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예보에 저항하기 [주간 묘사 제 25호]

257 짧은 소설

2023.11.15 | 조회 3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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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산도 우의도 없이 빗속을 걸었다. 그저 빗방울을 맞으며 천천히 젖어가는 상하의가 맨몸에 들러붙는 것을 느꼈다. 엄청난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느새 나는 집에서부터 먼 원룸촌 사이를 걷고 있었다. 처음에는 공원을, 그다음에는 강변을, 직전에는 학교 운동장을 걸었다. 그러다 어느새 사람들의 거주지 근처까지 오게 됐다. 사람들이 안온한 지붕아래 비를 피하고 있는 건물들 사이를 걷고 있는 것이었다. 그곳에는 정육면체로 생긴 건물들이 솟아 있었다. 나는 그 건물들의 작은 창문들 너머마다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가끔은 믿기 힘들었다.

집을 나서기 전에 비가 온다는 사실을 알지 못 했던 것은 아니었다. 일기예보를 이미 확인하여 하루 종일 비가 내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거니와, 맨바닥에 누워 있을 때부터, 밖에서부터 들려오는 빗방울 소리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으니까. 골똘히, 누워서 투둑투둑 내리는 빗소리를 듣고 있었던 것이다. 리듬감 있게 두들기는 소리를 들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저 가만히 누워있기를 계속하고 싶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참을 수 없는 마음이 들어 비에 대한 아무런 방비도 하지 않은 채 그 자리에서 신발만을 신고 밖으로 나간 것이다. 그런 심정의 변화는 정말로 이상한 일이었다.

내친김에 달리기도 했다. 그러자 차가운 빗방울들 사이로 때 아닌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그러나 달리기는 곧 그만두었다. 지치기도 했으나… 뛰어야 할 이유도 딱히 없었으므로.

나는 울거나 울고 싶거나 다시 울었다. 우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라는 사실을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릴 때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누워서 하염없이 우는 일들이 벌어지다 비가 내린 것이다.

비는 점점 거세져 옷이 물을 머금고 무거워 지는 게 몸으로 느껴질 정도였고, 마침내 물이 나를 흐르고 있다는 착각마저 하기에 이르렀다. 걸어서 헤엄을 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그때 주택가를 계속 걷던 나는 불이 켜진 방을 발견했다. 사실 대부분의 방에 불이 켜져 있었으나, 내가 발견한 방은 그 이상의 특별함이 있었다. 바로 그 방에 있던 사람이 바깥을 내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따뜻하고 밝은 방에서 비 오는 날 바깥을 헤매는 처량한 신세인 나를 바라보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빛을 등지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았고 빗물이 눈에 들어가는 바람에 흐리게 보였다. 여자인지 남자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내가 파악할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가 분명 나를 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빛의 대조로 인해, 포화상태에 이른 수분의 대조로 인해 나는 그 순간 방 속의 사람에게 경외를 느꼈다.

그러니까 비가 오는 날에 온전히 방에 가만히 있을 수 있는 용기, 날씨가 불러내는 매혹에 맞서 밖으로 뛰쳐나오지 않고 저항할 수 있는 대범함에 나는 몹시 놀랐으며, 그것이 나에게 필요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빗속에서 깨닫는 중이었다. 내가 실패한 평화를 이룰 수 있는 능력에 대해서.

그러나 나는 왔던 길을 돌아가 나의 방으로 가야 하는지는 결단을 내릴 수 없었다. 밝은 방의 사람은 맨 바닥에 누워 있던 나와는 너무나 대조되는 자세로 굳건하게 서 있는 반면, 나는 집에 돌아가더라도 누워있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을 터이므로 이미 모호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밝게 빛나는 창만을 남겨두고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이내 비가 그쳤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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