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
느슨한 연대 4회차 모임 공지입니다.

느슨한 연대

왜 우리는 실망스러운 자식일수밖에 없을까?

떠날수도, 머물수도 없는 사람들에게 제안한다. 우리 글을 쓰자.

2024.02.20 | 조회 301 |
0
|

느슨한 연대

글쓰기 좋은 질문과 에세이를 보내드립니다.

 

나는 ○○초등학교를 나와서

국제중학교를 나와서

민사고를 나와서

하버드대를 갈 거다.

 

그래 그래서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정말 하고 싶은

미용사가 될 거다.

 

- 부산 부전초 1학년 박OO양 ‘여덟 살의 꿈'

 

2024.02.19. 첫번째 에세이.
2024.02.19. 첫번째 에세이.

 

대학 졸업반 시절, 나는 우울증을 앓았다.

진단 받은 적은 없지만 알 수 있었다. 방학 내내 죽은 듯이 잠만 잤다. 몇 날 며칠을 이불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빛이 들어오는 게 무서워 아침이면 더 깊이 이불을 뒤집어썼다. 같은 집에 살던 부모님은 그런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고, 고요한 시선은 나를 더 숨 막히게 했다.

 우울의 원인은 취직이었다. 스물 다섯살이 되어서도 무엇을 해야할지 몰랐다. 어릴 때와 차이점이 있다면 이제는 누구도 내게 무엇을 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학생 땐 '공부만 잘하면 된다고' 했었는데,

이제는 어떡하지?

 

취직이라도 해야 할까?

 

 그렇게 밀려나듯 취업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나 내가 취업을 준비할 당시인 2017년은 무더기로 태어난 90년대생들이 직업을 구하는 시기였다. 수요와 공급의 법칙 앞에서 서울대 졸업생도 예외는 아니었다.

 또래 친구들은 노량진 학원가로, 신림동 고시촌으로, 강남역 해커스로 향했다. 기업에서는 NCS와 AI면접을 도입해 수 천 명의 지원자를 걸러냈다. 체에 치듯 걸러진 지원자들은 탈락 즉시 다른 대기업으로 다시 지원서를 냈다. 더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재수를 하던 것과 똑같은 방식이었다. 

모두가 가고 싶은 기업은 비슷했다. 돈도 많이 주면서, 출퇴근도 가깝고, 밖에서 보기에도 근사하고, 심지어 고용 안정성도 탄탄한 기업! 그러나 그런 꿈의 기업은 몇 개 없었다. (어쩌면, 단 한 개도 없었다.)

결국 수많은 서울대 동기들은 학교를 유예하는 형식을 선택했다. 로스쿨로, 대학원으로, 다시 의대로 향했다. 학창 시절에는 '서울대'정도면 삶이 보장된다고 했는데 알고 보니 '전문직 대학원, 혹은 박사 과정'이 진짜로 삶을 보장해주더라 하는 식이었다. 그렇게 끝나지 않는 트랙에 몸을 맡겼다.

나는 운이 좋게 일년만에 신의 직장으로 불리는 인기 공기업에 합격했고, 드.디.어. 제대로 일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매일 정장을 입은 채 야근했지만 월 급여는 200만원대였다. 상명하복의 문화를 버티지 못하고 1년만에 퇴사했다.

 나는 오랫동안 마음 속으로 이때의 실패를 간직했다. 바보같은 실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블로그에 글을 쓰자, 비슷한 우울을 겪었다는 수많은 90년대생들이 댓글을 남겼다.

괜찮은 대학을 졸업하고도, 만족할만한 직장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나 혼자가 아니었다.

 

Case1. A는 SKY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했다.

남자 아나운서를 꿈꾸지만, 아직도 계약직 쇼호스트를 전전한다. 공채가 뜨는 곳이면 어디든지, 지방으로 정규 아나운서 시험을 보러 다니고 있다. 지방을 오가는 숙박비와 숙소 비용은 당연히 지원자의 몫이다.

그가 운 좋게 KBS아나운서로 취직한다면, 초봉은 3600만원이다.

 

Case2. B는 예중, 예고를 졸업하고 상위권 대학 음대를 졸업했다.

음악으로 직업을 얻는 방법은 두 가지 뿐이다. 연주자가 되거나, 강사가 되거나. 일반적으로는 박사학위를 밟으며 음대 입시 강사로 일한다.

 졸업 후 지방 음대 시간강사라도 할 수 있으면 다행이지만, 대부분은 그런 자리조차도 얻기가 어렵다.

B는 교육대학원에 입학해 교직이수를 하고 고교 음악 선생님으로 일한다. 초임교사 9호봉 월 급여는 211만원이다.

 

Case3. 경영대를 졸업한 C는 운이 좋았다.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대기업 회계팀에 입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업무 강도가 만만치 않았다. 매일 밤 열시가 다 되어 퇴근했다. 결국 부모님댁에서 방을 빼 직장 근처에 월셋방을 구했다.

삶은 회색으로 변했다. 평일에는 출근과 퇴근만 반복할 뿐, 취미 생활을 할 여력이 생기지 않았다. 부장님은 C에게 "주말에 중국어 학원을 다니지 그러냐"며 조언했다. C는 내키지 않았지만 승진 가산점을 위해 온라인 중국어 회화 수업을 신청했다.

 

(나중에 다루겠지만, 전문직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다.

90년대생이 법대를 졸업할 즈음 로스쿨이 생기고, 의대를 졸업할 즈음 의대 증원 이슈가 불거졌다. 조금만 참으면 크게 한 탕 보상받을 수 있다는 논리는 실시간으로 무너지고 있다.)

