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불 작가가 그리는 근대의 유토피아, 재조립된 풍경은 일견 외관은 크고, 아름답고, 빛나고, 반짝이고, 아이코닉합니다. 당장 전시장 입구부터 17m 길이의 은빛 비행선이 부유하고 있습니다. 구독자 님을 포함해 우리는 살면서 비행선이라는 것을 거의 본 적조차 없는 세대겠지요. 20세기 초 독일 기술 발전의 상징이자 나치의 야망을 담고 있던 이 수소 비행선에는 초고속으로 공중을 여행하는 유토피아적 기대가 담겨있었습니다. 그러나 백여년 전 원인 불명의 화재로 폭발해 많은 사상자를 낸 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죠. "Oh, the humanity!"
이불 작가는 사람들이 유토피아를 어떻게 설계하고 상상했는지, 어떤 식으로 실천하려고 노력했는지, 그리고 마침내 어떻게 실패했는지에 대한 리서치를 진행해왔습니다. 전시된 작품은 곧 작가가 약 20년간 유토피아의 사례를 추적하며 그 나름대로 유토피아와 그 비전을 그릴 수 있는가 질문한 결과물이기도 합니다. 근대의 모더니즘은 이성 중심주의, 과학 기술에 대한 믿음, 국가를 중심으로 한 전체주의 등 거대 서사가 주요한 담론이었습니다. 현대 포스트모더니즘의 관점에서 이불은 유토피아와 같은 거대 서사의 종말을 개인의 관점으로 들여다보고, 해체하고, 재조립합니다.
태양의 도시

비행선을 지나 블랙박스에 들어서면 수많은 거울 조각들이 우리를 무수히 반사합니다. 빛나는 거울과 전구의 빛은 첫눈에 무척 아름답지만, 불규칙하게 깨진 조각들 사이를 조심스럽게 거닐다보면 들여다볼 수록 미묘하게 불안해지죠. 마치 하나의 도시를 옮겨놓은 듯한 거대한 스케일에 압도되기도 하고요. 어디까지가 작품인지, 어디까지가 나인지 희미해지는 경계 속에서 경외심이 들기도 합니다. 이 작품은 이불이 해체한 거대 서사, 작가 개인의 '나의 거대 서사 Mon grand récit'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태양의 도시'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철학자이자 공상적 공산주의자인 톰마소 캄파넬라의 책에서 제목과 개념을 차용하였습니다. 톰마소 캄파넬라가 그린 태양의 도시는 공산주의에 근거한 유토피아가 작동하는 세계입니다. 이 작품을 감상하고 있는 현대의 우리는 이미 공산주의의 실패를 경험하고 기억하는 세대이지요.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게 공존하는 세계를 만들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그 찬란한 이상, 대범함, 아름다움과 실패, 억압... 실현 불가능한 영광의 흔적은 왕국의 폐허처럼 스산하고 아름답습니다.
나의 거대 서사


태양의 도시 이전, 이불의 '나의 거대 서사 Mon grand récit' 연작은 최초에 첫번째 사진과 같은 모형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눈으로 뒤덮인 폐허와 끊어진 곡선의 고속도로, 낭떠러지 끝에 위태롭게 조각된 (작은) 제3인터내셔널을 위한 기념비, 수정으로 된 산을 지탱하는 가느다란 철골, 전광판에 적혀있는 문구들... "왜냐하면 모든 것은 Because Everything / 그저 정말로 어쩌면 only really perhaps / 그럼에도 한없이 무한한 yet so limitless." 한번도 현실에 구축된 적 없는 공산주의의 기념비와 기약없는 문구, 신기루 같은 인간 중심적 풍경과 자연의 원시적 풍경이 병치된 모습입니다.
이 작은 모형을 지나, 그라운드 갤러리에 들어서면 <나의 거대 서사: 바위에 흐느끼다... Mon grand récit: weep into stones…>에서 기시감을 느끼게 되죠. 미래적이고 수직적인 백색 구조물, 과거 건축의 잔재들, 뒤집어진 하기아 소피아, 여전히 아무 곳으로도 이어지지 않는 곡선의 고속도로를 떠받치고 있는 비계, 철골 그리드 구조물에서 우리는 다양한 지리적·문화적 참조와 서로 다른 유토피아적 비전이 충돌하는 알레고리적 지형도를 만날 수 있습니다. "바위에 흐느끼다 weep into stones / fables like snow 눈과 같은 우화들 / our few evil days 얼마 되지 않는 우리의 불운한 나날들"이 깜박히는 전광판.
이불은 한때 이상을 꿈꾸었으나 이미 오래된 미래가 되어버렸거나, 사실상 처음부터 실현 불가능했던 근대 건축물을 효과적으로 가져오고 분절하고 조합합니다. 반짝이는 파괴된 유토피아의 폐허, 그 아래에는 이상을 위해 보이지 않게 희생된 많은 것들을 함의하고 있기도 합니다. 작가와 작품의 거리가 가까워질 수록 - 한국 근현대사 또는 자신의 과거에서 길어낸 기억과 맞닿아있는 작품일 수록 이런 특징이 더욱 두드러지죠. 하지만 이번에는 멀리있는 것들, 그 반짝임에 대해서만 얘기하고 싶어요. 가까운 건 너무 가깝거든요. 그라운드를 천천히 거닐면서 오디오가이드의 설명을 듣기만 해도, 우리가 바로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유리 건축

