을 넘어서는 확장 목록으로 기능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4세기에 들어 히에로니무스는 히브리 원전을 바탕으로 라틴어 불가타 성경을 만들었고, '히브리카 베리타스(Hebraica Veritas)', 곧 히브리어 본문이 우선되어야 함을 주장하며 외경을 구분해냈습니다. 그러나 다수 주교단은 여전히 70인역 계열을 예배에서 사용했습니다. 이논의를 정리한 것이 로마(382), 히포(393), 카트라고(397) 공의회였습니다. 이들 공의회에서는 토빗에서 마카베오기까지의 46권을 교회의 법적 구약으로 열거했고, 훗날 카톨릭과 정교회의 표준이 되었습니다. 16세기 종교개혁기, 루터는 히브리 본문에 근거해 외경을 '제2정경'으로 분리하고, 39권만을 구약으로 확정하면서 개신교회의 최종 39권이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기독교가 구약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도 '사용된 문헌이 정경이 된다'는 동일한 원리가 작동했습니다. 70인역이 초기 교회의 실천과 신앙을 지배했기 때문에, 외경까지 포함한 확장 목록이 오랫동안 '교회의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능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교회와 가톨릭에서는 여전히 70인역을 표준으로 삼고 있습니다. 

 

성경은 한순간에 떨어진 하늘의 문서가 아닙니다.

그 문헌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겨진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이후, 공동체 안에서 반복적으로 읽히고, 암송되고, 해석되고, 살아지며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히브리 전통에서 시작된 문헌 사용 방식은 초기 기독교로 이어졌고, 공동체의 예배와 교훈, 그리고 그것을 삶에서 실천하는 과정 속에서 정경으로 기능하는 한 권의 책으로서 자리를 잡아갔습니다. 

우리 역시 그 흔적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번역하고, 또 연구하는 이유도 결국 여기에 있습니다. 단순히 과거에 쓰인 문헌을 해석하기 위함이 아니라, 이 글자가 어떻게 말씀으로 살아 움직이게 되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래리 스톤은 『성경 번역의 역사』의 서두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성경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오늘도 말씀 앞에 섭니다.

번역과 해석, 정경과 역사에 대한 논의는 결국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진실하게 찾아가려는 과정 중 하나입니다. 그 길 위에서 우리는 '얌니아 공의회에 대한 오랜 오해'와 같은 역사 속 왜곡과 오해의 껍질을 벗겨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껍질은, 어쩌면 지금 우리의 눈에도 여전히 씌워져 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매일 성령께 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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