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의 앤은 밝고 명랑합니다. 좋은 이야기를 쓰고 싶어 하고, 공부를 잘하고 싶어 하고, 멋진 미래를 꿈꿉니다. 무엇보다 자신의 삶이 아주 근사한 이야기가 되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이죠. 그런데 대학에 가면서부터 조금씩 달라집니다. 예전처럼 마냥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세상이 생각보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고, 사람의 마음도, 자신의 마음도 생각만큼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갑니다.
그러다 앤이 대학에서 만난 사람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앤이 꿈에 그리던 이상형에 가까운 사람이었어요. 외모도 좋고 집안도 좋습니다. 이름에는 무려 '로얄'까지 들어갑니다. 단순히 외적인 조건이 좋다는 것이 아니라 어릴 때 앤이 상상했던 로맨스 소설 속 남자 주인공이 현실에 나타난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남자예요.(그래서 그런지 저는 약간 음... 느끼한 느낌? 😆 )
저는 이 부분이 조금 재미있었습니다. 앤은 정말 자신이 바라던 사람을 만났으니까요. 그의 어머니는 앤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앤은 특유의 너그러움과 진심으로 결국 그 어머니의 마음까지 얻습니다. 그러니 이제 정말 모든 것이 완벽해 보입니다. 좋은 사람을 만났고, 그의 가족에게도 인정받았고, 결혼까지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앤의 마음 한구석에는 계속 다른 사람이 남아 있습니다. 길버트입니다.
앤은 결국 청혼을 거절하고 에이번리로 돌아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앤 자신도 그 마음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길버트가 장티푸스를 앓고 죽을 고비를 넘기고 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리고 그제야 알게 됩니다. 자기가 길버트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을요.
참 이상하지 않나요. 죽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그렇게 확실하게 보이지 않았던 마음이, 그 사람이 정말 사라질 수도 있다는 순간에야 선명해집니다. 그리고 길버트가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돌아왔을 때, 두 사람은 드디어 서로의 사랑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여기에도 재미있는 점이 있습니다. 길버트는 부자가 아닙니다. 여전히 의대 공부도 마쳐야 합니다. 당장 앤에게 근사한 미래를 약속해 줄 수 있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런데 앤은 기다리기로 합니다. 이번에는 환상 속의 근사한 삶이 아니라, 현실에 있는 사람과 함께 그 시간을 살아보기로 한 것입니다.

앤과 길버트의 서사는 사실 아주 전형적인 로맨스처럼 보입니다.
'진짜 사랑은 가까이에 있었다.'
'내가 꿈꾸던 사람보다 나를 진짜 사랑하는 사람이 중요했다.'
어쩌면 이런 이야기로 간단하게 정리할 수도 있겠죠.
그런데 저는 이 장면을 보면서 조금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앤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놓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정확히 말하면, 자신이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을 좇느라 실제로 사랑하고 있던 것을 보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앤에게는 분명 자신이 생각하는 '멋진 삶'의 모습이 있었을 것입니다. 멋진 사람을 만나고, 멋진 결혼을 하고, 멋진 미래를 만들어 가는 것. 그게 틀린 것은 당연히 아니죠.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삶을 꿈꿀 수 있으니까요.
저 역시 그런 면이 있습니다. 이 정도는 되어야 근사한 삶이라고 생각하고, 이런 일을 해야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이런 것을 가지고 있어야 만족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면 이상한 일이 생깁니다. 이미 내 손에 들어와 있는 것들은 잘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매일 하는 일, 익숙한 사람들,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하루. 처음에는 분명 좋아서 시작했거나 소중해서 붙잡았던 것들인데, 어느 순간부터는 너무 익숙해져서 그 가치를 잊어버립니다.
대신 아직 갖지 못한 것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저것을 가지면 더 행복할 것 같고, 저런 일을 하면 더 멋진 삶이 될 것 같고, 저곳에 가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면 지금 내 앞에 있는 것을 사랑하는 일은 자꾸 뒤로 밀립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것을 잃을 것 같아지는 순간, 마음이 달라집니다.
최근 저에게도 그런 일이 하나 있습니다. 아직 자세히 이야기하기는 어렵지만, 일 때문에 조금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그저 이 순간을 빨리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 일이 흔들리기 시작하니 오히려 이상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내가 잃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그제야 제가 그것을 얼마나 좋아하고 있는지가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물론 힘든 건 여전히 힘듭니다. 좋아한다고 해서 어려움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요. 이 일을 해결할 사람 역시 오로지 저 뿐이라는 사실에 최근 자주 절망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럼에도 한 가지는 분명해졌습니다. 내 현실 중에 좋은 것이 꽤 많았다는 것을요. 역시 저는 어리석어서 어려움에 처했을 때에야 제가 가진 것이 비로소 새롭게 보이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그저 남들이 말하는 '멋진 삶'의 모습을 빌려와서 내가 원하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주 살펴보려고 합니다.
생각해 보면 앤도 결국 가장 근사해 보이는 사람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자신이 진짜 사랑하는 사람과, 아직 완성되지 않은 미래를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길버트에게는 돈도 없고, 의사가 되기까지도 시간이 필요합니다. 아마 앤의 앞에는 앞으로도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원작을 읽으면 실제로 그러합니다. 앤은 계속 여러 고난을 맞이하고 해결하거나 흘려버리면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저는 오히려 그 점이 좋았습니다. 사랑하는 삶이라고 해서 모든 것이 평온하진 않을 테니까요. 저도 요즘 그걸 조금씩 배워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현명하시니까 괜한 고난을 겪지 마시고, 제 이야기 속에서 일상의 기쁨을 발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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