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제텔카스텐에서 의도적으로 버려진것의 가치
이글의 시리즈 1부에서 니클라스 루만이 고민했던 노트의 구조에 대한 두가지가 있었습니다.
- 고도로 기술적인 전문화의 길
- 임시로 생성된 무작위성과 정보를 통합하는 방법
루만이 거시적으로 포기했던 고도로 기술적인 전문화의 길, 거대 하이라키를 구성하는 일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관해 설명하고자 합니다.
제텔카스텐의 전문가라고 칭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하이라키라고 하면 그저 폴더구조나 moc의 구조, 하향식 글쓰기를 떠올리고는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하이라키의 가장중요한 본질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이 글에서는 하이라키의 본질에 대해 드러내고자 합니다.
문장의 미시적 구조
텍스트를 이해가능하게 혹은 사용가능하게 번역하는 과정이 있어야,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경험정보와 연결시켜 글을 이해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프로그래밍에서도 이런 기능을 수행하는 친구를 프로그래밍 언어의 번역기로서 컴파일러, 인터프리터라고도 합니다. 번역기를 만드는 과정에는 다음의 세가지 단계를 거치게 됩니다.
- 토크나이저 : 길게 늘어진 텍스트를 한글자 한글자 분해하여 단어같은 토큰의 덩어리로 분리해줍니다.
- 렉서 : 토큰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다른 토큰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의 여부에 따라 토큰의 유형을 분리합니다.
- 파서(중요) : 유형화된 토큰에 따라 순차적으로 추상트리구조(AST)를 만들어줍니다.
조금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 프로그래밍 언어가 사용자의 텍스트를 이해하는 과정을 가져왔습니다.
2 × ( 3 + 4 )
위 수식을 토크나이저를 통해 토큰으로 분리하면 다음처럼 분리하게 됩니다.
"2", "×", "(", "3", "+", "4", ")"
이를 렉서를 통해 각 토큰의 유형을 찾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숫자 "2"
2. 곱셈 연산자 "×"
3. 왼쪽 괄호 "("
4. 숫자 "3"
5. 덧셈 연산자 "+"
6. 숫자 "4"
7. 오른쪽 괄호 ")"
마지막으로 파서가 만들어내는 추상트리구조(AST)를 그림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이 표현됩니다.
트리구조가 나와야 비로서 텍스트 뭉치를 의미론적인 해석이 가능한 데이터로 변환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때 텍스트 뭉치는 비로소 사용가능한 형태로 변환됩니다. 위 수식은 이후 연산 알고리즘에 의해 수식의 문법에 맞는 순서로 계산을 실행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글을 읽고 쓰는 과정에서도 우리의 뇌는 이러한 일을 찰나에 순간에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해냅니다. 다음은 영어의 문장을 각 단어의 형태에 맞는 구조로 파싱한 데이터를 시각화한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문자가 만들어내는 문장 구조를 이해할 줄 알게되면 모든 텍스트에 대해 추상구조화를 이뤄낼 수 있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문장의 거시적 구조
다음 텍스트는 난해하기로 유명한 스피노카의 저서 《에티카》 한 구절입니다.
스피노자의 문장은 어렵기로 정평이 나 있는데, 그 원인은 그 구조가 매우 수학적이기 때문입니다. 수학의 구조는 정의 정리 증명과 같은 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장 상위에 노출된 여러가지의 정의들이 담아내는 개념적 대상들을 토대로 우리가 당연하게 믿고있는 믿음들(공리계)을 논리삼아 개념적 대상의 속성과 관계를 증명해내며 정리를 만들어냅니다. 이를 도식화 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정리 39, 정리 40을 말한다는 것은 해당 정리의 맥락을 규정하는 정의 혹은 정리들이 이미 존재한다는 말이기 때문에 그 이전 문장의 맥락을 살펴야만 합니다. 또한 수학은 위 그림보다 더 많은 계층들이 존재하며 하이라키 구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위의 정리를 온전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제시된 정리와 정리가 만들어내는 구조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이 과정은 각 구성요소마다 독립적으로 구성된 개념적 존재들(정의와 정리들)을 파싱하여 구조체를 만들어내는 과정과 같습니다.
그래서 어려운 말을 잘 이해한다는 말은 그것이 의미를 가질 추상구조체를 내면화하고 있다는 말이며, 이미 어려운 텍스트에 대해 추상구조화 작업을 해봤기 때문에 그 구조적 이해를 토대로 어려운 문장을 해석(파싱)할 수 있다는 말과 동일합니다.
모든 학습은 미시-거시적 파서의 구축과정
모든 학습은 미시적으로든 거시적으로든 추상구조체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으며, 나만의 인터프리터, 파서를 만들어내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교육은 파서를 만들어내는 과정임에도 불구하고, 파싱된 형태를 표현하는데 늘 한계가 있어왔습니다. 우리는 시각화된 사고의 형태를 다이어그램으로 표현하기도 하며, 때때로 그림과 영상을 첨부한 시각화 자료를 통해 그 이해를 돕게 됩니다.
