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팟다

잘 믿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굳이, 고생해서 공부까지 하기는 부담스러운 당신께

2025.07.11 |
하츠피라 HaTzefira의 프로필 이미지

하츠피라 HaTzefira

읽고 파, 나팔 소리를 알아차립니다.

성경을 연구하고, 그 내용을 책에 담아 출판하는 제게 꽤나 난처한 질문입니다. 사실 이정도면 양호할지도 모릅니다. 저를 가장 곤란에 빠뜨리는 것은 이런 말들입니다.

 

"나 성경 통독 ☐ 번이나 했어."

"나 매일 큐티해."

"나 ☐ ☐ 교회 설교도 매일 듣잖아."

 

그 말도 일부 맞습니다. 많은 이들이 넘쳐나는 '말씀'에 지쳐 보입니다. 당장 제 주변 지인만 하더라도, 매일 같이 새벽 예배에 출석하고, QT는 벌써 몇 년 차인지 모릅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평일에는 청년 모임에도 참석하고, 유튜브를 틀면 유명한 목사님들의 설교 영상이 쏟아집니다. 이처럼 바쁜 직장 생활과 더 바쁜 신앙생활을 병행하는 이들이 '말씀'의 대홍수 속에 얼마나 큰 막연함과, 나아가 피로감을 느낄지 어림잡아 짐작해 봅니다.

 

첨부 이미지

한때 방탕한 삶을 살았으나, 세상의 지혜와 철학으로 삶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교부 아우구스티누스. 그는 그의 교인들을 위해 진행했던 요한복음 강해에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마음의 빵이다. 설교자는 그 빵을 떼어준다.
그러나 너희는 그것을 먹고, 그것을 되새겨라."
(Verbum Dei panis est cordis nostri.
Praedicator panem frangit; tu manduca, tu ruminare.)

<요한복음 강해> 제2편

아우구스티누스가 히포 교회의 주교로 있을 때 했던 설교입니다. 히포 교회 교인들은 대부분 글을 읽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설교 외에도 개인의 삶에서 행해지는 묵상과 연구가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떡'으로 오신 말씀, '예수님을 우리는 반드시 받아 먹고, 되새겨야 합니다.

 

첨부 이미지

생명의 떡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한복음 8장 31-32절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의 종교적 모습을 상상할 때, 현대인의 관점으로 유대교의 모습을 떠올리면 안 됩니다. 당시 유대인의 일과는 '성경'에 점철되어 있었습니다. 매일 성경을 배우고, 뜨겁게 토론하며 성경을 암기까지 하는 것이 그들의 당연한 삶이었습니다.

1세기 유대교의 모습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는 쯔팟의 <1세기 유대교의 문화·종교적 배경 속에서 예수님의 말씀 이해하기>이미지를 클릭하면 더 자세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1세기 유대교의 모습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는
 쯔팟의 <1세기 유대교의 문화·종교적 배경 속에서 예수님의 말씀 이해하기>
이미지를 클릭하면 더 자세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 유대인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 너희가 내 말 안에 거하면, 나의 참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 수 있다.

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한다. ❞

 

우리는 어쩌면 너무 쉽게, 믿기만 하면 제자가 저절로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미 당신을 '믿은' 유대인에게 제자의 조건을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그분의 말씀 안에 거하는 것. 요한복음의 이 구절 안에서 그분의 말씀 안에 머무는 것과 진리를 아는 것이 한 데 모입니다.

 

예수님의 '말'로 번역된 단어는 우리가 익히 들어온 로고스 λόγος 입니다. 단어 자체는 '말'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헬라 철학에서 로고스 λόγος는 세상의 근간이 되는 이성의 원리, 법칙, 구조라는 더 좁은 의미로 사용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복음 1장 1절

 

요한복음의 머리와도 같은 이 구절에서 '말씀'의 자리에 사용된 단어가 바로 로고스 λόγος입니다. 이어지는 구절들에서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 만물을 이 로고스 λόγος로 지으셨다고 이야기합니다. 창세기를 수학의 정석 <집합1> 처럼 닳도록 읽은 우리라면, 이 세상이 말씀으로 지어졌다는 이야기는 이미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첨부 이미지

 

히브리 사람인 요한은 세상을 지었다는 ❛말씀❜을  헬라 단어 중에서도 이 세상의 근원적인 원리, 법칙, 구조를 의미하는 로고스 λόγος를 골라 기록했습니다. 1장 1절 말씀에 로고스 λόγος를 대입해 다시 읽어볼까요?

