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슨레터🏐 장기하와 얼굴들 데뷔 때 심사 했던 썰

안녕하세요. 구독자님. 인디 음악가의 생존 친구 윌슨레터 열한 번째 시간입니다. 🏐 방금 '영기획 흥망성쇠 10년 - 하박국이 성공과 실패에서 배운 것' 온라인 클래스를 마쳤습니다. 원래 1시간 20분 발표+40분 Q&A였는데 제가 1시간 40분이나 발표를 하는 바람에... Q&A 시간은 30분만 가졌습니다. 많은 분께서 내용에 공감하고 좋은 질문 던져 주셔 제가 더 힘이 나는 시간이었어요. 온라인 클래스 함께 해 준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어떤 형태로든 윌슨레터 구독하는 분들과 함께 이야기 나눌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네요. 요건 머리를 좀 굴려 볼게요. 

얼마 전 인디 음반 지원사업에 심사하러 경주에 다녀왔습니다. 제가 제작자다 보니 저희도 지원사업에 공모하는 편이라 다른 음악을 심사하는 일이 많이 없는데, 이번에는 제작 멘토링과 연계된 지원 사업이라 심사위원으로 선정된 것 같아요. 문득 제가 처음 신인 음악가 심사를 했던 때가 떠올랐습니다. 그때는 바야흐로.... 15년 전... (숫자를 적고 나니 정말 오래전이네요. 😅) 당시 쌈지사운드페스티벌(이하 쌈싸페)이라는 게 있었는데요. 패션 회사 쌈지에서 운영하는 일종의 CSR(기업의 사회적 책임) 프로그램이었어요. 쌈지는 공연장인 클럽쌤과 인디 레이블 쌈넷을 운영하는 등 (언니네 이발관의 <가장 보통의 존재>가 쌈넷에서 발매된 앨범입니다.) 다양한 인디 음악 사업을 펼쳤는데요. 그 중 쌈싸페는 저렴한 가격으로 국내 인디 공연을 볼 수 있는, 국내에서 최초로 열린 음악 페스티벌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쌈사페에는 '숨은 고수'라는 제도가 있었어요. 신인 팀을 '숨은 고수'라 칭하고 중견 밴드를 '무림고수'라고 칭했는데요. 여기에 출연했던 팀으로는 넬, 스웨터, 피아, 뜨거운 감자, 럼블피쉬 같은 팀이 있습니다. 이후 이는 경쟁 오디션을 통해 신인 음악가가 페스티벌 무대에 설 수 있는 제도로 발전하게 돼요. 저는 2008년 쌈싸페 10회 때 프로그래머로 일을 했는데요. 업무 중 하나가 '숨은 고수'에 공모한 밴드를 직원, 평론가와 함께 심사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때 다양한 음악가들을 심사하면서 느꼈어요. 정말 잘하는 팀은 다들 알아보는구나. 근데 유독 한 팀이 심사 과정에서 논란이 됐습니다. 그 팀은 여러분도 잘 알고 있을 '장기하와 얼굴들'입니다.

장기하와 얼굴들은 평론가 심사에서는 좋지 못한 평을 받았어요. 아마추어 같다는 거죠. 저는 높은 점수를 줬습니다. '숨은 고수'는 경연 공연을 일반 관객에게도 공개했거든요. 그때 장기하와 얼굴들이 '싸구려 커피'를 부르는데, 랩(?) 파트 있잖아요. '미지근한 콜라가 담긴 캔을 입에 가져가 한모금 아뿔싸 담배꽁초가' 그때 '아뿔싸 담배꽁초가'를 부르는 순간 현장에 있는 모든 관객이 얼굴을 찌푸리는 겁니다. 그런 풍경은 처음 봤어요. 이렇게 직접적으로 관객의 감정을 자극할 수 있다니. 그전까지 인디 밴드 공연에 가면 가사가 제대로 들리는 경우가 잘 없기도 했고요. 결국 장기하와 얼굴들은 그해 쌈싸페의 '숨은 고수'가 됩니다. 

