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든 님의 목소리

FM 정은임의 영화음악

2026.11.02 | 조회 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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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자님, 안녕하세요. 달력이 두 장 남은 11월 첫 편지를 보냅니다. 지난 10월의 마지막 날, 아름다운 숙제처럼 <잊혀진 계절>을 들었고요. 다가온 11월의 첫날은 신승훈 <미소 속에 비친 그대>를 들었습니다. SNS 속엔 1987년 11월 1일 사망한 유재하의 음악이 많이 들리더라고요. 한 장뿐인 유재하의 앨범이 좋다는 것엔 이견이 없지만요. 언제부턴가 유재하가 떠난 날 듣는 유재하 음악만큼, 유재하를 존경해서 3년 뒤인 1990년 11월 1일에 데뷔한 신인 신승훈의 이야기가 애틋하더라고요. 신승훈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바로 그날, 세상을 떠난 김현식의 얘기도 그렇고요. 지난 편지에 이어 이번 편지도 노래 얘기가 길어지는데요. 오늘 보낼 편지는 노래에 대한 건 아니고요. 좋은 노래도 참 많이 나왔던 라디오 프로그램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20년의 세월을 건너 도착한 오늘의 사연은...

2024년에 저는 체코 프라하에 살고 있었어요. 친구가 전혀 없던 건 아니었지만, 한국에서 보다는 외로웠고요. 자연스럽게 유튜브니 뭐니 시간을 때울 콘텐츠를 찾아다녔어요. 그러던 중, 딸이 세상을 떠나고 20년 만에 명예 골든 마우스 상을 대리 수상하는 할아버지 모습을 보게 됩니다.

출처 : 씨네21
출처 : 씨네21

그분의 따님은 아나운서였습니다. 1992년부터 1995년까지 2년 5개월 간 한 방송을 진행했고 8년 뒤, 팬들의 성원에 힘입어 같은 방송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지요. 아쉽게도 복귀한 방송이 그리 오래가진 못했으나 누군가는 오히려 그래서 다음번에도, 그다음 번에도 돌아오리라는 낙관을 품게 하는 목소리였지요. 모두의 기대와 달리, 갑작스러운 사고로 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딸은 떠나고 없었지만 남은 게 있었어요. 아버지가 매일 같이 녹음한 라디오 방송 테이프입니다. 하루만큼씩 더해진 아버지의 정성 덕분에 그녀가 떠난 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수백 편의 회차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 시절을 살지 않았던 사람 역시 그녀가 골라 집은 영화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본 시상식은 방송이 끝난 지 20년이 지나서도 거뜬히 존재감을 드러내는 목소리를 기리는 자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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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청춘을 살아보지 못했다는 아쉬움과 동경이 기저에 깔린 제게 이 모든 서사가 매력적이었어요. 그때부터였습니다. 팟빵에 올라온 그녀의 방송 본을 하나하나 들었던 건요. 본론이 조금 늦었습니다. 오늘 소개할 편지 주제는 꼭 34년 전인 1992년 11월 2일 오늘. 세상에 처음 들려온 목소리, FM 정은임의 영화음악입니다.

모두가 정든님을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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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M 정은임의 영화음악>을 시작할 때, 정은임 아나운서는 아나운서가 된 지 4개월밖에 되지 않은 신인 아나운서였습니다. 반면 <FM 영화음악>이라는 프로그램은 1992년 당시에도 20년 넘는 역사를 이어온 잔뼈 굵은 프로그램이었고요. 처음이라 서툴겠지만 변치 않는 사랑 보내주시면 기대에 부응하겠다던 당찬 신인은 모든 씨네필의 영원한 정든님으로 남았습니다. <FM 영화음악>의 오랜 역사 속 정은임 아나운서가 특별했던 지점은 진실로 영화를 좋아하고 또 공부했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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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처럼 매체가 다양하지 않고 콘텐츠가 메말랐던 시절, 극장에 걸린 영화 몇 작품은 목을 적신 한두 방울의 물처럼 오히려 갈증이 났을 텐데요. 한국에서 개봉하지 않은 타국의 예술영화까지 꼭꼭 씹어 들려주던 새벽녘은 잠 못 들던 청춘들을 영화광으로, 영화인으로 길러냅니다. 진행자와 청취자가 영화에 흠뻑 빠져 두근거리는 가슴을 고스란히 드러내던 새벽이었으니, 청취자들에게 정든님은 진행자이자 취향이 비슷한 단짝 친구처럼 여겨지지 않았을까요.

 

삼인칭의 진행자가 이인칭의 당신으로 다가온 까닭엔 흔들림도 있을 겁니다. 정은임 아나운서의 방송을 듣다 보면 요목조목 열심히 공부한 기색이 역력한 가운데 떨림이 느껴집니다. 특히 타자의 고통을 들여다볼 때 그렇습니다.

새벽 세 시, 고공 크레인 위에서 바라본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100여 일을 고공 크레인 위에서 홀로 싸우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의 이야기를 접했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올가을에는 외롭다는 말을 아껴야겠다구요. 진짜 고독한 사람들은 쉽게 외롭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조용히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는 사람들은 쉽게 그 외로움을 투정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어딘가에 계시겠죠? 마치 고공 크레인 위에 혼자 있는 것 같은 느낌, 이 세상에 겨우겨우 매달려있는 것 같은 기분으로 지난 하루 버틴 분들, 제 목소리 들리세요? 저 FM 영화음악의 정은임입니다.

2003년 10월 22일 돌아온 <FM 영화음악>에서 고공 농성 중 사망한 노동자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정은임 아나운서의 오프닝 멘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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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따르는 음악은 영화⟪빵과 장미⟫삽입곡 George Fenton - Maya Working이었습니다.

