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독자님. 안녕하세요! 날씨가 갑자기 확 추워졌네요. 옷 단단히 여미시고, 식사도 든든히 하셔서 다가올 겨울을 건강하게 맞이해봅시다.
오늘은 지난 번 반도체 이야기와 다소 연관된 주제를 들고 와봤는데요. 지난 레터에서 메모리 반도체의 저장 원리를 '0과 1의 마법'이라는 용어로 아주 간단하게 설명을 드렸어요.
글을 쓰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러면, 사람은 도대체 어떤 원리로 기억을 하는 걸까? 그러고 보면, '기억'에 대한 흥미로운 주제들은 정말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평소 제가 기억에 관해 가지고 있던 호기심을 풀어가는 시간으로 준비했어요.
기억 형성의 원리
우리는 어떤 원리로 기억을 할까요?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뉴런'과 '시냅스'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데요. (갑자기 분위기 수능특집)
뉴런은 우리 두뇌 신경세포의 최소 단위로, 정보를 처리하고 전달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 정보 전달 과정에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시냅스'에요. 신경세포를 이어주어 신호를 주고 받는 역할을 하는 것이죠.
그리고 기억의 형성은 뉴런 간의 연결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해요.
조금 더 쉽게 말하자면, 감각 정보를 처리하고 전달하는 것은 뉴런의 역할이고, 뉴런 간 신호를 전달하고 연결을 조정하는 것이 시냅스입니다. 이 둘이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신경망을 이루고, 이러한 연결과 활성화 패턴이 기억을 형성합니다.
그래서 특정 기억을 떠올리면, 한 감각 정보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아요. 최근에 가장 맛있었던 음식을 떠올려보세요. 그 맛만 떠오르나요? 그 날의 분위기, 누구와 함께 있었는지, 식당이 시끄러웠는지 조용했는지 등 여러 개의 감각 정보가 함께 떠오릅니다.
이런 기억 형성의 원리를 실생활에 적용해볼 수 있어요. 예를 들어, 주방에서 무엇을 하려고 했는데 그게 기억이 안 나는 경험이 있다고 해봅시다. (이런 경험 많으시죠?) 그러면 그것을 떠올리기 위해 소파로 가서 앉아서 그 기억을 떠올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한 번 그 비슷한 상황을 만들어주는거에요. 그러니까 다시 그때처럼 주방에 가보는 것이죠.
주방에서 보는 나의 시야, 비슷한 소리 등 감각하는 환경을 비슷하게 만들어줌으로써 그 당시와 비슷하게 신경망을 구성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거에요. 우리가 흔히 몸이 기억한다고 하잖아요? 이 말은 실제로도 설득력이 있는 것이고, 우리는 이를 활용할 필요가 있는 것이죠.
근데요. 우리가 일어나는 모든 사건에 대해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기억은 크게 또 3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감각기억(Sensory memory)이에요. 감각 정보의 순간적이고 짧은 기록으로서 우리가 주의 깊게 노래를 듣지 않아도, 3~4초 전에 들었던 음을 흥얼거릴 수 있는 기억이 바로 이 감각기억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단기기억(Short-term memory)입니다. 앞서 설명한 감각 기억에 보다 주의를 기울여 정보를 저장하는 것으로 짧으면 수 초 정도에서 길게는 약 3분 정도로 지속 가능해요. 누군가 전화번호를 불러줄 때 외우는 정도로 보면 됩니다.
그런데, 감각기억과 단기기억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지속시간 등 차이를 보이지만 이런 건 사실 결과론적으로 차이가 나는 거잖아요?
구체적으로 궁금한 건 이런거에요. 어떻게 하면 감각기억을 단기기억으로 만들 수 있을까요? 여러 자료를 찾아봤지만 속 시원한 답을 못 찾겠더라고요. 약간은 두루뭉술한 ‘주의를 집중하면 단기기억으로 만들 수 있다.‘정도로 많이 설명하더라고요.