 

태초에 로고스가 계시니라 이 로고스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로고스는 곧 하나님이시니라

 

이 세상을 관통하고 주관하는 원리이자, 법칙이자, 구조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세상을 로고스로 다스린다고 성경의 기자는 이야기합니다. 우리 눈에는 ㅌ-ㅐ-ㅊ-ㅗ-ㅇ-ㅔ-...라는 글자로 남겨진 말씀이 우리에게 영이 되고 생명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원리, 법칙, 구조를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을 관통하고 있는 '하나님'의 로고스를 파악하지 않으면, 철학적인 로고스, 곧 이 땅의 로고스로 성경을 해석하게 됩니다.

 

 

첨부 이미지

조금 더 쉽게, 제 경험으로 예시를 들어 볼까요? 수련회 저녁, 기도 시간에 눈물로 성령을 구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 높이 들고 있는 팔. 그렇게 성령을 구했습니다. 괜히 마음이 뜨거워지는 기분입니다. 앞으로의 삶을 은혜로 가득 채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솟구칩니다. 그뿐이었을까요? '제자'된 모습으로 살아가겠다는 다짐이 마구 몰려옵니다. 

그날 밤 저는 정말 성령님을 받은 것일까요?

 

예수님은 성령님을 어떻게 소개해 주셨을까요?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요한복음 14장 16-17a절

 

예수님은 성령님을 '진리의 영'이라고 소개하셨습니다. 진리의 영, 하나님의 말씀의 영인 것입니다. '영'이라고 하니, 너무 쉽게 착각하게 됩니다. 내가 보고 들었던 것 안에서 '영'의 이미지를 만들어 놓고, 그 영을 상상하며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고, 성령을 구한 것은 아니었는지 되돌아봅니다.

<꼬마 유령 캐스퍼> 포스터
<꼬마 유령 캐스퍼> 포스터

그러나 성경을 쓴 이들에게 '영'은 하나님의 숨결, 곧 우리를 살게 하는 생기였습니다. 그럼에도 '영'의 개념은 여전히 낯설고 어렵습니다. 정확하게는 이 세상이 말하는 '영혼' 같은 것들 때문에 자꾸 헷갈립니다. 이렇게 생각해 볼까요? 시편 기자는 창조의 주체를 '영'이라고 말합니다.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시편 104편 30절

 

창세기와 요한복음의 기자는 각각 '말씀'이 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전했습니다. 자꾸 내가 알고 있는 '영'의 개념이 내 눈을 가릴 때, 시편 104편의 말씀을 떠올려 봅니다. 우리에게 참 생명이 되는 것, 우리를 진정으로 살게 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수월해집니다.

첨부 이미지

제가 어느 해 여름, 기도회에서 느낀 뜨거운 감정을 성령으로 착각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아시겠죠? 제가 가진 '영'의 개념 때문이었습니다. '(성)영을 받다'의 의미를 세상의 구조, 세상의 로고스 λόγος로 성경을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그 로고스 (ὁ λόγος), 하늘의 로고스 λόγος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을 아는 것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디모데전서 2장 3-4절

 

세상의 로고스가 섞이는 것을 우리는 늘 경계해야 합니다. 아주 작은 기울기가 우리를 전혀 다른 곳에 데려다 놓기 마련입니다.

첨부 이미지

 

첨부 이미지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요한복음 5장 40절

 

가장 먼저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기 위해 '앞으로 달려가서' 뽕나무에 올랐듯, 마리아가 예수님 발 아래 엎드렸듯, 그분께 가까이 나아감이 필요합니다.

이미지출처 : 그림성서박물관 손용환신부
이미지출처 : 그림성서박물관 손용환신부

말씀을 단순히 자기 만족을 위해, 또는 사역에 적용하기 위해 도구적으로 연구해서는 안됩니다. 말씀 연구를 사역에 이용하지 말라니, 의아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지가 언제 열매를 맺는지 기억해야 합니다. 가지는 포도나무에 붙어있을 때에야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이 유명한 요한복음의 구절에서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다'로 번역된 단어는 우리가 앞서 살펴 보았던 '말씀 안에 거하다'에 사용된 단어와 같은 단어입니다. 바로 헬라어 메노 μένω입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것과 우리가 말씀 안에 거한다는 것은 같은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알고자 들이는 노력이 구원에 이르기 위한 노력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디모데후서 3장 15절


성경에는 특정한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주는 것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것에 대해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도 참고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요한복음 5장 39절

 

새번역 성경은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합니다.

