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끔 생각했다. 돌멩이 하나가 이리저리 굴러다니다 어딘가에 머물렀을 때, 돌멩이는 모르지만 돌멩이로 퍼즐을 완성하는 존재는 알았다. 완벽한 마지막 퍼즐 조각이었음을. 나의 실존의 이유는 명확했다. 쓸모 있는 사람이 되는 것.
평생, 필요한 퍼즐 조각이 되고 싶은 갈망으로 가득했다. 이것이 무엇으로부터 기인한 것인지 글을 통해 소개했지만, 그렇게 어느 한곳에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존재가 되고 싶었나 보다. 가끔은 필요한 존재가 아니어도, 존재 자체에 무게를 두며 살고 싶다는 생각도 하곤 한다. 그럴 때마다 니체의 말을 떠올렸다. ‘실존은 평생 끔찍한 짐이었다’ 니체가 질병으로 인해 벼랑 끝에 섰을 때 했던 말이다. 이 한 문장이 떠오르면 이내 영문도 모를 사정없는 눈물 줄기가 앞을 가렸다. 그는 고통과 절망 중에도 삶의 짐을 벗지 않기 위해 하루 8시간씩 산책하며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나도 존재가 무거워질 때면 걸으며 그 시간을 버텨본다.
그는 평화롭고 단순한 삶이 행복한 삶이라고 믿었던 아버지와는 다르게, 고통 중 환영을 보는 순간에도 정신의 끝을 부여잡았다.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은 그 고통의 무게에 눌려 살 길을 찾게 되는데 편안해지는 삶을 끝없이 갈망한다. 나 역시 다르지 않았다. 죽음의 터널을 넘나드는 중에 오히려 철학을 얻었다는 그의 고백록 같은 격언들은 나에게 큰 모본이 되었다. 내가 살고 싶은 삶의 방향성이 틀린 것이 아니라, 단지 다른 모양을 가진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기도 했다.
나는 원 밖에 있는 큰 네모다.
내가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지 거울에 비춰야만 알 수 있다. 하지만 거울은 그저 내 겉모습만 보여줄 뿐이다. 내 가치관과 정서는 거울에 비출 수 없다. 그러다 선물 같은 기회로 쓰.뱉을 만나 글을 쓰게 되면서 내 모양이 어떤 모양인지 비로소 알게 됐다. 처음에 내 모양이 세상이 원하는 동그라미가 아님을 깨닫고 원 밖, 네모로 살았던 지난날을 떠올렸다. 모두 동그라미로 살아야 하는 세상에서 다른 모양을 가진 사람들은 동그라미가 되기 위해 사회 공장에 들어간다. 공장에서 깎이고 부풀려지고 다듬어서 마침내 원하는 동그라미를 생산해낸다. 동그라미가 되기 위한 첫 번째 단계는 원 안에 들어가는 것인데 동그라미보다 크면 물리적으로 첫 번째 단계부터 이뤄지지 않는다. 여타 원보다 작은 모양들에 비해 더 쉽지 않다. 질병과 가정환경이 네모를 형상화하기라도 하듯, 내가 세상을 사는 건 더 녹록지 않은 삶일 수밖에 없었나보다 핑계를 삼아본다.
생각해 보면 아웃사이더로 사는 삶도 퍽 괜찮았을 것 같다. 지난 삶을 돌아보면 원 안에 맞추는 삶을 위해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 속, 나도 발견됐다. 맞지도 않는 원 안에 꼬깃꼬깃 욱여넣어 구겨진 나를 보는 것이 일반이었다. 개인의 특성을 존중하기보다는 민족주의적 공동체로서의 일상을 살아야만 하는, 사회적 기조를 거스를 수 없었다. 그러느라 내가 원하는 게 뭔지 내면에 제대로 귀를 기울이지 못한 채로 시간만 흘러갔다.
지금도 그 풍조는 여전하나 이젠 너무 구겨지고 싶지는 않다. 가끔은 원 안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기도 한다. 두렵더라도 아웃사이더로 홀로 밖에 존재하게 두기도 한다. 하지만 원 안에 들어가지 않고서도 사람들과 함께할 방법을 찾고 싶었다.
내 삶의 캔버스엔 점 하나를 그리고 지나간 많은 사람이 존재했다. 예쁜 그림의 구심점이 되는 꽤 중요한 점 하나를 남긴 소중한 사람부터, 그리고 싶지 않은 점을 남기고 상처마저 남긴 사람까지 다양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흩어진 점들을 이으니 '나'라는 그림이 완성됐다. 그러니 나를 힘들게 한 그 사람도 용서의 카테고리에 넣지 못 할 이유가 없다. 그들의 흔적이 모여 내가 만들어졌다. 그중에 하나라도 연결되지 않으면 온전한 내가 되지 않는다는 명백한 사실 앞에서 그들을 인정해야 했다.