여기서
주의를 집중한다는건 의식적으로 들어오는 감각기관에 집중한다는 뜻일테고, 이를 통해 뇌는 여러 감각의
정보를 가공(Encoding)하여 저장한다고 합니다. 어쩌면 이 '주의 집중'이라는 행위가 Encoding의 행위가 아닐지 생각해봅니다.
세 번째는 장기기억(Long-term memory)입니다. 장기기억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기억’의 정의에 가장 가까운 기억의 유형으로 오랜 시간 동안 뇌가 기억하는 정보를 이야기해요. 앞서 말한 감각기관과 단기기억의 차이에 비해 장기기억은 다른 기억과 확실한 차이가 있는데요.
바로 ‘해마(Hippocampus)’라는 녀석이 등장합니다. 동물 해마와 닮아서 이런 이름이 붙게 되었는데, 해마는 단기기억을 장기기억으로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이게 발견된 사례도 아주 재밌는데요. 1953년에 몰레이슨이라는 발작환자의 치료를 위해 해마를 적출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몰레이슨이 새로운 기억을 학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냈어요. 그리고 학자들이 이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고, 해마가 장기기억의 형성에 역할을 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앞서 말한 간단한 개념을 토대로 우리가 겪는 ‘기억’에 관한 이야기들을 풀어볼 수 있어요.
먼저, 우리가 유아시절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4살 이전의 기억들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거에요. 그런데 또 신기한 것은 저의 8살 조카는 3~4살 때의 일을 기억하더라고요? 진짜 천재인가 싶었어요.
그렇다면, 유아시절의 기억은 4살이 될 때 “자, 이제 기억삭제!”라고 하며 잊어버리는 것이 아닌데, 우리는 왜 유아시절을 기억하지 못할까요?
유아시절의 기억이 없어지는 것을 ‘유아기억상실’이라고 말하는데요. 명확히 밝혀진 팩트는 아니지만, 여러 가설이 있어요. 그 중에서도 가장 유력한 것이 앞서 설명드린 ‘해마’의 성숙과 관련 있습니다.
기억의 중요 역할을 하는 해마는 4세 이후에 본격적으로 발달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마가 성숙하고 발달하면서 뉴런들이 급격하게 증가하는데, 이때 기존 뉴런들의 연결회로를 끊고 이전 기억들을 파괴하면서 기억이 없어진다는 가설이에요.
이 가설은 실험으로도 성과를 보였는데요. 뉴런의 증식을 억제한 실험쥐는 이전의 기억들을 더 오래 유지하였고, 뉴런의 증식을 촉진시킨 실험쥐들은 이전의 기억들을 보다 쉽게 잊어버렸다고 해요.
이 내용을 통해 또 재밌는 생각 2가지를 해보았어요.
① 어렸을 때 기억은 아무 소용 없을까?
흔히들,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해외여행을 가도 어차피 다 잊어버리니까 아무 소용없다라고 얘기하잖아요. 물론, 기억은 잊혀질 확률이 높아요. 신체 변화를 거스를 순 없으니까요. 그러나, 어렸을 때의 행복하고 의미 있는 경험들은 우리의 뇌 속에 조각조각 남아서 우리의 삶에 영향을 줄 거에요. 우리가 태교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도 같은 원리죠. 실제로, 유아기 시절 불안한 환경에 노출되어 있을수록 성인이 되어 우울증 등의 문제를 일으킬 확률이 높다는 연구 결과가 있었다고 합니다.
② 돌아서면 까먹는 서른 살 완중일기. 뉴런의 급격한 성장 때문일까?
유아기 시절 기억상실의 원인이 급격한 해마와 뉴런의 성장 때문이라면, 서른 살 완중일기가 매일매일 기억을 상실하는 것도 뉴런의 급격한 성장 때문일까요? 당연히 아니겠죠. 우리가 나이가 들어가면서 기억력 감퇴가 발생하는 이유는 해마의 성장보다는 해마의 쇠퇴…와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해마의 크기는 실제로 나이가 들어가면서 위축되고, 그에 따라 기억 기능의 저하가 찾아온다고 해요.