 

너희가 성경을 연구하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 그 안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나에 대하여 증언하고 있다.

요한복음 5장 39절 (새번역)

 

개역개정을 읽으면 직관적으로는,

"너희가 성경을 연구하면 영생을 얻는 줄 알고 있지? 근데 그거 아니야." 라는 어감을 줍니다.
그러나 사실 내용을 뜯어보면, 

'성경을 연구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어. 그리고 그 성경은 나에 대해 증언하는 거야.'라는 의미입니다. 이때 원문에서는 '성경'이 복수형으로 쓰였습니다. 율법, 선지서, 시편을 모두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또한 이렇게 말합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한복음 17장 3절

 

영생이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것이라고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은 곧 말씀, 로고스 ὁ λόγος이십니다. 예수님 역시 자신에 대해 증언하고 있는 '성경'을 '연구'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쩌면 '왜 그 생각을 못했지?'하고 의아할 정도로 성경은 반복해서 우리에게 말합니다.

 

❝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말씀을 알아라 (딤후 3:15) ❞

❝ 성경을 연구해라 (요 5:39) ❞

❝ 내 말에 거하라 (요 8:31-32) ❞

 

 

첨부 이미지

신앙생활을 넘어서 성경을 연구씩이나 해야 하는 이유는 사실 정말 간단합니다. *말씀을 알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성경이 말하기 때문입니다. 구원이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부터 나온다고, 역시나 성경이 말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주기 위해 쓰였다(딤후 3:15)

 

앞서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성경을 '연구함'에 쓰인 헬라어는 에류나오 ἐρευνάω 입니다. '찾고 조사하는 행위'를 뜻합니다. 단순히 성경을 읽고 내 마음과 느낌의 변화를 관찰해서 기록한다거나, 내 머릿속에 있는 것들을 찾고 조사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안에 담긴 하나님의 의도와 참된 말씀을 찾고 조사하는 것입니다. 그것들을 위해서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첨부 이미지

2025년을 사는 우리가 고려시대 사람과 소통한다면 어떨까요? 아마 그 사이의 간극을 매우기 위한 다양한 대화가 필요할 겁니다. 서로간의 양해도 필요할 것이고요. 성경은 그보다 더 오랜 시간 전에 기록된 것도 모자라, 수많은 저자들의 손을 거쳐 탄생했습니다. 

그 사이 발생한 역사적, 지리적 배경도 다양합니다. 고대근동의 문화부터 히브리 문화권, 나아가 헬라적 배경까지. 현대인의 눈으로만 행해지는 '해석'은 성경의 원래 의도를 왜곡하기 십상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아주 오랜 시간 전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 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첨부 이미지

 

더욱이 성경 연구가 어려운 것은 성경의 배경이 이 세상에서 알게 모르게 감추어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사도들, 성경의 저자들은 모두 유대인이었습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 역시 우리가 '구약'이라고 부르는 성경으로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들이 날짜를 정하고 그가 유숙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더라

사도행전 28장 23절

'이방인의 사도'라는 별명이 있는 바울 조차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 곧 구약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증언하고 예수님을 권했습니다.

 

그러나 AD 70년,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후 '성전'이라는 신앙의 중심을 잃은 유대교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는 이들을 급격하게 분리해내기 시작합니다. 교회 역시 유대교의 배경에서 벗어나 하나의 독자적인 종교로 세워지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유대교와 기독교는 그렇게 서로에게 등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초대교회의 일부 교부들은 유대인을 '예수님을 죽인 민족', '언약의 배신자'로 규정했습니다. 또한 설교에서 노골적으로 반유대적인 언어를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유대교가 기독교에게 일방적으로 당한 것은 아닙니다.) 그 가운데, 교회가 '새로운 영적 이스라엘'로서, 유대교를 대체했다는 '대체신학'이 자리 잡기도 했습니다.