풍경화를 그릴 때 색을 쓰는 비결이 있다. 눈으로 보이는 색은 단순히 초록색이지만, 색을 자연에 가깝게 표현하려면 빛과 어둠이 잘 나타나야 한다. 빛은 노랑이나 붉은 계열의 색을 섞어서 표현하고 어둠은 검정 계열에 다른 색을 섞어 표현한다. 그래야 자연스러운 자연의 색이 표현된다. 그 자연스러움에는 빛이 존재하는데 색은 결국 빛을 타고 우리 눈에 비추어 색을 이루기 때문이다. 자연조차 어떤 색이든 차별하지 않고, 합치면 멋진 그림이 되어 줬다. 보이는 색이 다가 아니다. 그 이면에 감춰진 보이지 않는 것까지 모두 색이었고 그림을 이루었다.
이 아름다운 인생의 풍경화를 잘 그려내고 싶어 시작된 8주간의 글쓰기는 나의 존재와 쓸모를 새롭게 발견하게 했다. 나를 알아갈수록 궁금해지고 타인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싶은 소망에 사로잡혔다. 인간의 무용(無用)에 집착하던 나는 존재에 의미를 두는 방향으로 돌아섰다. 무엇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을 딛고 기꺼이 감사하는 매일의 삶을 역동적으로 살고 싶어졌다.
내 글이 결코 가볍지 않아 독자들의 마음이 그늘지지는 않았을까 아직도 여전히 아쉽고 모호한 지점들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어딘가 살아갈 힘이 꼭 필요한 분들에게 길이 될 수 있다면 소망하며 글을 마쳤다. 자신이 어떤 모양인지 알게 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 모양대로 기어코 살아내면서도 사람들과 잘 지낼 방법, 나아가 사람을 사랑할 비법을 발견하게 되길 바랐다. 그 일은 아직 현재 진행형에 있다. 무엇보다 글 쓰는 동안, 싸부님 말씀처럼 품위 있는 관종이 돼보기도 했다. 가까운 분들에게 나의 얘기를 용기 있게 글로 말할 수 있는 과감한 사람이 되어 본 거다. 나를 아끼는 분이 글을 읽고 말했다. "글을 읽고 모든 이치를 꿰뚫는 통찰력은 시선에서 오는 법인데 좋은 시선을 가진 자는 좋은 글을 쓰게 되는 것 같다. 많은 사람이 글을 보기를 바라지만 소수라도 정말 살아갈 힘이 필요한 분들에게 힘이 되는 글이다."라고 말해주셨다. 이런 피드백을 들을 때마다 글에 대한 명분도 하나씩 더해지며 글 쓸 용기가 솟구쳤다.
앞으로 쓰는 글엔 존재의 이유, 존재의 무게, 존재의 인식, 존재의 지향, 존재의 완성에 방향성을 두고 갈 생각이다. 사랑학 개론(달콤한 사랑)에서 죽음학 개론(삶은 죽음의 완성)까지, 드라마와 삶을 통해 엿보는 흥미롭고 위로 가득한 이야기가 펼쳐질 예정이다. 글 밥의 홍수에도 애정 담아 제 글을 성실히 읽어주신 독자에게 사랑 가득 마음 담아 부탁 드린다. 자신의 모양을 찾으며 삶을 가치롭게 완주할 방법, 앞으로의 글을 통해 함께 만들어 보고 싶다고. 그러니 지금처럼 지켜봐 달라고.
Thanks to.
‘쓰.뱉’이라는 글쓰기 공동체를 설립하고 개척했으며 초대해 주신 김싸부님, 감사합니다. 글쓰기의 문턱을 닳도록 넘나들 수 있게 해주신 덕분에 글을 읽는 사람에서 마침내, 쓰는 사람으로 진화할 수 있었습니다. 수많은 고비들이 있었지만 싸부님의 촌철살인과 같은 디렉팅으로 완주할 수 있었습니다.
함께 해주신 쓰.뱉의 동기인 풀꽃 향기가 은은하게 날 것만 같은 ‘서꽃’님, 글 쓸 때뿐만 아니라 아플 때, 마음이 힘들 때조차 힘이 되어주시고 위로해 주셔서 이곳에 다다를 수 있었습니다. 좋은 사람은 좋은 글로 표현된다는 말을 몸소 보여주신 표상이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밝고 선한 마음으로 칭찬을 마구마구 실타래 뽑듯 뽑아주신 '영심이'님, 제게 주신 과분한 칭찬 감사했습니다. 글쓰기 동무로, 좋은 사람을 만나 선물 같은 시간을 누렸습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글로 증명하며 또 삶으로 살아내신 '진진'님, 그 따뜻함과 사랑을 배울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그 삶, 응원하고 존경합니다.