유아기 시절에는 해마라는 엔진이 커지면서 주변에 있던 기억들을 부수고 다닌 것이라면, 나이가 들면서는 기억을 만들어내는 엔진 자체가 약해진다는 뜻이죠. 슬프네요.
기억은 신의 선물이고 망각은 신의 축복이다
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죠. 바로 '망각'입니다. 까먹는 거에요.
기억에 가려져 주목받지 못하지만, 실제로 망각하는 것은 때때로 삶에 있어 큰 축복이 되기도 하잖아요?
실제로, 뇌 신경 장애로 유아기 시절부터의 기억이 모두 살아 있는 환자는 평생 동안 순간 순간마다 과거와 씨름하며 괴로워했다고 해요. 겪은 상처와 트라우마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고, 머리에 시시각각 떠오르는 기억으로 현재에 집중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잊고 싶은 과거와 잘못. 지우고 싶은 실수가 있는 우리에게 망각은 때때로 다시 앞으로 나아갈 힘을 주기도 해요. '신의 축복'이라는 말이 참 어울리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이런 망각도 누군가에겐 심각한 문제일 수가 있습니다.
저에게는 치매를 앓다가 세상을 떠나신 외할머니가 계셨는데요. 가족들에겐 정말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처이고, 아픔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기억해주지 못한다는 것. 얼마나 슬프고, 마음이 아픈 일인지 아마 경험해보신 분들만 아실 거에요.
이렇듯 망각. 즉 기억에 대한 장애는 많은 분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현대의 심각한 문제 중 하나인데요.
최근, 채널 ENA에서 방영 중인 '나의 해리에게'에서도 '해리성 장애'를 다루고 있다고 합니다. 해리성 장애는 물리적인 뇌 손상 혹은 심리적인 트라우마로 인해 기억 및 정체성에 혼란을 가지는 장애를 말해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기억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아 다중인격 등의 문제를 일으킨다고 합니다.
이렇듯, 기억에 대한 장애는 대부분 물리적인 손상 / 혹은 심리적인 충격 등으로 발생한다고 해요. 앞서 말씀드렸던 기억 형성에 관여하는 해마에 손상이 가는 경우 정상적으로 기억 능력을 유지할 수 없게 됩니다.
우리가 술을 많이 마시고, 필름이 끊기는 경우도 해마를 비롯한 뇌 신경세포에 손상이 가기 때문입니다. 실제로도 술을 마실 때에는 직전의 일을 기억하지만, 다음 날 일어나서 기억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단기기억→장기기억'으로 만드는 해마의 역할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겠죠.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순 없을까
그렇다면, 우리가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순 없을까요?
현대사회에서 정말 믿지 못할 일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는데, 앞으로 좀 더 나은 기억력을 가진 인간으로 사는 시대가 오진 않을까에 대한 물음이에요.
우선, 기술의 도움을 받지 않고, 인간 본연의 능력으로 기억력을 높이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요?
여러 자료들을 찾아봤지만 공통적으로 하는 이야기들은 뇌에 산소가 잘 유입될 수 있도록 건강한 신체환경 만들기, 집중력을 요하는 행위를 하여 뇌세포의 활발한 활동 촉진하기. 등 조금은 원론적인 이야기들밖엔 없더라고요.
국가적으로도 치매예방센터를 운영하는 등 기억력 증진을 위해 힘쓰고 있지만, 해당 센터에서도 치매에 대한 근본적이고 실효적인 해결책보다는 치매에 대한 인식 개선, 치매 환자를 대하는 방법 등에 대한 사후 대응안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르더라고요.
