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형(MBTI 성향 중 J) 인간인 나는 하루를 쪼개고 쪼갠다. 시계를 보지 않고 있을 때도 대충 지금이 몇 시 몇 분쯤 됐을지 짐작할 수 있다. 가끔 장난삼아 친구와 테스트를 해보기도 하는데 분 단위까지 맞출 때면 스스로도 소름이 돋는다. 배꼽시계처럼 신체 시계가 가동되고 있는 거냐고? 아니다. 항상 계획 속에 살아가고 있기에 시간을 남들보다 더 자주 확인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루 24시간 중 자유롭게 보낼 수 있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회사에 다녔을 때를 생각해 봤다. 기상 후 잠에서 깨어나기까지 침대에서 뒹구는 시간 10분. 출근길 지하철에 몸을 싣는 시간 30분. 점심 식사 후 혼자 조용히 책상 앞에 앉아 있을 수 있는 시간 10분. 퇴근길 또다시 지하철에서 무언가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 30분. 저녁 식사 후 부지런히 운동까지 하고 나면 9시 뉴스 할 시간. 다 더해보면 고작 4시간 정도나 될까.
그렇게 소중히 남겨진 4시간을 무엇을 하고 보냈을까? 항상 배워야 하고 성장해야 한다는 강박 속에 살았던 나는 그 시간을 늘 영어 공부와 독서로 계획했다. 하지만 눈을 뜨자마자 침대 위에서, 콩나물시루 같은 출근길에서, 점심도 먹었겠다 배도 부르고 몸이 무거워지기 시작하는 점심 식사 후 책상 앞에서, 각을 잡고 책을 펴는 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었다. 구독한 영어 콘텐츠는 매일 쌓여만 갔고 야심차게 주문했던 책들은 책장만 축내고 있었다.
가끔 정신을 차리고 다시 건강한 루틴을 잡아보자며 다이어리를 펴들 때면 가장 먼저 아이폰의 스크린 타임 기록을 확인했다. 증발한 4시간을 찾을 수 있는 시간. 메신저 앱 사용 시간과 소셜 미디어 사용 시간, 그리고 뭘 검색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검색을 하며 보낸 시간이 아주 공평하게 소진되어 있었다. 스크린 타임으로도 추적되지 않는 시간을 복기해 보면, 의식의 흐름에 따라 닿게 된 드라마나 영화를 보거나 밀린 잠을 잤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니 안심하고는 지켜지지 않을 계획을 다시 또 세웠다. 출근길 영어 공부하기, 퇴근 후 책 읽기, 주말에는 직무능력 향상을 위한 워크숍 참여하기. 반복, 또 반복. 작심삼일도 계속하면 되는 게 아니냐며 스스로를 위로하며 실패한 나를 타박하지 않고 성공할 미래의 내 모습을 상상했다. 전제: 일단 오늘까지는 놀고.
백수가 되니 일을 하는 데 썼던 8시간이 보너스처럼 주어졌다. 월급과 맞바꾼 것이지만 마치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일단 해야 하는 일들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들로 흥청망청 써 보기로 했다. 대부분의 시간을 그림이나 공연, 영화를 보러 다녔다. 동시에 그동안 서로 시간을 맞추기 힘들어 보지 못했던 지인들을 찾아가 만났다. 그리고 나선 태릉 선수촌에 들어간 것처럼 운동을 시작했다. 필라테스가 끝나면 도파민에 취해 유산소를 하러 곧바로 동네 둘레길로 달려갔다.
좋아하는 데 시간을 쓰다 보니 좋은 에너지가 쌓이고 조금씩 나의 재질이 달라지는 것 같았다. 무언가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고 싶었던 일들로 가득 채워진 일상에서 청개구리처럼 피해만 다녔던 과거의 계획들로 시선이 향했다. 그때는 왜 그렇게 싫고 왜 그렇게 하기가 힘들었을까를 생각하다 ‘동기(動機)’라는 단어를 찾아냈다. 어떤 행동을 일으키게 하는 내적 요인, 동기가 바뀌어 가고 있었다.
시간 강박에 쫓겨 초, 분을 다투는 삶 속에서 나를 성장하게 하는 계획이란 나에게 맞는 것, 나에게 필요한 것이기보다는 남들이 하는 대로 따라 하는 것에 가까웠다. 그 동기는 이 지긋지긋한 회사에서 탈출하는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한 동기로 계획하고 시도한 일들에는 부정적인 감정들이 먼저 녹아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거기에다 안주해도 본전이라는 달콤한 유혹에 매번 타협하기가 가장 쉬웠다.
나는 여전히 계획한다. 하지만 계획의 내용이 조금 달라졌다. 남들을, 유행을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고유성을 강화하기 위한 것들로 말이다. 승진이나 이직을 위한 영어 공부는 영어 콘텐츠를 통해 내가 좋아하는 분야의 추세를 파악하는 시간으로 바뀌었다. 직무를 위해 꾸역꾸역 해 왔던 독서는 그동안 손대지 못했던 고전으로 향했다. 고전은 나의 세계관을 넓혀 더 넓은 시야를 가진 넉넉한 사람이 되게 해 줄 것이다. 그리고 오랫동안 쓰지 못했던, 글을 쓰기 시작했다.