우리 기수 중 가장 사랑스러운 '푸실'님, 이렇게 밝고 따뜻하고 성실하고 예쁘고 글 잘 쓰는 사기캐를 어디서 만날 수 있단 말인가요? 푸실님의 재능과 가능성을 응원하며 저는 계속 배가 아프겠습니다. (저를 배 아프게 한 유일한 사람! 다음 세대에 대한 무한 사랑을 약속한 저로서는 푸실님의 재능과 성품에 어울리는 가장 좋은 말로 칭찬을 드리고 싶었어요. 그래서 선택한 문장이 ‘배가 아프다’ 였답니다. )
모두 좋은 글로 서로에게 귀감이 되어주고, 글이 정말 안 써지는 순간에도 힘이 되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덕분에 여기까지 왔습니다.
인생의 버킷리스트를 이루기까지 많은 수고와 인내, 그리고 언제나 사랑과 희생이 뒤따른다는 것을 알게 해준 가족, 고맙고 사랑합니다. 덕분에 나는 또 하나의 꿈을 열어두었습니다.
나에게 다정함을 선물해 준 키다리 아저씨들(이 이성들은 반드시 남자 친구나 사랑하는 사람을 일컫지는 않습니다. ex. 셋째 삼촌, 넷째 삼촌, 옆집 오빠님, 김00님, 장00님, 0목사님)께 저의 글 일부를 바칩니다.
쏟아지는 책의 홍수 속에 책 벌레인 저도 글을 가려 읽기 때문에 한 편의 글을 읽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압니다. 무엇보다 글 밥이 적지 않은 글을 읽어주신 독자 분들께 심심한 감사를 고합니다. 읽어주신 것도 감사한데 정성스러운 코멘트까지 많이 고맙습니다. 덕분에 잦은 지병 중에도 쓸 수 있었고 고통의 문턱을 넘나들면서도 결국엔 글을 탄생 시키는 일을 마다하지 않을 수 있었답니다. 많은 고비를 함께한 사람과는 특별한 사이로 남는 다지요? 글의 고비마다 함께해주신 독자 분들과 어느덧 특별한 사이가 된 것 같아 무척 고무됩니다.
마지막으로 이 글을 내기까지 보이지 않게 기도해주시고 응원해 주신 목사님과 사모님, 벗으로 함께해 주심에 늘 감사하고 힘이 되었습니다. 가족을 제외한 타인 중, 아마 가장 기뻐해 주실 분이라 영광을 함께 나눕니다. 수많은 눈물과 기쁨의 추억 속 앨범에 두 분이 계십니다.
저자소개
필명: 인사피어(INSIGHT+INSPIRE)
_통찰로 격려하는 삶이 꿈이다
sns그림 작가, 종이 공예와 예쁜 글씨 쓰는 사람. 피아노 반주 봉사하는 사람. 천상 예술인 이지만 글쓰기 공동체 '쓰고뱉다'를 만나면서 내 안에 끝 모를 진지함과 은근한 다정함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고민하기 시작했다. 내가 궁금해지고 나를 알게 될수록 점점 시선은 타인에게로 향했다. 나의 얘기로도 타인과 닿을 수 있다는 글쓰기는 이제 숙명과도 같은 만남이라고 생각된다. 나의 존재의 이유가 설명되고 타인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될 날을 꿈꾸며 오늘도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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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빌
어둠까지도 아름다운 풍경화의 요소가 된다니 다시 힘을 내어야겠다는 도전을 받습니다. 아웃사이더로 살면서 이젠 그만 할 때가 됐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에필로그를 통해 큰 힘을 얻습니다. 앞으로의 여정을 응원합니다.
인사피어
그 부분을 포착하신 세빌님을 마음가득 응원합니다. 빛과 그림자는 늘 함께 가는것 같아요. 그 점이 늘 아프지만 아름다운 인생의 풍경화가 되어준다니 꽤 참을만 한 것도 같고요. 제 글을 통해 힘을 얻으셨다니 저는 그 부분이 가장 기쁩니다. 세빌님 덕분에 제가 써야할 부분과 아직 남겨둬야할 영역까지 조절할 수 있었어요. 늘 고민하며 갈 수 있게 마음 나눠주심에 감사드려요!ლ(╹◡╹ლ) 앞으로도 글에서 봬요(ღ◕ܫ◕ღ) 저도 세빌님, 응원 가득 드립니다 화이팅 ୧( “̮ )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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