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5년전일이다. 시아버님이 대장암 말기 판정을 받으셨다. 당시 코로나가 시작되던 시기라 온 뉴스가 난리였는데 우리는 아버님의 암 발견소식과 수술일정때문에 전혀 소식을 모르고 있었다. 뉴스를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우리 아버님이 시한부 6개월 판정받고 돌아가실지도 모른다는데 코로나 그까짓게 무슨 대수라고. 그랬었다.
그렇게 코로나가 전 세계를 마비시키던 기간동안 아버님의 항암치료가 진행됐다. 유전자검사를 통해 암세포만 골라 죽인다는 표적치료제를 기대했지만 아버님 유전자에 맞는 약이 없다고 했다. 일반적인 약을 쓰면서 호전되기도 했지만 이미 퍼질대로 퍼진 온 몸의 암세포를 모두 죽이진 못했다. 부작용을 수반하는 대체약과 임상치료 약까지 써가며 그야말로 암세포와 사투를 벌여야 하는 시간이 흐르고 흘렀다. 의사의 말대로 너무 늦게 발견해버린 암환자는 생명의 끝자락을 조금씩 연장하는 시간을 보낼수 밖에 없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5년이었다.
마지막 희망처럼, 미국에 샘플을 보냈지만 한 달뒤 더이상 쓸 약이 없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항암치료가 끝났다. 그때부터 암세포는 아버님의 온 몸을 집어삼키기 시작했고, 소화기관을 마비시켰고 밤새 통증으로 잠 못 이루게 했다. 아버님은 야위어 가기 시작했고 돌아가시기 직전 몸무게는 30kg대까지 내려가 있었다. 몸이 그 지경에 이르는 데도 아버님은 자식에게 짐이 되기 싫어 꾹꾹 참으며 하루하루를 버텨내셨다. 아들과 며느리에게는 바쁘다는 핑계로 금방 지나가버린 시간이었다. 지나고 나서야 알게됐지만 아버님은 그 시간동안 누구도 대신해 줄수 없는 죽음앞에 묵묵히 본인이 없을 세상에 대한 준비를 하고 계셨다. 자식들에게는 오랜만이었던 것이 너무 죄송할만큼 아버님은 앙상하게 뼈만 남은 모습으로 힘없이 우리를 맞아주셨다. 몸 안의 장기들이 음식을 받아내지 못하고 통증으로 잠을 잘수도 없는 나날을 겪어내고 계셨다. 아들과 어머님은 결국 아버님을 요양병원으로 모시기로 결정했고, 아버님은 그곳에서 마약성진통제를 맞고서야 편히 주무셨다. 그리고 그 뒤로 깨어나지 못하셨다. 폐를 삼켜버린 암세포가 호흡을 서서히 막았고 마지막 호흡이 멈추면서 그렇게 숨을 거두셨다.
요양병원에 들어가시던 첫 날, 아버님은 아들보고 자고 가라고 했었다. 아내와 어린 아이를 데려다주느라그걸 못했다고 아들은 내내 후회했다. 그 뒤로 전화를 걸어도 아버님은 받지 못하셨다. 결국 의식을 잃으셔서 아들의 진심을 담은 문자도 못 보고 가셨다. 남편이 임종을 지키는 동안 돌아가시기 몇 시간 전 새벽, 나는 어린 아이와 집에 있느라 아버님께 통화로나마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아침이 밝고 점심즈음, 아버님은 가족들의 마지막 말을 다 듣고서 가셨다. 먼저 부모님을 보내신 어른들이 마지막까지 귀는 열려 계신다고 못다한 말, 좋은 말 해드리라는 이야기를 해주셨다. 덕분에 아들과 며느리는 용기내어 못다한 진심을 전했고, 한결 마음 편히 보내드릴수 있었다.
6개월 사신다는 의사의 말보다 훨씬 긴 시간 동안 아버님이 버티실수 있었던 것은 손주의 힘이 컸다. 자라나는 생명의 힘은 어른의 것보다 실로 강하고 힘찼다. 사람을 살릴수도 있을만큼.