장기하와 얼굴들은 페스티벌을 진행하며 운영팀을 가장 많이 괴롭힌 팀입니다. 무대에서 이런 건 가능한지, 그게 아니면 다른 건 가능한지 계속 물어봤거든요. 예를 들어 '무대에서 담배를 피워도 되는지.' -> 피울 순 있지만 엠넷에서 중계할 예정이기에 해당 부분은 편집될 수 있다. '사람을 올려놓고 이동시킬 바퀴 달린 병원 침대가 동원 가능한지.' -> 병원 침대는 어렵지만 바퀴 달린 사장님 의자는 사용할 수 있다. 이런 것들 말이에요. 결국 장기하와 얼굴들은 빨간색 포인트를 준 흰색 셔츠를 입고 미미시스터즈와 함께 일렁이는 춤을 추며 관객을 사로잡습니다. 그해 숨은 고수에 오른 다른 팀이었던 중견 신인 고고스타는 공연 중 펜스에 오르기도 했거든요. 근데 장기하와 얼굴들이 보여준 비주얼이 워낙 압도적이어서 관객들 모두 장기하와 얼굴들 이야기만 했어요. 이날 공연은 엠넷에 중계됐고 캡처되어 수많은 짤로 재탄생하게 됩니다. 이후는 다들 알 거예요. 장기하와 얼굴들은 일약 스타덤에 오릅니다. 이 경험을 통해 깨달은 게 있어요. 잘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구나. 

지원심사를 마치고 심사위원들과 서울 올라가는 차를 기다리며 카페에서 잠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지원서는 요즘 다들 너무 잘 쓰고, 결국은 음악에 끌리는 지원자를 고르게 되지 않느냐고. 다들 맞는다고 하더라고요. 아무리 지원서를 잘 써도 음악이 좋아야 한다고요. 음악이 좋다는 말은 너무 추상적으로 들리긴 하죠. 어디까지나 제 기준에서 현장에서 자연스럽게 배제하게 된 음악을 먼저 이야기할게요. 첫 소절 듣자마자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듯한 뻔한 전개. 요즘 유행하는 흔한 음악은 가장 먼저 제하게 됩니다. 그럼 어떤 팀이 귀에 들어올까요? 신선한 사운드, 개성 있는 표현, 자신만의 세계가 있는 음악은 위의 음악보다 선정할 확률이 높아집니다.

이는 어디까지나 제 기준일 뿐 정답은 아닙니다. 제가 뻔하다고 생각하는 그 음악이 누군가에게는 편하고 좋은 음악일 수도 있고요. 장기하와 얼굴들이 평론가에게는 아마추어 같은 음악이지만, 제게는 신선하게 들린 것처럼요. 다만 분명한 건 확실한 자신만의 무언가가 있는 음악가일수록 한 번 더 듣고 싶어지고 그만큼 좋아할 가능성도 커진다는 점입니다. 얼마 전 폴인의 <월간디자인> 최명환 편집장 인터뷰를 보니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정보를 효율적으로 얻는 게 중요했던 시대가 저물고 있어요. 콘텐츠 업계에서는 이제 무언가를 생각하고 느끼게 하는 게 중요해졌죠. 그걸 어떻게 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하고요. 뾰족한 관점을 만들기 위해서 부지런히 정보를 축적해야 해요. 그리고 그걸 자신만의 관점으로 해석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힘이 생긴다고 생각해요." 저도 음악가가 자신만의 좋은 점을 개발해 사람들에게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과정을 '뾰족하게 하는 것'이라는 표현을 쓰곤 합니다. 아무래도 뾰족해야 상대에게 한 번이라도 제대로 자극을 줄 수 있을 테니까요. 

이상, 온라인 클래스 준비(및 온갖 사고)로 피곤에 쩔어 뾰족한 구석이 하나도 없는 하박국의 급조한 장기하 데뷔 때 심사 했던 썰이었습니다. 🫠 다음주엔 기운 차리고 보다 뾰족한 내용으로 찾아 올게요!

✨금주의 윌슨레터 추천곡✨은 한 주 쉬어 갑니다. 윌슨레터는 다음 주에 열두 번째 레터로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윌슨윌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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