 

좋은 대학만 나오면 그만이라고?

1980년대 남성의 대학 진학률은 16.8%, 여성의 대학 진학률은 5.6%다.

2010년대에는 성비를 가리지 않고 79%다. 이제 대학이 삶을 지탱해주는 시절은 지나갔다. 학자금대출만 남길 뿐이다.

럴듯한 대학 졸업장을 가지고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하지 못하는 건,

우리 시대가 직면한 새로운 평균이다.

 

 부모 세대는 우리를 보고 '실망스럽다'고 표현한다. 요즘 애들은 불평불만밖에 할 줄 모르고, 배가 불렀으며,  근면 성실하지 않다고 말이다.

하지만 90년대생들은 지난 세월 동안, 윗 세대가 했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노력해왔다.  학창 시절에는 공부가 우리를 구원해주리라 믿었다. 내신 시험을 준비하고, 수능 시험을 보았다. 대학 내내 좋은 학점을 받기 위해 애썼고, 이력서 한 줄을 늘리기 위해 무급 인턴을 불사했다. 

 

죽도록 애썼지만 직장은 여전히 구하기 어렵다. 부모세대처럼 결혼해서 아이 둘을 낳아 기르는 건, 그 어떤 일보다도 어려워 보인다.

 

사회는 고갈된 90년대생에게 채찍질을 가했다. 미라클모닝과 갓생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 미라클모닝 : 스스로가 선택한 시간에 꾸준하게 일어나고 그 시간에 자기 계발을 하는 것

* 갓생 :  과정적으로 부지런히 사는 삶

제대로 노력한다면 경제적 자유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알고리즘이 모두의 SNS에 떠올랐다. 띵동, 띵동. 더 열심히, 최선을 다하면 해결된다고 했다.

그렇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아무리 노오오력 해도, 내일 또 지하철을 타고 출근길에 올라야 했다. 

 

우리가 처한 위기에는 실체가 없다.

할아버지 세대에는 무찔러야 마땅한 공산당이 있었고, 부모 세대에는 타도해야 할 독재 정권이 있었다. 90년대생이 말하는 불안은 이전 세대가 실제로 마주했던 전쟁, IMF, 민주화운동에 비하면 보잘것없어 보인다.

 

SNS를 통해 타인과 비교해 느끼는 상실감.

1%대의 경제 성장률.

계층의 사다리가 고장 난 것 같다는 불쾌감.

교묘한 성 차별.

영원히 중산층이 될 수 없을 것 같다는 불안함. 


 우리 세대가 느끼는 공포는 흐릿하다. 이들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 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모든 곳에 존재했다. 우리는 실시간으로 구석으로 몰렸다.

인스타그램 알람으로, 신문사 기사로, 새로 나온 앱 광고에서...공포는 sns를 통해 확산되어 사회 전반에 불안한 사람들을 양산해냈다.

사람들은 어떻게든 불안한 상태를 해결하고자 극단적인 양 끝으로 향했다.

한쪽에는 '언젠가는 보상이 올 거라고 철썩 같이 믿는 부류'가 있다. 이들은 벌개진 눈으로 열심히 일하며 부모 세대의 논리를 내재화했다. 더 좋은 학위, 더 좋은 직장, 더 큰 집을 성취의 기준으로 삼았다. 

다른 쪽은 '오늘 당장 행복을 찾아 떠나는 부류'다. 이들은 직장을 때려치우고 갭 이어를 가지며 꿈을 찾아 떠났다. 그리고 그 여정이 얼마나 보람찬 일인지 브이로그 카메라에 담아 유튜브에 대거 업로드했다.

 

나는 이도저도 아닌 사람이었다.

양쪽 다 눈에 띄는 성과를 내는 동안 하나의 결론도 내지 못했다. 직장을 때려칠 용기도, 성취를 좇을 에너지도 없었다. 하는 거라곤 고작 퇴근 후 블로그에 끄적거리는 일 뿐이었다. 그렇게 7년을 끄적거렸다.

그 시기에 쓰여진 글들은, 내 삶을 바꿔 주었다. 

 글은 힘이 있었다. 아무도 읽어주지 않아도 괜찮았다. 빈 종이에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건 정말 즐거웠다. 어린아이가 된 것 처럼 종이에 재잘거렸다. 퇴근 후 몇 시간이고 글을 써도 소진되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끝없이 채굴할 수 있는 재미의 동굴을 찾아낸 기분이었다. 삶이 즐거워졌다. 일상에 자신감이 생겼다. 

그리고 마침내 사람들과 함께 글쓰는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싶어졌다. 그게 바로 <느슨한 연대 - 글쓰기가 (내) 세상을 바꿀거야!>의 시작이다.

 

떠날수도, 머물수도 없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우리, 글을 쓰자.

글쓰기가 (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호미 블로그 바로가기

 

다가올 뉴스레터가 궁금하신가요?

지금 구독해서 새로운 레터를 받아보세요

✉️

이번 뉴스레터 어떠셨나요?

느슨한 연대 님에게 ☕️ 커피와 ✉️ 쪽지를 보내보세요!

댓글

의견을 남겨주세요

확인
의견이 있으신가요? 제일 먼저 댓글을 달아보세요 !

© 2024 느슨한 연대

글쓰기 좋은 질문과 에세이를 보내드립니다.

뉴스레터 문의 : pp_earthworm@naver.com

자주 묻는 질문 오류 및 기능 관련 제보

서비스 이용 문의admin@team.maily.so

메일리 (대표자: 이한결) | 사업자번호: 717-47-00705 | 서울 서초구 강남대로53길 8, 8층 11-7호

이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 정기결제 이용약관 | 070-8027-28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