 

교부의 가르침을 그대로 물려받은 중세 시대에는 한 발 더 나아가 랍비 문헌이나 유대 전통 지식을 취급하는 것을 이단으로 간주했습니다. 유대인 집단은 점차 주류 지식 체계에서 차단되었습니다.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이 성경 원어인 히브리어 복원에 힘을 쏟기도 했지만, 랍비 문헌은 여전히 유대의 잔재로 여겨져 깊이 연구될 기회를 얻지는 못했습니다. 이를 기점으로 발전을 이룬 서구 신학은 자연히 헬라 철학, 로마 법, 교부 전통 위주로 성경을 해석했습니다. 랍비 문헌과 유대 전통은 그렇게 오랫동안 신학계에서 소외되고 말았습니다.

홀로코스트를 배경으로 한 스티븐 스틸버그의 영화 《쉰들러 리스트》 
홀로코스트를 배경으로 한 스티븐 스틸버그의 영화 《쉰들러 리스트》 

20세기 유럽 문명과 기독교, 서구하쇠의 반유대주의는 극단으로 치달았습니다. 그 결과를 우리는 홀로코스트로 확인했습니다. 중세 교회와 국가 권력의 결합으로 반유대주의가 구조화 되었고, 19세기 유럽에 민족주의와 사회진화론이 결합되면서 유대인을 열등민족으로 취급한 것이 화근이 되었습니다.

 

첨부 이미지

성경은 유대 배경에서 났습니다.

성경을 기록한 이들, 성경을 죽음으로 수호한 기독교의 초창기 사람들을 히브리적 구조와 떼어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더군다나 '구약'과 '신약'이 사실은 '한 권'의 책이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에게 히브리적 배경 지식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이런 글을 쓰고 있는 저 역시 여전히 알아야 할 것이 너무, 너무 많습니다. 그렇지만 이 노력이 우리가 성경을 왜곡 없이 보게 하는 출발점이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읽고팟다는 나의 배경과 나의 생각, 나의 상황으로 성경을 보아서는 안 된다는 깨달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깨달음이 업무와 일상에 치여 미루어 두었던 공부를 해내겠다는 다짐으로 이어졌습니다. 평소 읽고 싶었던,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책을 집어 들어 읽고, 그 내용을 깊이 파헤쳐 봅니다. 그렇게 얻은 지식과 새로운 관점으로 성경을 연구하고, 밭을 경작해 나갑니다.

단순히 글을 죽죽 읽어나가는 것이 아니다 보니, 한 콘텐츠를 위해 요구되는 시간과 노력이 상당합니다. 그럼에도 그것이 우리를 성경 앞에 더 올곧게 세워줄 수 있다면, 충분히 가치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은 오로지 말씀이라는 것을.

그 말씀이 담긴 성경을 바로 연구하기 위해

오늘도 읽고, 파봅니다.

 

기독교 독립출판사 TSFAT의 유튜브 콘텐츠
<읽고팟다> 시리즈와 함께 활용하실 수 있도록 기획된 뉴스레터입니다.

 

📹 유튜브 채널 

일상에서 공부해 나가는 내용과 대략적인 흐름을 소개합니다.

📰 뉴스레터 (무료-블로그 공개)

책을 공부하며 정리했던 내용을 공유합니다. 쯔팟의 블로그를 통해 공개됩니다.

🧑‍🌾 뉴스레터 (유료-메일로 공유)

- 기본 뉴스레터의 내용을 한 주 선공개합니다.

- 공부한 내용을 성경과 연관지어 쯔팟만의 추가적인 내용을 공유합니다.

 

다가올 뉴스레터가 궁금하신가요?

지금 구독해서 새로운 레터를 받아보세요

이번 뉴스레터 어떠셨나요?

하츠피라 HaTzefira 님에게 ☕️ 커피와 ✉️ 쪽지를 보내보세요!

© 2025 하츠피라 HaTzefira

읽고 파, 나팔 소리를 알아차립니다.

메일리 로고

도움말 자주 묻는 질문 오류 및 기능 관련 제보

서비스 이용 문의admin@team.maily.so

메일리 사업자 정보

메일리 (대표자: 이한결) | 사업자번호: 717-47-00705 | 서울특별시 성동구 왕십리로10길 6, 11층 1109호

이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 정기결제 이용약관 | 라이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