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와 와인 한잔

성숙이라는 아름다움을 향하여: 와인과 숙성

[그대와 와인 한잔] by 서로서로

2024.01.11 | 조회 2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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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뱉다와 함께 하는 오늘의 글 한잔

당신의 존재의 온도를 딱 1도 높여주는 그런 글 한잔이 되길 바라며 -

샤또 까농 라 가펠리에르 1988년 빈티지
샤또 까농 라 가펠리에르 1988년 빈티지

 

자신의 이야기를 천천히 들려주는 와인을 좋아한다. 그래서 시간을 두고 천천히 마시는 걸 좋아한다. 와인은 오픈했을 때의 처음 모습과 중간 그리고 끝의 모습이 달라진다

   와인은 책과 같다. 와인을 여는 순간 이야기는 시작 된다. 책을 펼치자마자 나 이런 사람이야 존재감을 들어내는 와인도 있고 수줍은 듯 천천히 모습을 보여주기는 와인도 있다. 이야기의 절정에 다다랐을 때는 황홀함에 푹 빠져 감동이 밀려온다. 여정의 끝에는 여운이 맴돌아 추억이 된다. 와인과 함께 했을 때의 시간, 장소, , , 감정들은 좋은 기억으로 남아 그때의 이야기가 문뜩문뜩 떠오르곤 한다.

   샤또 까농 라 가펠리에르 1988년 빈티지를 마셨을 때의 기억이다. 아내 생일을 맞아 특별한 와인을 고르고 싶었다. 나의 선택은 아내의 나이와 같은 34년 숙성 된 1988년 생년빈티지로 정했다. 이렇게 오래 된 와인은 처음이라 기대가 된다. 긴 숙성을 거친 와인은 어떤 맛과 향이 있을까. 이 와인은 오랜 시간을 걸쳐 얼마나 성숙 했을까.

   하지만 한편으론 걱정이 되었다. 와인에는 시음적기가 있기 때문이다. 무조건 오래 된 와인이 좋은 게 아니다. 시음적기를 지난 와인은 맛과 향이 다 죽어버린다. 전문가들은 이 와인의 시음적기를 1993년부터 2004년까지로 보았다. 이런, 지금은 2022년도다. 시음적기가 지나도 한참 지났다. 그래도 기대를 해본다. 보관상태가 좋은 병을 구했고 RP의 보르도 2등급(세계적인 와인 평론가 Robert Parker가 정한 보르도 등급, 1~5등급이 있다)의 좋은 품질의 와인이기 때문이다

   저녁시간 기대 반 걱정 반 와인을 오픈했다. 오랜 시간 숙성으로 인한 침전물을 거르기 위해서 디캔팅을 했다. 보르도 와인 잔에 와인을 한 잔 따랐다. 잔에서부터 마른 장미꽃 향이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다행이다. 역시 잘 관리 된 와인 이였다. 드디어 테스팅. 입에 한 모금. 눈을 감고 집중한다. “~ 좋다.” 살아있다. 분명 시음적기가 지난 와인인데 아름다운 30대 여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우아한 와인이다. 맛과 향을 강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은은하게 잔잔히 피어오른다. 은은하다고 해서 흐릿한 게 아니다. 선명하게 자신의 향을 나타 낼 줄 안다. 강하지 않게 부드럽고 고요하게 자신의 아름다움을 피어낸다. 아름다운 여성이다. 34년의 시간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세월을 거쳐 품위 있고 기품 있는 여성이 내 앞에 있다. 여전히 생동감 있는 과실 향과 부드러운 탄닌, 보르도 특유의 가죽향이 고급스러움을 더 한다. 오랜 시간의 숙성을 통하여 우아한 여인이 되었다

