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독자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해에도 진솔한 관람기를 이어가고픈 다짐을 담아, 2026년 첫 글은 좀 더 특별한 전시 후기를 가져왔습니다. 빛의 화가로도 불리는 영국의 풍경화 거장 터너의 국내 최초 전시가 열리는 경주 우양미술관의 <Turner: In Light and Shade>에 다녀왔어요.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J.M.W. Turner, 1775-1851)는 영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로, 20파운드 지폐 속 인물이기도 합니다. 풍경화는 배경 장식일 뿐이라고 여겨지던 18세기에 터너는 빛과 색, 대기의 실험적인 표현을 통해 풍경화를 주류 예술로 끌어올립니다. 영국 최고 권위 미술상인 터너상(Turner Prize)도 터너처럼 혁신적인 시도를 하는 예술가를 발굴하고 후원하는 의미에서 그의 이름을 따왔습니다. 소개가 이토록 장황할 만큼 위대한 예술가, J.M.W 터너의 탄생 250주년을 맞아 선보이는 국내 최초 개인전이라는 점에서 이번 전시는 더욱 특별합니다.
우양미술관은 영국 맨체스터 대학교 휘트워스 미술관과 협력하여 휘트워스 미술관이 소장한 터너의 판화 연작 71점과 수채화 11점, 유화 1점을 선보입니다. 사실 전시를 보러 가기 전에 수채화는 몇 점 없고 판화가 대부분이라 아쉬웠다는 블로그 후기를 보고 내심 기대를 낮추고 갔어요. 그런데 터너의 작품 세계를 경험한 뒤, 판화는 여러번 찍어낼 수 있기에 원화보다 가치가 덜하다는 몹쓸 고정관념을 완전히 깨뜨리게 되었습니다.
1800년대 작품을 보고 2026년에 신선한 충격을 받은 이야기, 지금부터 들려드려요!
전시를 들어가며

평소에 작가 연대기를 꼼꼼히 살피는 편이 아닌데, 전시장 초입에 있는 터너의 연대기는 정말 흥미로웠어요. 깨알같은 도전의 발자취를 보니 터너가 삶의 매 순간을 허투로 쓰지 않고, 본인 예술에 대한 애정과 후배 양성을 위한 열정이 진지했던 인물임을 느꼈습니다.
1800년 당시에는 많은 작가들의 작품이 왕립미술원 전시회로만 공개되었는데, 터너는 수많은 작품들이 빼곡하게 뒤섞여 걸린 전시장이 본인의 작품을 감상하기에 최상의 조건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자택 옆 건물을 개조해 직접 개인 갤러리를 열고, 이 ’터너 갤러리‘ 를 중심으로 자신의 작품을 전시했습니다. 또한 풍경화 기법의 실험과 교육에 진심이어서, 본인을 P.P (Professor of Perspective, 원근법 교수) 로 소개하고 풍경화 교본 시리즈, <리베르 스투디오룸 (Liber Studiorum, 라틴어로 ‘연구의 책’)> 을 제작했습니다.
특히 흥미로웠던 점은, 터너가 54세 부터 본인의 유언장을 직접 작성하고 주기적으로 업데이트 했다는 사실입니다. 터너의 유언장에는 그가 풍경화를 주요 예술 흐름으로 만들고 이어가는데 얼마나 진심이었고, 죽고난 후에도 대중에게 작품이 소개되는 방식까지 챙길 정도로 작업에 대한 애정이 컸는지가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1. 왕립예술학교에 풍경화 교수직 신설
2. 풍경화 분야를 위한 터너 메달 제정
3. 본인 소유지에 영국 출신 풍경 화가와 독신 남성을 위한 갤러리 및 구호시설 건립
4. 내셔널 갤러리에 터너 갤러리 설립 및 주기별 교체 작품에 대한 지시터너가 작성한 유언장 내용 중
메조틴트: 어둠에서 밝음으로 빛을 조각하다
이번 전시는 풍경화의 교과서를 만들겠다는 목적으로 기획된 프로젝트, <리베르 스투디오룸> 연작이 주를 이룹니다. 이 연작은 에칭으로 밑그림을 그리고 메조틴트로 명암을 표현한 판화 시리즈입니다.
터너는 메조틴트 판화로 제작된 네덜란드 거장 빌럼 판 더 펠데 2세의 해양화 복제본을 보고, 색채를 쓰지 않고도 빛과 어둠, 공기의 질감과 대기의 변화를 풍부하게 표현할 수 있는 메조틴트 기법에 매료되었습니다. 메조틴트는 동판에 무수히 많은 작은 점을 찍어 잉크를 머금게 하고, 매끄럽게 깎고 다듬을 수록 잉크를 덜 머금는 표면적 특성을 활용하는 판화 기법입니다. 어둠을 갈고 닦아 빛을 찾아가는 독특한 방식이죠. 표면 질감의 정도로 농담을 표현하다 보니, 날카로운 선으로 면을 구성하는 드라이포인트나 에칭보다 톤과 명암의 풍부한 표현이 가능한 것이 특징입니다.

