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애쓰지 않는__나의 초록일기

싹 틔우기____땅도 사람도 싹을 틔우는 시간

[너무 애쓰지 않는__나의 초록일기] by 참 좋다

2024.01.26 | 조회 9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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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로메인 상추, 백오이, 마디호박 씨앗. / 사진: 참 좋다
왼쪽부터 로메인 상추, 백오이, 마디호박 씨앗. / 사진: 참 좋다

 

세상의 모든 생명들은 주어진 하루를 성실하게 살아간다. 자연을 곁에 둔 나의 터전은 그것을 알아채기에 참 좋은 곳이다. 그중에서도 생명의 기운이 움트는 계절, 이른 봄만큼 설레는 시기는 없다. 왜 봄이 아닌 이른 봄일까. 시골의 이른 봄은 외투는 여전히 두텁지만 잠들었던 모든 것이 깨어나는 시작점이기 때문일 테다.

   이른 봄의 장날은 생명력으로 가득하다. 마음으로 몸으로 생명을 일구는 농부들은 한 해 농사에 필요한 농기구나 물품, 봄 농사에 쓸 모종이나 씨앗을 사러 장에 나온다. 사계절 중 농사의 시작을 엿볼 수 있는 이른 봄의 장 구경을 나는 가장 좋아한다. 아니 좋아할 수밖에 없다. 이때 장에 들어서면 무얼 사지 않아도, 장날 풍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기분 좋고 싱그럽다고 해야 할까.

   매년 이른 봄이면 장이 선 시장 모퉁이에 나무 모종을 한 트럭 싣고 와 파는 아저씨가 있다. 그 트럭을 볼 때면 아, 이제 봄이다 싶다. 트럭 앞을 지날 때면 꽃나무며 사과나무, 감나무 등 쇼핑몰에서 어떤 옷이 어울리나 거울에 대 보듯 많은 종류의 나무 중 우리 집 밭에, 마당에 어떤 나무가 어울릴지 필요할지 상상해보곤 한다. 그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이곳에서 맞은 첫 봄엔 가격표 대신 ‘무화과’라고 쓰여있는 투박한 이름표가 걸려있는 나무 한 그루를 사 심었다.

   트럭이 서 있는 길 건너엔 가장 좋아하는 가게인 부흥농약사가 있다. 농약사는 참 재미난 곳이다. 말만 농약사지 때마다 제 주인을 기다리는 모종들이 대기 중인 모종판을, 각 잡고 줄줄이 세워두곤 쉴 새 없이 지폐가 오가며 한 판씩 해치운다. 그뿐만이 아니다. 쥐약, 지네약, 각종 벌레를 때려잡는 온갖 해충약들에 대해 상담받으면 문제가 금방이라도 해결될 것 같은 약을 검정봉다리에 넣어 내민다.

   이 농약사가 위치한 곳이 장날 핫플의 초입이라 늦게 가면 모종은 다 팔리고 없다. 원하는 종류의 모종을 사려면 조금은 서둘러야 획득할 수 있다. 종이에 적어간 대로 필요한 모종을 고른다. 씨앗 파는 할아버지에게도 가서 상추며 마디호박(애호박, 우리 마을에선 마디호박이라 부른다)이며 싹 틔울 씨앗을 골라 산다. 작물은 심는 시기가 다 다른데 초보인 나는 상황에 따라 모종을 살 때도 있고, 씨앗을 살 때도 있다. 이른 봄엔 주로 씨앗을 산다.

   자, 이제 심어볼까. 모종판 칸칸이 상토를 2/3 정도만 채운다. 그 위에 씨앗을 뿌려주고 상토로 덮어준다. 로메인 상추, 백오이, 마디호박. 타오르는 열정을 꾹 누르고, 현실적으로 잘 키울 수 있는 3가지만 심는다. 텃밭 농사 첫 해엔 열정이 넘쳐 열 댓가지는 심었던 것 같다. 모종판에 씨앗을 심고, 볕 좋은 곳에 두고 물을 주면 남은 것은 애타는 기다림의 시간뿐이다.

   닳는다, 닳아. 모종판을 현관 앞에 두고 집을 나설 때, 들어올 때마다 둥글둥글한 어여쁜 말들을 건네며 참 열심히 본다. 언제쯤 나오려나 시간이 왜 이리 안 가는지. 여름방학을 일주일 앞두고 손꼽아 기다리는 어린아이 마냥 모종판 앞에서 구시렁거리게 된다. 그렇게 며칠 지나면 흙 속에서 기운을 머금고 있던 씨앗이 ‘톡’ 하고 터지면서 뿌리를 내리고 떡잎을 내민다. 빼-꼼.