   하지만 두 번의 반전이 일어났다. 갑자기 30대 여인에서 70대 여인으로 바뀌었다. 3시간이 지나면서 와인이 꺾이기 시작했다. 산도와 알콜이 튀었다. 보통 좋은 와인은 더 오랜 시간 동안 좋은 모습을 보여준다. 벌써 꺾이기 시작하다니 아쉬웠다. 시음적기가 지나서일까 싶었다. 생기 있는 과실 향은 사라지고 가을의 낙엽향이 났다

   두 번째 반전은 보통 꺾이기 시작하면 맛이 확 떨어지는데 이 와인은 달랐다. 역시 RP의 보르도 2등급다웠다. 살짝 산도가 올라가고 알콜 맛이 났지만 거기서 멈추고 여전히 기품 있는 맛과 향을 유지했다. 오래된 와인이지만, 여전히 우아함과 아름다움을 잃지 않았다. 70대 여성의 기품이 보였다. 가을창가 옆 의자에 앉아 있는 여유롭고 인자한 미소를 지닌 여인의 모습이다

   그렇다. 와인을 오픈하고 3시간동안 70대여성이 자신의 젊은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준 것이다. 자신의 젊은 시절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자신감이 가득한 싱그러운 여인. 부드러운 머릿결처럼 우아한 기품. 봄 향기 가득 찼던 시절. 가을창가 옆 의자에 앉아 3시간 동안 신나게 자신의 젊은 시절 이야기를 하는 한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지금은 황혼으로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지혜롭고 아름다운 여인이다

   나이 듦이란 성숙, 아름다움의 또 다른 표현이다. 먼 훗날 이 여인과 같은 모습이 되었으면 좋겠다. 자신을 잘 가꾸어서 성숙 된 아름다움에 다다르면 좋겠다. 샤또 까농 라 가플리에르 1988년 빈티지, 잘 숙성 된 와인이다. 아내 생일에 완벽한 페어링 이였다. 아내를 닮은 와인. 먼 훗날 아내의 모습을 그려본다

   사실, 이 날 아내는 한잔도 다 안 마셨다. 자기 스타일이 아니란다. 이런, 아내에게는 실패한 와인 페어링이다. 1988년 빈티지 구하는 게 쉬운 게 아닌데. 힘들게 찾아 온 건데. 내 마음도 몰라주고. 아니다. 내가 아내 마음을 몰라준 것 일 수 도 있겠다. “다음에는 잘 준비 하겠습니다.” 결국 나 혼자 감상하고 감성에 젖은 날이다.

 

[저자 소개]

1년간 1억을 쓰며 집에서 와인을 즐기고 있는 와인러버. 어두운 저녁 와인과 대화를 나누는 이상한 사람. 와인의 매력에 빠져 논문과 서적을 들쑤시고 다니는 괴짜. 한때는 신학, 정신의학, 경제에 빠져 있다가 와인에서 이 세가지를 발견하고 ‘유레카’를 외쳤다. 

아름다운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신, 사람, 세상의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와인도 똑같았다. 아름다운 와인이 되기 위해서는 천(天), 지(地), 인(人)의 조화가 필요하다. 그대와 와인을 마시면서 천, 지, 인을 나누고 싶다. 

[쓰고뱉다]

글쓰기 모임 <쓰고뱉다>는 함께 모여 쓰는, 같이의 가치를 추구하는 글쓰기 공동체입니다. 개인의 존재를 가장 잘 표현해 줄 수 있는 닉네임을 정하고, 거기서 나오는 존재의 언어로 소통하는 글쓰기를 하다 보면 누구나 글쓰기를 잘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걸어왔고, 걸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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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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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쓰니신나

    0
    10 months 전

    숙성된 와인에서 성숙한 여인의 모습을 떠올리시다니, 정말 놀랍네요^^ 아내의 불만족에 속상할 수도 있었을 텐데, 다음에 더 잘 준비하겠다는 다짐으로 성숙된 남편의 모습을 보여주시네요. 절로 흐뭇 ㅎㅎㅎ 오늘도 멋진 와인글 한잔이었습니다!

    ㄴ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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