우연히 마주친 완벽주의자들을 위한 책, 『오늘도 시작하지 못하는 당신을 위해』의 문장들이 떠오른다. 고성과자들은 평가나 결과에 연연하기보다 과정 자체에 집중해 좋은 결과로 한 발짝 다가선다고 한다. 맞다. 완벽한 계획이 흐트러져 흠집이 나면 그냥 계획을 엎어버리곤 했다. 계획을 완벽히 이루어내려는 강박에 지배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얼마나 많은 과정을 놓쳐왔을까. 닿을 수 없는 ‘완벽’보다 닿을 수 있는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시간을 지배하는 방법이 아닐까.
아침 7시 30분. 단잠을 요란하게 깨우는 모닝콜을 재웠다. 어제부터 시작된 두통이 아침이 되어서도 영 가시지 않아 잠을 조금 더 자기로 했다. 괜찮아. 어제 세워 둔 계획보다 두 시간 더 늦게 운동화를 신고 공원으로 나섰다. 괜찮아. 두 시간 더 늦게 노트북을 들고 카페에 들어갔다. 괜찮아. 오늘은 두 시간 덜 놀다 자면 되지. 뭐 어때. 디카페인 아메리카노 한 잔 주세요, 생크림 카스텔라도요.
[저자소개]
필명 따티제. 풀어서 말하면 따뜻한 인티제(MBTI 성향 중 INTJ의 별칭). 서울 올림픽 기억 안나는 87년생. 흔한 K장녀. 혼자 다 해야 하는 작은 외국계 기업 1인 마케터로 본능을 거스르고 알잘딱깔센(알아서 잘 딱 깔끔하고 센스있게) 강제장착. 아무거나 안 하는 고집쟁이 프리랜서 도전 중. 밥먹듯이 밤새는 수학강사의 아내. 쓰고뱉다 21기(대한민국 No.1 글쓰기 강좌)에서 글 배우는 중. 정리되지 않은 누군가의 마음 속 이야기를 대신 해주는 듯, 읽으면서 시원해지는 글을 쓰려는 중. 오후 늦게 일을 시작한 포도원 일꾼들에게도 일찍 일을 시작한 이들에게와 같은 품삯을 주는 사회적기업 대표가 되는 꿈 꾸는 중.
[쓰고뱉다]
글쓰기 모임 <쓰고뱉다>는 함께 모여 쓰는, 같이의 가치를 추구하는 글쓰기 공동체입니다. 개인의 존재를 가장 잘 표현해 줄 수 있는 닉네임을 정하고, 거기서 나오는 존재의 언어로 소통하는 글쓰기를 하다 보면 누구나 글쓰기를 잘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걸어왔고, 걸어가고 있습니다. 뉴스레터로 발송되는 글은 <쓰고뱉다> 숙성반 분들의 글입니다. 오늘 읽으신 글 한잔이 마음의 온도를 1도 정도 높여주는 데 도움이 되셨다면 아래 ‘댓글 보러 가기’를 통해 본문 링크에 접속하여 ‘커피 보내기’ 기능으로 구독료를 지불해 주신다면 더욱더 좋은 뉴스레터를 만드는 데 활용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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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니신나
시간에 쫓기는 자가 아니라 시간을 지배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완벽이 아닌 완성을 목표로 해야하는군요! 명심하겠습니다^^ 저는 카페인 커피를 마셔도 잠 자는데 무리가 없으니 라떼 한잔 할게요~^♡^
따티제
마지막 문장에 적은 디카페인 커피의 의미를 정말 깨알같이 캐치해주신 우리 쓰니신나님 :) 다음에 라떼 같이 마셔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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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로리
내 마음에 완벽이 자리잡으려 할 때마다 꺼내어 읽어보고 싶은글...! 이전 회사생활 할 때도 생각나고 오늘의 나도 돌아보게되고, 내마음을 대변해 주는것같아서 또 현대인을 이해해 주는것 같아서 너무 좋다!
따티제
이렇게 쓴 글이 자기 합리화가 되지 않기를 바라며ㅋㅋ 오늘도 나는 늦은 하루를 시작했어ㅠㅠ 그래도 그냥 다 접고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는 우리의 이 발걸음 자체가 귀한 것이겠지? :) 기다려주고 댓글 달아줘서 고마워 내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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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쁜오늘
8시간을 보너스로 받은 따티제님~ 시간을 그렇게 쪼개어 쓰시는 분이라니~~~ 하루를 오롯이 만나고 싶어지네오. 따티제님과 함께라면 제아무리 p로 꽉찬 저라도 계획된 하루를 보낼 수 있을것 깉은데요^^ 함께 아메리카노+생크림카스테라 하실래요?!!
따티제
쪼개어 쓰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쪼개어 쓰기를 계획하는 사람이라고 해둘게요ㅎㅎㅎ 저보다 더 꽉차고 알차게 살고 계시다는거, 저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 아메리카노+생크림카스테라X10000 원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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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피어
완벽주의가 아니라고 아무리 우겨봐도 모든 일에서 생각에서 생활패턴에서 이미 증명되고 있는 저를 봅니다. 모르는새 지쳐가는 제게 일침을 주셔서 감사해요! 참 고마운 글입니다.(ღ◕ܫ◕ღ) 따티제님~! 만약 인연이 닿는다면 생크림 카스테라 제가 사드리고 싶네요!!! 글의 위력! 멋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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