한 발 뺄 수 있는 문제에 한 발 다가왔으니 정은임 아나운서가 정든님이 될 수밖에요.

가장 낭만적인 타임머신

1992년 11월 20일 방송에 광고로 나오는 책 [출처 : 알라딘 ]
1992년 11월 20일 방송에 광고로 나오는 책 [출처 : 알라딘 ]

2024년에 철 지난 라디오를 들을 때면 그 시절, 정은임 아나운서의 일렁임이 전파를 타고 모두의 가슴으로 파도 타던 밤을 상상하곤 했어요. 1992년엔 미개봉인 영화가 2024년엔 안 본 사람이 없는 영화이고 1992년 겨울에 두쫀쿠처럼 호들갑 떨며 소개하는 유행 간식이 다름 아닌 붕어빵이라는 사실로 타임머신에 올라탄 것 같았습니다. 중간 중간 나오는 CM송과 CF들은 어찌나 재밌던지요. 유튜브 프리미엄을 쓰는데요. 이런 광고만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겠더라고요. 여자를 위한 책, 청소년을 위한 책. 유독 책 광고가 많았는데 책을 라디오로 홍보한다는 상황 자체도 낭만적이었어요. 사연을 보낸 이들은 20년 지난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할지 상상해보는 것도 큰 재미였고요.

1992년 11월 2일 첫 방송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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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회차가 남아 있는데 첫날의 방송은 1분 정도만 들을 수 있더라고요. 앞으로의 당찬 포부를 밝힌 신인 아나운서 정은임은 첫 곡으로 한국에 개봉하지 않은 영화지만 <부메랑>의 주제가로 11주째 빌보드 차트 1위를 기록하고 있는 보이즈투맨의 end of the road를 재생합니다. 이건 다른 얘긴데요. 여러분은 일어나야 할 일은 일어난다는 거 믿으세요? 한 주에 한 번, 편지 보낼 주제를 궁리하는 게 제겐 밥반찬 고민하듯 기분 좋게 어려운 고민인데요. 오늘 오전까지만 해도 ‘사랑해요 밀키스’를 생각하고 있었어요. 근데 그냥...안테나가 안 터지는 느낌이랄까요. 그래서 창을 키고 아무것도 못 쓰고 있다가, 문득 정은임의 영화음악을 떠올렸거든요. 근데 34년 전 오늘이 정은임 아나운서가 처음으로 방송을 진행한 날이고 그 방송에서 처음 튼 노래가 제가 보이즈투맨 노래 중 가장 좋아하는 end of the road라는 사실에 보내야 할 편지를 제때 잘 보낸다는 확신이 들었다면 의미 부여가 지나치다고 느끼시려나요. 편지를 쓰려고 오랜 만에 정은임의 영화음악을 듣고 있습니다.

늦었지만 2년 전 제 방 랜선 집들이예요. 커튼 못 쳐서 저러고 살았어요.
늦었지만 2년 전 제 방 랜선 집들이예요. 커튼 못 쳐서 저러고 살았어요.

눈앞에 떠오르는 풍경은 처음, 이 방송을 듣던 프라하 3구 플랫의 모습이에요. 라디에이터를 틀면 얼굴은 쩍쩍 갈라지는 것만 같고 코끝은 시렸는데, 어쩐지 코가 시린 기분도 드네요. 

라디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사랑처럼 들리고

며칠 전에 마주한 해지기 직전 창경궁이에요.
며칠 전에 마주한 해지기 직전 창경궁이에요.

이번 편지를 쓰다 보니 김수영 시인의 <사랑의 변주곡>이 떠오릅니다. 새벽을 밝히는 등대 같던 <정은임의 영화음악>은 아나운서의 아버지에게도 그 시절 씨네필에게도 사랑으로 들리고 사랑이 이어지는 밤 같았을 거 같아서요. 그러고 보니, 주제가 영화음악이라 프로그램 안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사랑이 언급되곤 했어요. 프라하 3구의 외로운 외국인 노동자는 친구가 태어난 날 방송된 정은임의 영화음악을 해당 친구에게 보내주는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하곤 했어요. 1992년과 1995년 사이에 태어난 친구들에게만 줄 수 있는 사랑의 이벤트였달까요. 네가 태어난 날엔 이런 방송이, 이런 광고가 나왔다고 말해주고 싶었어요.

그때도 감동이었는데 편지 쓰려고 다시 찾아보고 또 감동받은 친구의 메시지예요. (이 편지를 보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너른 마음으로 이해해주시길...)
그때도 감동이었는데 편지 쓰려고 다시 찾아보고 또 감동받은 친구의 메시지예요. (이 편지를 보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너른 마음으로 이해해주시길...)

남겨진 사랑이 펄떡펄떡 신선하게 남아주어 20년의 시간을 건너뛰고도 사랑으로 건네졌습니다. 

박찬욱이 영화평론가이자 신인 감독으로 열변을 토하던 그 무렵에 여러분은 어떤 일을 하고 계셨나요. 시간을 돌이키고 싶은 어떤 날이 있다면 해당 일자 <정은임의 영화음악>을 들어보세요. 원하는 만큼의 과거까진 못 가도 오늘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아련한 어느 지점까진 도달하더라고요. 같이 가고 싶은 사람에게 넌지시 그날의 방송 링크를 보내보는 건 어떨까요.

2일의 방송이 1분 남짓이라, 다음 주 편지가 발송될 1992년 11월 10일 자 방송 링크를 남겨둡니다. 우리 다음 주에, 1992년과 2026년 사이 어드메의 좌표에서 다시 만나요! 구독자님의 정든님을 꿈꾸며 오늘은 이만 물러납니다 :) 거기 계셔주셔서 늘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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