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둔자

69. 다정하고 시적인 순간

한강 작가가 변방의 편집자에게 미치는 영향

2024.11.08 | 조회 2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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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류여성

세 여자가 전하는 '일'에 관한 모든 이야기

구독자님 이제 날씨가 제법 쌀쌀해졌습니다. 전 집에선 무조건 맨발로 지내는 편인데 이 글을 쓰는 지금은 발이 좀 시렵네요. 그래도 마음 만은 따뜻한 일상의 순간들이 있어서 오늘은 그 이야기를 공유해보려고 합니다. 여러분께도 다정하고 시적인 순간이 자주 찾아오기를 바랍니다.
한강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한강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사실 지난 레터를 쓸 당시에 한강 작가의 노벨상 소식이 들려왔었다. 이미 예약 발행을 했던 터라 다시 엎고 새로운 글을 쓸까 했지만 당시 내 상황과 마음 상태는 원래의 글쪽에 더 가까웠기 때문에 솔직한 심정을 공유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에 그대로 발행을 했다. 그리고 다음 순서가 돌아오면 반드시 제대로 써보리라 생각했다. 

부제에는 한강 작가가 편집자에게 미치는 영향이라고 썼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이 내게 미친 영향이다. 지난 레터를 읽은 사람을 알겠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지금 하고 있는 일에 회의적인 마음이었고, 언제 일을 다 그만두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다. 발표가 있던 날도 딱히 다를 바 없었고 광역 출퇴근자인 나는 퇴근길에 민음사 생중계 영상을 틀었는데 갑자기 ‘한강’ 작가 이름이 불렸다.

사실 발표자의 발음이 정확하지 않기도 하고 내 생애에 한국인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볼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처음엔 음? 이게 뭐지? 하는 순간 민음사 유튜브 속 편집자분들이 ‘한강?’ 하며 소리를 지르셨다. 오, 제대로 들은 게 맞군? 근데 이게 지금 뭐지? 하다가 조금 벅차올랐다. 오 내가 죽기 전에 한국인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보긴 하는구나 싶은 마음이 들면서 별안간 기분이 이상해졌다. 뭐라고 이름 붙이기 이상했던 감정. 

내가 한강 작가를 처음 만난 건 대학 재학 시절 <채식주의자>가 출간되었을 때다. 그때 언론사 입사 준비를 하고 있던 고시반에서 실원들을 위한 도서 구매 비용을 지원해줬었는데 그 돈으로 신청한 게 <채식주의자>였다. 지금의 하늘색 표지와는 다른 노란색 배경에 나무 그림이 있는 표지였는데 사실 그때 내가 한강 작가를 알고 작품을 고른 건 아니었다. 

당시 채식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왔었고, 채식주의자를 편식하는 아이 정도의 관점으로 보며 비난하는 사람이 많았던 시절이어서 뭐 그런 내용이 아닐까 생각하며 신청했던 책이다. 보아하니 분량도 많지 않은 것 같고 후딱 읽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웬걸. 상황에 대한 적나라한 묘사는 정말이지 20대의 기개가 있어서 견딜 수 있었다. 아마도 지금 다시 읽으라고 한다면 못 할 것 같다. 

바로 그 점에서 정신이 좀 들었다. 내 마음이 매우 취약한 상태이구나,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외면하고 회피하고 싶구나 하는 생각. 살다 보면 좀 쉬거나 돌아가도 된다는 말을 듣긴 하지만 그냥 개인적으로 나는 그런 방식으로는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결국은 어떻게든 스스로 방법을 찾아야만 그 시간을 지나갈 수 있었다. 그러니 결국 지금 이 순간도 내가 어떻게든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내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것 두 가지 정도를 들고 면담을 요청했다. 나머지는 중간지점에서 타협하겠다고도 했다. 그러고도 안되면 서로를 위해 그만하는 것도 용기겠구나 했다. 그런데 내가 너무 비장해 보였을까? 그간 그토록 허락되지 않던 것들이 생각보다 쉽게 통과되었다. 이럴 거 왜 진작 된다고 하지 않았을까 좀 원망스러운 마음도 들었지만 결과를 얻었으니 그냥 지나가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하려는 최소한의 영역을 보장받았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괜찮아진 게 아니고, 여전히 한숨 푹푹 나는 현실이 기다리고 있지만 그래도 요 며칠은 이게 어디냐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혹시 또 아나? 내가 만드는 책이 문학은 아니지만 언젠가 내 분야에서 한강 작가처럼 누군가를 생각하게 하고 현실을 바라보게 만드는 어떤 작가를 만나게 될지. 그리하여 내가 그 순간을 위해 지금같은 순간을 무수히 견뎠다는 깨달음(?)을 얻을지도 모르지 않은가?

게다가 감정의 파고를 겪는 내내 주변 사람의 다정을 흠뻑 느끼고 있는 중이어서 내가 대단히 호강하는 중이란 생각이 들었다. 내내 어리다고 생각했던(그렇다고 철이 없단 얘기는 아니었습니당!) 각각의 후배들이 “걱정했었는데 표정이 좋아지셔서 저도 너무 좋아요”란 말을 똑같이 하는 걸 보니 오히려 내가 너무 철이 없이 굴었나 싶은 생각도 했지만, 그런 자기 검열보다는 주변 사람의 다정에 ‘잠겨 죽어도 좋으니 그대 내게 물처럼 밀려오라(낮은 곳으로, 이정하)’라고 말하고 싶다. 주변에 좋은 사람이 많은 덕분에 누리는 호사다. 

역사적 트라우마까지는 아니지만 개인의 위기에 맞서며 그 연약함을 드러내는 시적인 순간을 발견했으니 한강 작가의 노벨상 선정 이유와도 공통점이 있지 않을까?(연약함은 내가 드러낸 거고, 시적인 순간은 나의 후배들이 만들어주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노벨 재단에서 설명하고자 했던 선정 이유가 이런 의미는 아니겠지만 자고로 말이란 그 의미를 확장하여 쓰이는 법이니까.) 

한강 작가가 전혀 의도하지 않았을 것이고 이렇게 작은 변방의 편집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작가는 영원히 모르겠지만 분명 그녀의 수상이 내 삶의 중심을 한 번 울렸음은 명백하다. 누군가에게도 그녀의 혹은 다른 작가의 글이 시적인 순간을 만들어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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