손주가 태어나고 아버님의 병세가 잠시 호전된 적이 있었다. 현재의 의학수준으로는 한계점이 왔다는 걸 모두가 암묵적으로 알고 있었던 때였다. 때문에 예상치 못한 ‘기적’에 의사도 놀라워했었다. 사람이 죽음 직전에 반짝 몸이 원래대로 확 좋아지는 순간이 있다는 말을 책에서 본적이 있다. 아버님에게도 그런 순간이 왔던걸까. 그 순간이 더 이어졌으면 하는 우리의 바람과는 달리, 아버님의 노쇠한 몸은 더 이상 암세포를 이길수 없을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아버님의 장례가 치뤄지고 입관식때 나는 가족들이 너무 울지 않을까 걱정했었다. 예상과는 다르게 우리 마음에는 천국소망이 가득했다. 아들이 전한 복음을 믿고 예수님을 부르시고 그분의 품에 안기셨다는 사실에 우리는 안도했다. 나는 아버님께 마지막말로 손주 잘 키우고 있을테니 천국에서 만나자고. 조금만 기다리시라고 전했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몇 달 뒤, 어머님은 꿈에서 천국으로 먼저가신 엄마와 남편이 같이 예배드리고 있는 모습을 보셨다고 했다.
실로 죽음을 이기는 생명의 힘은 복음에 있었다. 아버님의 장례식장이 그 첫번째 증거였다. 평생 교회와 선교단체에 몸 담아온 남편 덕에 아버님을 외롭지 않게 보내드릴수 있었다. 우리에게는 찾아와주신 한분한분이 그저 위로였다. 감사한 만남들이 이틀간 쉬지 않고 이어졌다. 다정한 남편은 조문객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아버님 상황을 나누고 안부를 나누고 싶어했다. 때문에 조문객들이 줄서서 기다리고 있는 광경이 벌어졌다. 이 날 장례식장에 오셨던 한 어른은 이렇게 줄서서 기다리는 장례식장은 처음봤다면서, 상주가 조문객에게 일일이 상황 설명하는 경우는 처음 봤다고 얘기해주셨다. 보통은 궁금해도 물어보기가 애매하고 사람들이 기다리니 인사만 간단히 하는 경우가 많은데, 고인에 대한 설명을 해주니 더 정감이 가는 장례식장이었다는 것이다.
조문객이 그렇게나 많은 것을 보고 어머님이 놀라워하시며 위로 받으시는 표정으로 우리는 아버님도 같은 마음이시겠거니 안도했다. 친척 어른분들은 외동아들 아버지 장례식장에 이렇게나 사람이 많은 걸 보면서 나도 외롭지 않게 죽을라면 교회다녀야겠다고들 하셨다. 평생 안보고 살았던 가족과 사이가 틀어졌던 사람도 장례식장에서는 묵은 감정을 풀고 화해했다. 또 식장에서 때마다 드려진 예배시간마다 선포된 천국소망에 대한 말씀은 남겨진 가족들에게는 큰 위로였다. 나는 그제서야 말로만 듣던, 먼 이야기만 같던 천국소망에 대한 믿음을 배웠다.
놀라운 것은 장례기간 내내 함께해주셨던 삼촌 분의 고백이었다. 장지를 하러가는 마지막 날 아침, 아버님을 평생 전도해오시고 장례 내내 함께해주셨던 목사님께 삼촌이 간증을 하셨다. 원래는 교회를 다녔노라고. 그런데 교회 사람들에 실망해서 안 다닌지 오래라고. 그런데 조카가 신학교를 가고 목사를 한다해서 어찌나 걱정되던지. 그런데 이번 장례를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고. 우리 조카 잘 부탁드린다고. 나도 교회다녀보는걸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고. 아버님의 장례식장은 복음전도의 장이 된 것이다.
북적북적한 장례식장은 감사와 만남, 위로와 감동의 장이었고 화해의 장, 복음전도의 장이었다.
한 사람의 죽음은 남아 있는 여러 사람의 천국 소망의 문을 여는 계기가 됐다.
누구도 피할수 없는 죽음과 헤어짐 이후에 다시 만날수 있다는 소망이 있다는 것, 우리가 경험한 복음의 또다른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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