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떠한 생각에 깊게 잠겼다가 빠져 나온다. 나는 영화관에 앉아서 잠자코 영화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압도적 크기의 스크린에는 관객을 적응하게 만들기 위해 설치된 연속적이고 가벼운 자극이 방영된다. 몰입의 시간이 다가오고 주변의 조명이 서서히 꺼져 이내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면 세상의 어떤 부분은 사라진다. 부정된 현실. 여기에 앉아 있는 나와 다른 사람들은 가짜가 되어야 성공적으로 다른 세계에 접속할 수 있다.
그러나 천천히 다시 생각하면 스크린이 가짜라는 걸 알게 된다. 스크린이 가짜고, 비록 실체는 없고 내 눈에도 보이지 않지만 여기 어떤 의자에 앉아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나는 진짜다. 정말 그럴까. 나는 증거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당신이 있는 쪽을 쳐다본다. 당신이 시선에 응답한다. 당신의 손가락이 획을 가로지르는 나의 손바닥으로부터 서서히 올라와 팔을 그러쥔다. 진짜다. 그렇게 믿고 나면 옆에 있는 사람이 실제로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아도 감각의 움직임이 팔을 타고 올라오는 것을 느낀다. 명상의 기본 행동 강령이다. 명상이란 기본적으로 정신을 온 몸의 감각에 곤두세워 생각에 집중을 빼앗기는 것을 막는 원리를 가지고 있다. 처음에는 손끝이 간질간질한 것 같은 느낌으로부터 출발한다. 간지러운 대로 내버려 두면 그 감각은 곧 사라진다. 이번엔 팔꿈치, 어깨, 귓볼, 머리카락, 발 안쪽, 눈두덩이로 옮겨간다. 감각이 제멋대로 발생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적응이 되고 나면 이것을 몸 안에 뭉쳐 있는 에너지라고 여기고 한번 움직여 보는 것이다. 움직이고자 마음 먹으면, 처음엔 잘 되지 않다가 점차 감각이 온 몸을 관통하기 시작한다. 어느새 관념으로 존재하던 나와 나의 이름과 나의 가족과 시간은 무용하게 되고 이 감각을 꿰뚫는 몸 하나만 남게 된다. 같은 테크닉을 사용하는 것 중 대표적으로 섹스를 들 수 있다. 에너지라고 불리는 것을 실재하는 타인의 몸으로 대체한 것이다. 이것은 한편 놀이적 유희를 자아내기도 한다. 이를테면 우리는 이런 행동을 한다:
얇은 피부를 작게 쥐면 느껴지는 동글동글한 덩어리를 만진다.
손톱의 표면과 살이 이어지는 부분을 쓰다듬는다.
귓볼의 넓죽하고 말랑한 살부터 사람 인 자처럼 그려진 부분을 쓰다듬는다. 평소엔 들을 수 없는 생소한 소리를 듣는다.
따뜻한 뱃가죽도 만질 수 있다. 반죽처럼 꾹 쥐었다 놓기를 반복할 수도 있다.
등에 그림을 그리듯 추상적 메시지들을 손끝으로 나타낼 수 있다.
그러나 타인이라는 매개를 통하였기 때문인지 큰 왜곡을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모든 관념의 부정. 스크린 속 영화나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가 한심하고 우습게 된다. 신이나 가족적 가치를 믿는 것은 위태롭다라고…… 사실상 내가 만질 수 있고 취할 수 있는 그 사람만이 진짜라고, 타인을 마치 나의 존재의 연속인 것처럼 알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이러한 테크닉의 가장 큰 맹점을 발견할 수 있다. ’계속되지 않으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명상에서는 이런 점을 보완하기 위해 지속적 연습을 권한다. 타인과의 상호 작용에서 비롯된 그 환희와 기쁨은 그러나 두 인물 간의 합의가 지속되지 않는 순간 끝나버리고 만다. 비참하게 떨어진 두 덩어리들은 깨닫게 된다. 내가 느꼈던 실재의 감각이 허상이 되었구나. 나의 존재 역시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게 존재는 끊임없이 위기를 맞는다. 하지만 그 환상적 경험이 지속되지 않기에 우리는 관념적 세계로 돌아올 수 있다. 모든 불빛을 차단하고 오로지 스크린만이 있는 곳에서, 너무 몰입한 나머지 타인이 속닥거리는 소리나 웃는 소리조차도 듣지 못하면서, 이야기로 빠져든다. 나의 존재를 부정하였기 때문에 타인의 이야기에 접속할 수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면서. 사회자가 제안하자 자유롭게 질문하기 시작한다. 감독님의 개인적 경험에서 비롯된 이야기인가요? 감독님은 사랑을 뭐라고 정의했나요? 감독님은 세상을 어떻게 보고 있나요? 주인공이 애정을 전달하는 방식은 감독님의 개인적 견해인가요? 그러니까 감독님의 눈에 비친 인간이란 어떤 건가요? 그 사람을 그대로 본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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