유토피아의 반짝이는 조각만을 모아 긍정적인 이야기를 만든다면 <애프터 브루노 타우트> 연작이 되지 않을까요. 서양의 과거와 미래의 건축적 이상을 예술적으로 시각화한 이 작업은, 물질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브루너 타우트의 건축적 제안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의 '알파인 건축 Alpine Architecture'은 유리와 강철로 이루어진 세속적인 사원입니다. 폴 셰르바르트 Paul Scheerbart 의 유리 건축 개념에서처럼 '벽돌 건축이 유리 건축으로 대체된다면 지구 표면은 찬란한 보석과 에나멜로 뒤덮인 것 같을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지구에 낙원을 만들 수 있다면, 우리는 다른 행성의 유토피아를 그릴 필요가 없을 테니까요.
<스턴바우 No.1>를 포함해 크리스털, 유리, 아크릴비즈, 체인으로 화려하고 정교하게 장식된 이 금속 구조물을 보세요. 공중에 낮게 부유하는 이 반짝이는 구조물은 존재하지 않는 별천지를 닮아 더욱 매혹적이며, 표류하는 듯 불안한 형태로 비현실적인 이상향을 표상합니다. 어둡게 반사되는 바닥 위, 중력에 의해 늘어진 체인과 비정형적으로 늘어진 비즈줄은 일견 우주 등 허공을 유영하는 난파선이나 위성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미 현대에 만들어진 여러 콘텐츠, 가령 애니메이션 등에 등장하는 '하늘을 나는 성'과 같은 유토피아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어요.


이불의 작품은 대체로 양가적입니다. 일례로 작가는 완전성을 향한 인간의 열망이 실현되면 '사이보그'가, 실패하면 '괴물'이 된다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이상향의 이면에는 전체주의나 억압과 감시가 숨어있듯이, 결국 기술에 종속된 아나그램과 사이보그는 그 어느쪽도 완전한 답일 수 없는, 실현 불가능한 이상적 형태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성에 대한 열망, 유토피아에 대한 도전은 여전히 강렬하게 우리 삶에 남아 있습니다. 작가는 그 안에 내재된 위험성, 이면에 있는 위험을 끊임없이 주지시킵니다.
우리가 어릴 때 상상하던 근미래는 첨탑과 고층빌딩, 고속도로와 하늘을 나는 자동차 등 긍정적이고 낙천적이었습니다. 하지만 21세기가 도래한 지금, 우리는 기술을 맹신한 나머지 전에 없던 기후 위기와 다시 찾아온 전쟁과 혐오의 문제를 대면하고 있죠. 한번도 경험한 적 없는 시대, 온 적 없는 미래의 이상향에 대한 그리움, 근대 건축물 및 폐허가 주는 독특한 아름다움을 주는 이불의 작품 사이를 거닐어 봅니다. 실패한 유토피아의 폐허와 잔재들, 공산주의 혹은 기술중심주의 따위의 부작용을 기억하라는 경고과 함께.

참고
<이불> 리움, 작가를 만나다 #50 리움미술관 유튜브 채널 2022. 6. 24
<Mon grand récit: Because everything...> Govett-Brewster Collection
<Lee Bul's Utopian Encounters with the Russian Avant-garde> Thaddaeus Ropac 2020.11.4
<Lee Bul : On My Shelf> Thaddaeus Ropac 2020. 10. 28
<갤러리데이 : 이불 작가에 대한 특강 at PKM 갤러리> 아트 플랜트 아시아 유튜브 채널 2020. 12. 17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