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 아침이 왔다. 비가 내린다는 소식과 반대로 햇빛이 창문을 통과하는 중이다. 여전히 한국과 시차 적응을 끝마치지 못한 채 피곤함으로 무장한 몸을 이끌고 10시를 넘긴 시각, 살짝 늦은 아침과 조금 많이 이른 점심을 위해 외출 준비를 마치고 길을 나섰다. 하지만 일기예보가 마냥 틀린 게 아니라는 듯이 바깥에는 습한 기운이 감싸 돌았다. 그렇게 젖은 발자국을 남기며 들어간 곳은 다마치역 근처에 있는 라멘집이다. 일본에서의 공식적인 음식을 먹는 순간이다(여행의 정말 시작임을 알리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메뉴는 일어로 도배된 키오스크였고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이내 다시 안경을 치켜 올리고 동행자와 함께 천천히 메뉴를 골랐다. 내가 고른 메뉴는 츠케멘에 차슈를 추가했다. 츠케멘은 라멘과 달리 면과 육수가 분리되어 상 위로 올라온다. 먹는 사람이 직접 면에 찍어먹는 것이 특징인데 "찍어먹는 면"이라는 뜻에서 츠케멘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주문했던 메뉴가 나오고 사진을 한 장 찍었다. 젓가락을 반으로 가른 후에 가시가 박히지 않게 서로 문지르고 왼손에 꼭 쥐었다. 사실 츠케멘을 처음 먹었고 어설픈 동작의 연속이었다(지금 생각 해보면 소바와 먹는 방법이 비슷했던 것 같다). 면에 간이 배어있지 않고 맑은 육수는 적당히 짰다. 고기 기름이 방울 형태로 국물 위로 떠다니는 모습은 비눗방울처럼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 언젠가 일본에서 라멘을 먹을 때의 예의는 면치기 소리로 주방에서 판단한다는 말이 생각났고 소심한 후룹을 몇 번 정도 이어갔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적당히 짰던 육수가 점점 태평양의 바닷물을 끌어오고 있었다. 라멘과 같이 내어준 숟가락의 역할은 이미 상실되어 한참을 가만히 있었고 젓가락의 격렬한 춤사위도 이내 뜸해졌다. 아, 여기까지다.
그렇게 더부룩한 배를 안고 신주쿠로 발걸음을 옮겼다. 일본은 지하철이 한국만큼이나 잘 되어 있지만 국가가 운영하는 것이 아닌 민영화가 이루어진 상태이기에(사실 20년을 더 지났다) 지하철 요금이 상당한 편이다. 7년 전에는 지하철 표를 구매하여 개찰구에서 구멍을 뚫어 표를 받기도 했지만 지금은 핸드폰 안에서 모든 게 이루어진다(그 구멍 뚫린 표를 간직하는 건 여행의 증표이기도 했다). 목적지는 Coffee SWAMP, 협소한 골목에 있는 협소한 카페다. 이곳의 가게 규모와 테이블 갯수 덕에 기다림이라는 현대인들에게 부족한 감정을 느끼게 해주기도 하며 반쯤 열린 문 틈으로 흘러 내리는 재즈가 잘 어울리는 곳이다. SWAMP도 처음부터 사람들이 방문을 위해 몰려들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여기서 SNS의 순기능과 부정적인 기능을 마주하게 됐다. 좋은 공간을 나눌 수 있는 건 축복받은 일이며 고마운 일이지만 순식간에 타자의 피사체로 전락하기 쉽다는 말이기도 하다. 인증이라는 수단으로밖에 쓰이지 않는 공간은 그곳 주인장의 정성이 가득 담긴 취향을 경시하는 것과 다름 없다. 그렇게 브랜드나 공간이 이미지로써 소비되는 일들을 마주할 때면 때때로 SNS가 미워지기도 한다. 아, 커피는 참 맛있었다. 라떼가 유명한 곳으로 알고 있지만 나는 에티오피아 원두로 필터 커피를 주문했다(가게 내부에 대한 묘사가 없는 이유는 방문 당시 만석으로 단단하게 굳혀진 상태였기에 바깥 벤치에 앉아 있었다). 어영부영 길 걷는 행인들과 몇 번의 눈맞춤으로 어색한 미소를 날리기를 여러 번, 몸을 일으킬 시간이 돼 벤치에서 엉덩이를 띄우고 어색한 일본말로 고마움의 인사를 건넸다. 디스크 유니온에 들러 블루 자이언트 CD를 찾았지만 결국 디깅에 실패했고 라디오헤드와 그린데이의 CD는 손과 눈에 가득 담고 코엔지로 떠났다.
코엔지에는 빈티지 셀러들이 즐비했다. 현행 상품보다 옛 것에 관심이 있는 나에게는 기대가 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여기서 나는 한국 빈티지 셀러들의 큐레이션 농도가 더 짙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물건의 상태나 물량은 일본이 더 높은 수준을 가지고 있었지만 장르에 있어서는 한국이 더 집요하게 파고 드는 느낌을 받았고 물건 구성의 방향이 주인장의 취향으로 나타나는 건 한국 셀러가 더 잘하는 듯 보였다.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나름의 기준점을 갖고 있는 시각으로 바라봤을 때에는 그랬다. 시간이 된다면 매니악한 물건을 가지고 있는 주인장의 가게를 방문해보고 싶다, 아마 이도저도 아닌 곳들을 많이 봐서 그랬던걸까. 코엔지에서 건졌던 것은 가챠 샵에 있는 올드 가리모쿠 미니어처 퍼니처였다. 하필 내게 500엔이 있었고 하필 그 가챠에서 잔돈구멍으로 동전이 자꾸만 떨어졌다. 그것이 빈티지를 건지지 못한 내게 위로의 선물이었을까, 그 피규어는 내 눈 앞에서 늠름한 자태를 뽐내며 있다(가리모쿠 사진은 블로그에 올릴 예정이다). 저녁으로는 숙소 근처에 있는 야끼니꾸와 산토리 생맥주를 마시고 하루를 마무리 한다.
https://soundcloud.com/onzekaprod/vansire-noriko-1
나는 어제와 오늘 37,000 정도의 발자국을 일본에 남겼다. 오늘은 사운드클라우드 링크를 올렸습니다. 음악이 끝난 뒤에 자동 재생 되는 리스트도 꽤나 매력적이니 틀어둔 채로 잠시 감상 해보세요.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