문제는 하이라키의 깊이가 매우 깊은 수학의 경우입니다. 이 깊고 넓은 거대한 구조체를 시각화하는 일은 매우 힘들기 때문에 전체 구조를 드러내는 일은 항상 실패하게 됩니다. 대다수가 수포자가 되는 일의 근원이기도 합니다. 스피노자의 에티카의 문장에서와도 같이 다음 배워야할 정리들을 올바로 이해해내려면 그 이전까지 잘 짜여진 구조체가 학습되어있어야만 온전한 이해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수학학습 성취와 높은 상관성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교수자의 역량에는 수업을 얼마나 잘 구조화시킬 수 있는지에 관한 지표가 있습니다. 교사의 수업 구조화 역량이 뛰어날 수록 학습자들의 학업성취는 비례하여 올라가는건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수학 학습의 지식체계는 거대한 구조체에 있으며, 이를 학습자가 학습과정에서 구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힘이 교수자의 구조적 설계능력이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수학 뿐만이 아닙니다. 수학은 가장 거대하고 깊이있는 구조체를 만들어내지만 다른 모든 학습에서도 저마다의 하이라키계층들이 존재하며, 그것들을 온전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그 지식들을 구조화해내는 작업들이 필요합니다. 학습은 근본적으로 해당 학문 분야의 언어를 의미론적으로 해석할 수 있게 해주는 도구, 파서를 만드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들뢰즈가 보는 제텔카스텐과, 그 활용성의 한계에 관하여
하이라키를 구성하는 능력은 학습능력 그 자체임과 동시에, 학습된 하이라키는 문제해결 전략의 중추이기도 합니다. 고도로 발달한 하이라키가 만들어내는 정보는 그 깊이가 매우 깊으며,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이를 매우 얕은 하이라키들 혹은 1차 연결들의 클러스터링으로 온전히 표현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때문에 제텔카스텐만으로 어떤 구조적 정보를 다루려고 한다면, 커버할 수 있는 능력은 제텔카스텐에 의해서가 아닌, 온전히 사용자의 뇌에 의존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제텔카스텐은 의도적으로 하이라키가 제거되었습니다. 반면 모든것을 평면상에 올려놓고 네트워크망에 연결시켜냅니다. 이런 구조를 들뢰즈는 《천개의 고원》에서 리좀구조라고 부르며, 그 가치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들뢰즈는 기존 의미의 해체, 기존 하이라키의 해체를 탈영토화, 탈지층화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들뢰즈의 기획은 의도적으로 해체함으로서 이전의 지식구조에서 볼 수 없었던 전혀 새로운 의미를 생성해내는데, 그 의의가 있습니다. 따라서 제텔카스텐은 학습시스템이 아니라 미지의 땅을 끊임없이 탐색해가는 모험적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텔카스텐은 세컨드 브레인이라는 통칭에 걸맞지 않게 하이라키적인 모든 구조적 작업을 퍼스트 브레인에게 위임하고 있으며, 노트구조의 단위에서 온전히 처리되지 않습니다. 제텔카스텐을 통해 거대구조체의 학문을 관리해서 얻는 이득은 대단할 수 없습니다. 이 때문에 학문적으로, 혹은 기업의 지식을 관리하는데도 큰 이점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기존의 구조를 지켜내면서 동시에 정교화시켜나가야 하는 고도로 기술적인 전문화의 길 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이진경선생님의 《천개의 고원》의 해설서의 제목이 노마디즘입니다. 노마디즘은 유목주의를 말합니다. 제텔카스텐은 근본적으로 우리를 학습 유목민으로 만들어내는 시스템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유목민이란 무엇일까요?
유목민의 삶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의 삶은 언제나 한 지역에 머무를 수 없는 삶을 살아갑니다. 늘 푸른대지를 찾아내 키우는 양들을 배불리 먹이고, 자연을 채집하며 삶을 살아갑니다. 그렇게 1차적인 관계가 종료되면 생을 연장시킬 다음의 대지를 찾아나가야만 합니다.
반면 정착민의 하이라키적 삶은 대지의 한 구획 위에서 수많은 관계를 중첩시켜나가고 잉여자원을 축적하고 시스템을 계층적으로 끊임없이 고도화해나갑니다. 그래서 영토의 변경은 스스로의 구조를 해체하는 일과 같기 때문에 토지에 깊게 뿌리를 내린채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이미 정착민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이라키의 힘과 가치를 이미 경험해냈습니다. 제텔카스텐이 생성해내는 흥미로운 의미들이 우리의 도파민을 자극해내지만, 그것들이 고전적 하이라키의 거대한 성과들과 어깨를 견줄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다루는 연결의 뎁스가 형편없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제텔카스텐으로 어떤 새로운 맥락과 의미를 발견해냈다면, 제텔카스텐 외부에서 퍼스트 브레인을 사용하여 하이라키적으로 고도화해나가는 크나큰 숙제가 주어지게 됩니다.
제텔카스텐 또한 그 의미를 더더욱 발견해내기 위해 더욱 더 많은 재료들을 포획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제텔카스텐 위에서 얕고 넓은 지식을 응용하는 다식한 제너럴리스트를 만들어냅니다. 만약 스페셜리스트가 되고싶은 사용자라면, 제텔카스텐의 사용을 근본적으로 다시생각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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