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독자님, 초현실주의 하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살바도르 달리의 녹아내리는 시계나 르네 마그리트를 떠올리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저도 그랬으니까요. 초현실주의는 배웠던 기억은 나지만 그 이상의 감흥은 없는, 하나의 미술 사조일 뿐이었습니다. 최근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막스 에른스트에게 새롭게 반하기 전 까지는요.
베니스에 간다면,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


베니스에 가면 꼭 들리는 곳이 있습니다. 페기 구겐하임의 컬렉션을 전시하는 미술관이죠. 구겐하임 가의 상속녀 페기 구겐하임은, ‘하루 한 점씩 그림 사기’ 를 모토로 파리-런던-뉴욕을 오가며 왕성하게 작품을 사들인 컬렉터계의 레전드입니다. 그녀는 베니스의 한 저택을 매입하여 작품을 전시하고 예술가들을 후원하며 죽을 때 까지 그 곳에서 살았다고 해요. 그 저택이 바로 지금의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입니다. 그녀가 살았던 곳인 만큼,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에 오면 마치 컬렉터의 집에 초대된 듯 예술과 공간, 베니스의 풍경이 하나로 겹쳐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페기에게 좀 더 특별했던 예술가, 막스 에른스트
작년 베니스 비엔날레 이후, 일 년 만에 다시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을 찾았습니다. 같은 위치에서 변함 없이 반갑게 맞이해준 작품들도 많았지만, 새롭게 눈에 들어온 작품들이 있었습니다. 강렬하게 끌린 몇 점이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모두 막스 에른스트의 작품이었어요. 분명 작년에도 스쳐갔을 텐데, 그 때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가 이번에 이렇게까지 매력적으로 보이는 이유가 무엇일지 궁금해졌습니다.
막스 에른스트는 독일 태생으로 프랑스에서 활동한 초현실주의 작가이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페기의 도움으로 미국에 망명해 그녀와 결혼 생활을 함께한 특별한 인연입니다. 두 사람의 결혼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지만, 페기는 그의 예술세계를 진심으로 후원하며 깊이 교류했다고 해요. 그래서일까요? 페기 구겐하임 컬렉션에서 에른스트는 특히 비중 있게 소개되는 작가 중 하나이며, 그의 대표작들은 지금도 갤러리 중심부에서 대중들에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독특한 시각적 자극이 주는 묘한 해방감

<신부의 차림새> 를 보면, 주황색 깃털로 뒤덮힌 몸체가 강렬한 존재감을 뿜어냅니다. 새의 두상이 달린 깃털 망토를 두른 채, 매끈한 몸선을 반쯤드러낸 가운데 여성이 바로 오늘의 주인공, 신부입니다. 그녀의 주변을 기괴한 생물체들이 에워싸고 있는데, 보랏빛 시녀는 신부를 말리려 하고 반인반조는 신부를 부추기는 듯 합니다. 작은 초록색 자웅동체 괴물은 구석에서 슬퍼하고 있어요. 하지만 신부는 준비되었다는 눈빛으로 파티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려는 느낌을 줍니다. 각 요소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제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주황색 깃털과 새, 신부의 몸짓이 발산하는 비비드한 에너지에 그저 매료될 뿐이었죠.
중앙 홀의 메인 작품은 주기적으로 교체되는데, 작년에는 피카소가, 올해는 〈가짜 교황〉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었습니다. 붉은 옷 사이로 노출된 여성적인 배는 묘한 관능미를 풍기고, 배경의 청동빛은 신비롭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더했습니다. 말인지 익룡인지 알 수 없는 두상을 한 존재와 생명력은 없지만 기묘하게 아름다운 마녀의 모습까지… 모두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 색감과 조합이었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시각적 자극이라 그런 걸까요? 에른스트의 작품 앞에서 묘하게 도파민이 터지는 듯한 해방감까지 느껴졌어요.
'요즘'스러운 초현실적 미감
처음 초현실주의 작품을 접했을 때는 그저 음울하고 기괴하게만 보였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미디어나 생성형 AI를 통해 만들어진 비현실적인 장면을 흔히 접하다 보니, 초현실적 자극에 점점 익숙해지고 심지어 힙해보이기까지 합니다. 어디선가 본 듯한 매력이 초현실주의 예술의 인상을 단순한 기괴함에서 트렌디한 몽환감으로 전환시켜주었죠.


요즘 정말 멋진 아티스트죠. 이찬혁님의 EROS 앨범 수록곡 〈비비드라라러브〉 뮤직비디오 장면을 가져왔습니다. 어딘가 익숙하지 않으신가요? 깃털 모티프부터 독특한 객체들과 몽환적인 색감이 어우러져 자아내는 오묘하고 신비로운 분위기까지, 막스 에른스트의 시각적 표현과 묘하게 연결되는 느낌입니다.
지난 1년 사이에 초현실주의가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된 맥락을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이찬혁님의 뮤직비디오뿐 아니라, 최근에는 생성형 AI가 만든 이미지와 영상처럼 상상의 감각을 실제처럼 구현한 미디어가 부쩍 늘었지요. 그래서인지 초현실적인 미감이 이제는 낯설기보다 친숙하고, 동시에 트렌디한 매력으로 강하게 다가옵니다.
때로는 정신적 탈출구가 되어줄 초현실주의
문화적 맥락 외에도, 초현실주의에 매력적으로 이끌리는 심리적 배경도 있어요. 우리는 어른이 되고 나이가 들어갈수록, 합리보다 불합리가 더 많은 현실을 맞닥뜨리고 좌절할 때가 늘어갑니다. 온갖 불확실성과 불안이 도사리는 선택지 속에서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도 많아지죠. 그렇게 답답한 한계와 불안감 속에 살다가, 욕망과 상상을 그 어떤 제약도 없이 비비드하게 그려낸 초현실주의 그림을 마주하면 묘한 해방감이 찾아옵니다. 예상치 못한 시각적 조합과 생생한 색채감은 도파민을 강렬하게 자극하고, 순간적으로 정신적 탈출구를 만난 듯한 기분도 줍니다.
구독자님도, 현실이 답답할 때 초현실주의 작품을 보며 묘한 해방감을 즐겨보시는 건 어떨까요?
👋 신입 에디터 소개
visitor.see로 처음 인사드리는 에디터 다나에요.
꽤나 진지한 아트 덕후로, 일상과 여행 속 예술에서 받는 감동을 다정한 글로 나누고 싶습니다.

참고 링크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의 <초현실주의와 한국근대미술전>도 정말 대단했어요! 이미 전시는 종료 되었지만, 감각적인 한국의 초현실주의 작품들을 브로슈어로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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