그만큼 기억을 지배하고, 정복하는 것은 아직 우리에게 너무나 어려운 숙제로 남아 있어요.
그래서 이런 재미난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사실, 이번 레터를 쓰게 된 계기이기도 한데요. 우리가 기술을 통해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시대가 오진 않을지 생각해봤어요.
뇌에 메모리 반도체를 넣을 순 없을까?
뇌에 메모리 반도체를 넣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가 잊어버리고 싶은 것과 기억하고 싶은 것을 선택할 수 있게 만드는 거에요.
아직은 너무 먼 얘기겠죠...??
....하고 찾아봤는데, 꽤나 유의미한 진전이 있더라고요?
BCI(Brain-Computer Interface)
BCI라고 하는 기술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Brain(뇌)와 Computer(컴퓨터)가 상호작용할 수 있도록 하는 거에요.
현재 BCI의 수준은 뇌→컴퓨터로의 단방향적 사고만 가능한 수준으로 보입니다. 구체적으로, 뇌파를 감지해서 로봇이 특정 동작을 할 수 있도록 구현하는 수준까지는 발전했어요.
대표적인 BCI기업은 일론 머스크의 '뉴럴링크(NEURALINK)'입니다. (또 머스크네요.. 근데 왠지 이제는 믿음이 가는??)
일론 머스크는 뇌에서 생각하고, 기억하는 모든 행위들이 사실상 뇌 세포간의 전기 신호에 이루어지고 있고, 현대 전자통신기술도 충분히 뇌에서 작동할 수 있다고 믿고 있어요.
그래서 2016년 뉴럴링크라는 기업을 만들었고, 지난해에는 처음으로 '놀란드 아보(Noland Arbaugh)'라는 환자에게 처음으로 이 칩을 이식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칩을 이식한 환자의 위 영상을 보시면(이미지 클릭 시 영상 이동), 환자는 칩을 블루투스로 연결해서 정말 생각만으로 컴퓨터를 조작합니다. 사지마비가 된 환자가 자유롭게 생각만으로 친구에게 메세지도 보내고, 체스게임도 할 수 있는 것이죠. 정말 놀랍지 않나요.
이렇듯, 인체의 물리적인 움직임을 넘어 뇌파 등 뇌신경 분석을 통한 새로운 움직임들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컴퓨터→뇌'로 컴퓨터의 신호를 뇌가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한다면, 우리가 기억에 관한 새로운 챕터를 열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를 위해선, 단순 기억 형성에 관여하는 기관을 발견하는 것에 지나지 않고, 기억을 형성하고 불러오는 메커니즘 및 기억을 저장하게 되는 구조화(Encoding) 로직 등에 대한 발견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이런 놀라운 발견이 이뤄진다면 달러구트 꿈백화점처럼 기억을 돈 주고 사는 시대가 올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이런 세상에서 두각을 나타낼만한 비즈니스는 어디가 될 것인지 생각해보는 재미도 있을 듯 하네요. 반도체 회사가 될까요? AI회사? 바이오회사? 재미난 상상을 해봅니다.
윤리적인 문제도 대두가 될 거에요. 오래도록 남는 기억은 감정을 수반하고 있기에 ‘기억은 머리에 추억은 가슴에 담는다’는 말도 있죠.
머리에 칩을 넣는 시대가 온다면 추억이라는 것이 더 이상 인간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사회가 올지도 모르겠네요.
‘기억’이라고 하는 주제로 레터를 쓰다보니 오늘 아침 출근길의 풍경이 조금은 새롭게 보이더라고요. 지금 내가 눈과 귀로, 또 마음으로 담는 것이 내가 집중할수록 나의 머리 속에 오래도록 남아 있을 수 있고, 또 슬프게도 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는 것. 신의 선물이자 신의 축복인 것 같습니다.
다음 주는 마지막 주로 쉬어가고요. 올해의 마지막 달인 12월에 뵙겠습니다. 감기 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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