터너는 자신의 풍경 스케치에 메조틴트 판화 기술을 더해 빛의 농담과 대기의 질감, 그림자의 깊이까지 표현해내는 실험을 합니다. 기술이 요구되는 영역이라 전문 판화가들과 함께 작업을 진행했어요. 터너가 직접 에칭으로 밑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시험쇄를 꼼꼼히 확인하며 상세한 수정 방향을 지시하는 등 <리베르 스투디오름>은 판화가들과 긴밀한 협업을 통해 이루어진 결과물입니다.
<그리니치에서 본 런던>을 보면, 구름 사이로 부서지는 빛내림 표현이 감탄스러워요. 흐리던 하늘 아래로 오후의 햇살이 비집고 들어오는 모습이 실제 런던의 어느 날처럼 생생합니다. 수채화나 유화에서는 배경에 덧대어 희미하게 표현되던 빛내림이, 터너의 메조틴트 판화에서는 공기 입자에 반사되어 밝게 내리쬐는 빛의 질감까지 표현됩니다.

<순풍을 맞는 배> 에서는 짙은 먹구름이 걷히며 내리쬐는 힘찬 햇살과 그 빛을 반사하는 돛으로 시선이 집중됩니다. 바라보기만 해도 저 바다 위에서 따사로운 햇살을 맞는 기분이 들어요. 풍경화가 단순히 장면을 담는 용도를 넘어, 희망찬 감성까지 표현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터너만의 특징이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부드러운 명암을 만드는 메조틴트에 선명한 선을 더하는 에칭 기법을 더하면 건물과 창이 만드는 원근감과 세밀한 표현이 가능합니다. 건물의 원근감과 창을 통해 내리쬐는 햇살, 그리고 그림자의 표현도 가능하죠. <켄트의 펨버리 방앗간> 을 보면, 어느 시골 마을 건물 벽을 넘어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는 방앗간 내부로 시선이 옮겨갑니다. 원근감과 빛의 표현이 너무나 세밀해서 마치 저도 그림 속에 들어가 그 햇살을 바라보는 기분이 듭니다.
터너의 메조틴트는 어둠에 대한 표현도 압권입니다. 리베르 시리즈 중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스코틀랜드 벤 아서> 를 보면 산악지대 골짜기 아래로 내려앉은 먹구름의 그림자가 한없이 깊고 풍부합니다. 그냥 어둠이 아닌, 빛처럼 번지는 어둠이에요. 풍경을 바라보다 보면 저 멀리 비가 집중해서 쏟아지는 구역이 보이기도 하는데요, 터너는 이렇게 변화무쌍한 대기, 그리고 날씨의 모습을 역동적으로 담아냅니다.
덧칠하는 그림이 아닌, 깎아내는 그림
전시장에는 터너의 후기 수채화 작품이 판화 작품과 나란히 배치되어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기법이 단순히 수채 채색이 아니고 ‘수채 채색에 스크래치’ 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메조틴트에서 빛을 표현하는 방법은 표면을 깎아내는 것인데요, 어둠을 갈고 깎을 수록 더 빛나는 밝기 표현이 가능합니다. 터너는 <리베르 스투디오룸> 에서의 이러한 빛 표현 실험을 수채 작업에도 적용했어요.

클로즈업한 그림을 보시면, 호수를 밝게 비추는 달 그림자와 물보라 처럼 눈부시게 반사되는 새하얀 빛이 채색한 종이를 긁어내어 표현되었습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마침내 왜 터너가 그토록 혁신적인 미술가로 칭송받는지를 깨달았습니다. 터너에게 판화는 본인의 작품을 여러 장 출판하기 위함이 아닌, 판화만이 가능한 표현으로 한 차원 새로운 풍경화를 창작하기 위함이었어요. 그는 수채화에서 한계가 있던 빛의 표현을 한 단계 넘어서기 위해, 메조틴트 기법에서 스크래치를 내어 빛을 끌어내던 경험을 적용합니다. 터너에게 수채화, 유화, 판화의 구분은 중요하지 않았어요. 그가 자연에서 받은 인상을 최고로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기법을 자유롭게 적용했죠. 진정한 창작이란 이런 거구나를 느끼는 순간이었습니다.
터너상 (Turner Prize) 은 데미안 허스트, 안토니 곰리, 아뉘시 카푸어 등 동시대의 혁신적이고 독보적인 예술가들에게 주어집니다. 풍경화가 터너가 이렇게 현대적인 작가들과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지 의아했는데, 이제서야 터너가 후대에 남기고자 한 끊임없이 실험하고 개척하는 예술 정신이 깊게 이해가 됩니다.
터너는 메조틴트만의 빛과 어둠, 그리고 공기의 질감 표현을 매우 사랑했다고 해요. 전시를 보고온 이후에도 그 세밀하면서도 은은하게 번지는 터너의 <리베르 스투디오름> 속 풍부하고 깊은 감각이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저처럼 평소에 판화와 원화를 구분하며 작품을 접하셨거나 풍경화는 지루하다고 생각하셨던 분이 계시다면, 이번 우양미술관의 터너 전시를 통해 새로운 관점과 감각을 깨우는 경험을 해보시길 꼭 추천드립니다. 기법의 경계를 따지지 않고, 풍경화가 가야 할 길을 끊임 없이 탐구한 J.M.W 터너의 실험 정신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좋은 전시입니다.
전시 정보
<Turner: In Light and Shade>
우양미술관, 2025.12.17 – 2026.05.25
전시 관람 꿀팁
- 전시장 입구의 터너 연대기는 꼭 한 번 읽어보세요! 갓생 산 열정 예술가 터너의 매력에 빠져들 거에요.
- 세밀한 판화의 매력을 탐색해 보고 싶으시면, 전시장에 마련된 돋보기나 휴대폰 카메라 줌을 활용해 보세요!
- 이청아 배우의 오디오 가이드도 추천해요. 감미로운 이청아 배우님의 음성 해설을 들으며 작품에 몰입하는 시간을 가져보세요.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