 

빼-꼼. 아기싹 나왔다! / 사진: 참 좋다
빼-꼼. 아기싹 나왔다! / 사진: 참 좋다

 

   눈에 보이는 시작이다. 겨우 물 주고 싹이 나길 기다렸을 뿐인데 꼭 무언가 해낸 기분이다. 생명의 발아를 목격한 감격이 이리 클 줄이야. 고맙게도 살아있는 씨앗이었다. 장에서 파는 씨앗은 대부분 유통기한이 2년이다. 시간이 흐르면 발아율이 적어진다고 한다. 괜찮은 씨앗을 사 온 건지 제대로 심은 건지 잘 커줄지 걱정되었는데, 괜한 걱정들을 단번에 사라지게 하는 어린싹에게 고맙고 몹시 반가웠다. 정확하게는 씨앗과 씨앗을 품었던 흙, 땅에게 고마웠다.

   내가 할 일은 그저 씨앗을 품은 땅을 믿고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걱정이 아닌 생명을 향한 소.신이 필요했다. 소신(小信)의 뜻에 대해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작은 신뢰와 의리’라 풀이한다. 심을 때에도 눈에 보이는 시작을 목격한 후에도, 그에 대한 작은 신뢰와 의리만 있으면 되는 거였다. 제 속도에 맞게 온몸을 터뜨려 뿌리내리고 싹을 틔우는 생명의 시계를 읽어야 했다.

   씨앗의 자람을 보고 있자니 우리 집 토끼 넷을 저절로 들여다보게 된다.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젖 달라고 울기만 하던 녀석들이 제 속도에 따라 몸을 뒤집고 기었다. 이가 나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 발로 걷는 순간이 문득 찾아왔다. 아이들마다 크는 속도가 제각각이었다. 칠삭둥이로 태어난 둘째, 셋째 채움과 로움 쌍둥이가 두 돌이 될 때까진, 잘 크고 있는 건가 걱정하고 마음 졸였던 날들이 꽤 잦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씨앗을 품은 땅을 바라보던 내게 필요했던 소신처럼, 아이들에게도 걱정이 아닌 그저 나의 작은 신뢰와 의리가 필요했구나, 싶다. 어찌 보면 엄마는, 아이라는 씨앗을 품는 땅일지도 모르겠다. 이른 봄엔 땅만 싹을 틔우나 싶었는데, 헤아려 보니 그걸 바라보고 있던 사람도 싹을 틔우는 시간이 되었다. 톡.

 

 

왼쪽부터 대파, 상추, 오크 모종. 나눔 받은 모종과 장날 사온 모종이 다 모인 날. 부자 됐다. / 사진: 참 좋다
왼쪽부터 대파, 상추, 오크 모종. 나눔 받은 모종과 장날 사온 모종이 다 모인 날. 부자 됐다. / 사진: 참 좋다

 

장날 사온 무화과나무 모종 심던 날. 거름으로 개똥을 넉넉히 주었다. / 사진: 참 좋다
장날 사온 무화과나무 모종 심던 날. 거름으로 개똥을 넉넉히 주었다. / 사진: 참 좋다

 

 

[저자 소개]

초록, 하늘, 나무, 들꽃. 자연의 위로가 최고의 피로회복제라 믿는 사람. 퍽퍽한 서울살이에서 유일한 위로였던 한강을 붙들고 살다, 시골로 터전을 옮긴 지 8년 차 시골사람. 느지막이 찾아온 줄줄이 사탕 5살 아들, 4살 남매 쌍둥이, 3살 막내딸과 평온한 시골에서 분투 중인 어설픈 살림의 연연년생 애 넷 엄마. 손글씨와 손그림, 디자인을 소소한 업으로 삼아 살아가는 사람. ‘사랑하고, 사랑받고’라는 인생 주제를 이마에 붙이고, 주어진 오늘을 그저 살아가는 그냥 사람. 소박한 문장 한 줄을 쓸 때 희열을 느끼는, 쓰는 사람.  

그대여. 행복은 여기에 있어요.

 

 

[쓰고뱉다]

글쓰기 모임 <쓰고뱉다>는 함께 모여 쓰는, 같이의 가치를 추구하는 글쓰기 공동체입니다. 개인의 존재를 가장 잘 표현해 줄 수 있는 닉네임을 정하고, 거기서 나오는 존재의 언어로 소통하는 글쓰기를 하다 보면 누구나 글쓰기를 잘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걸어왔고, 걸어가고 있습니다. 뉴스레터로 발송되는 글은 <쓰고뱉다> 숙성반 분들의 글입니다. 오늘 읽으신 글 한잔이 마음의 온도를 1도 정도 높여주는 데 도움이 되셨다면 아래 댓글 보러 가기를 통해 본문 링크에 접속하여 커피 보내기 기능으로 구독료를 지불해 주신다면 더욱더 좋은 뉴스레터를 만드는 데 활용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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