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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5호 베프레터

5.18 광주민중항쟁, 국가폭력, 광주꼬뮌, 전두환, 김대중, 서울역 회군

2026.05.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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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 코멘트] 광주민중항쟁 돌아보기, 아래로부터의 관점으로(2)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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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오늘은 5월 18일, 광주민중항쟁이 시작된지 46주년 되는 날입니다. 지난 주 연재에 이어, 광주민중항쟁이 어떻게 시작되고 끝나게 되었는지 돌아봅니다. 우리가 광주의 경험에서 특히 어떤 것을 기억해야 하는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평가해보려 합니다.

 

1980년 5월 전두환이 비상계엄을 확대하고 전국적 휴교령을 내리고 공격을 시작했을 때, 가장 격렬하게 저항했던 곳이 바로 광주였습니다. 광주의 저항이 더 격렬했던 것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 광주는 박정희 시대 경제발전에서 가장 소외된 지역의 중심지였습니다. 서울과 부산을 잇는 경부고속도로가 상징적으로 보여주듯, 박정희는 경부축을 중심으로 경제를 발전시켰고  호남 지역은 방치하다시피 했습니다. 둘째, 호남과 광주는 김대중의 생물학적, 정치적 고향이었습니다. 지역의 상징적 인물, 그것도 민주화 운동을 대변하는 것으로 여겨진 김대중이었기에, 그에 대한 정부의 구금은 곧 광주 시민을 향한 공격으로 여겨졌습니다.

 

5월 18일부터 집단 발포 전까지

광주에서는 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기 전, 이미 계엄 확대 시 행동지침(전남대 앞 10시 집결 집회)이 예정되어 있던 상태였습니다. 오전 대학 휴교령이 떨어졌지만, 학생들은 예정대로 전남대 정문 앞에 모였습니다. 공수부대원들은 이들을 곤봉으로 잔인하게 진압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시위대는 전남도청으로 이동했고, 진압 소식이 전해진 오후부터는 시위 규모가 훨씬 커졌습니다.  그러나 공수부대는 이제 지나가던 시민들까지 두들겨 패기 시작했습니다. 공식 집계만 보더라도 이 때 대학생 114명, 고교생 6명, 일반 시민 184명 등 총 405명이 연행되었습니다. 이들 중 68명이 다쳤고 12명은 중태였습니다. 아마 실제로는 더 많은 사람들이 연행되고 다쳤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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