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자자족

[산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 두고 온 가을

하나를 잃었더니 얻은 게 두 개니 이득 맞겠죠?

2026.10.23 | 조회 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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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자님, 안녕하세요. 곰자자족입니다. 잘 지내고 계신가요? 갑작스레 아침저녁 기온이 뚝 떨어져 감기에 걸리진 않으셨는지 궁금합니다. 따숩게 몸을 잘 챙기시며 포근한 일상을 보내시기를 바랄게요.

추워진 건 달갑지 않지만, 한 가지 설레는 건 곧 울긋불긋 물든 가을 낙엽을 여기저기서 만날 수 있겠다는 것이랍니다. 다이소에서 어렵게 득템한 가을 단풍잎&나뭇잎 펀치를 사두고 나뭇잎이 떨어지기만을 아이와 기다리고 있어요. 올해 가을엔 소소하게 가을 낙엽을 꾸며 키링을 만들어보기로 했거든요. 2천 원으로 가을을 충분히 누릴 수 있다니, 이것 참 소소하고도 충만한 낭만 아니겠어요?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문득문득 산을 그리워합니다. 이 무렵 자연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죠. 그 시절의 이야기를 꺼내보았습니다. 가볍게 읽어주시며, 각자의 가을 추억을 떠올려보시기를 바랍니다. 

얼마 전 독서 모임에서 누군가 물었다. 나를 치유나 회복의 길로 이끌어 준 자연이 있느냐고. A는 호주 여행을 가서 다닌 곳곳의 선셋 포인트라 답했다. B는 태안의 바닷가를, C는 비 오는 봄날의 융건릉(수원 화성)이라 꼽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다음은 내 차례.  

내게는 산이었다. 한때 도장 찍듯 매주 다녔던 전국의 크고 높은 산들. 팬데믹으로 단체 모임 금지 조치가 이뤄졌던 시기 직전까지 만 3년을 열심히 다닌 수많은 산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갔다. 산을 함께 다닌 사람들의 얼굴까지도. 그 자리에 항상 있는 자연 자체도 힐링이지만, 그러한 자연을 기꺼이 만나기 위해 뛰어든 사람들까지도 나를 통과한 회복의 범주에 포함된다.  

그럼 팬데믹이 끝난 지금은 다시 등산을 즐기고 있느냐고? 아직 그러지 못해 아쉬워하고 있다고 답했다. 유치원 다니는 아이를 돌보느라 주말에는 등산 대신 아이가 좋아하고, 아이도 함께 즐길 수 있는 곳을 찾아다니는 중이기 때문이다. 아직 일 년에 한 번 정도 가까운 관악산에 혼등을 가는 게 전부지만, 일단 그걸로 아쉬움을 달래면서 아이와 함께 등산할 수 있는 가까운 미래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한 3년 정도만 지나면 가능하지 않을까?  

그때까지는 오늘처럼 과거의 어느 한 페이지를 펼쳐 보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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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열어볼 페이지는 최고의 가을산행으로 꼽는 설악산이다.

산을 다닌다고 매번 산이 맑은 얼굴,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건 아니다. 산행 당일 날씨, 그날의 멤버, 무엇보다 내 컨디션과 체력이 잘 맞아야 가능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내 상태는 내가 컨트롤할 수 있어도 날씨는 아무리 대비하고 예측하더라도 100퍼센트 맞출 수는 없는 것이니, 어쩌면 운도 따라야 하는 것과 같다.  

설악산 1박 산행은 삼박자가 고루 맞았다. 그 어렵다는 가을 대피소 예약에 성공했고, 이틀 내내 비도, 구름도 없이 맑았다. 함께 산행하는 여덟 명의 멤버도 좋았다. 모두 친분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등산고수, 수다고수, 촬영고수, 요리고수 등 각자의 전문분야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골고루 모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설악산의 모든 자연까지도 타이밍 맞춰 가을의 자태를 아낌없이 드러내주었다. 곱게 물든 단풍과 오색찬란한 가을빛 덕분에 힘든 줄도 모르고 계속 걸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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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은 한계령에서 출발해 서북능선, 중청 대피소를 거쳐 소청 대피소에서 묵었다. 다음날은 대청봉을 다녀온 뒤 봉정암과 수렴동 대피소를 거쳐 백담사로 하산하는 일정. 1박 2일 총 22km를 걸었다. 

⛰️ 1일 차: 한계령-서북능선-중청-소청

⛰️ 2일 차: 소청-대청봉-중청-소청-봉정암-수렴동 대피소-백담사

가을 인생샷 건지며 순조로울 줄만 알았던 설악산. 그러나 이튿날 걷기 시작하자 무릎이 말썽을 부렸다. 처음엔 어딘가 근육이 살짝 뭉친 것 같더니 걸을수록 점점 통증이 심해졌다. 바위를 디딜 때마다 찌릿하는 통증이 밀려왔고, 평지를 걸어도 아파서 절뚝거렸다. 보다 못한 멤버들이 무릎 보호대와 등산 스틱을 빌려주었다. 그렇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걷는 속도는 점점 더 늦어졌고, 나는 뒤처진 채 스틱에 의지해 간신히 발을 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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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적어둔 일기를 보면 “서로 돕고 챙기는 아름다운 마음 덕분에 아파도 아프지 않았다.”고 쓰여 있던데, 정말 산행 멤버가 아니었다면 산에서 구급 헬기를 불렀을지도 모를 일이다.  

등산 최고수 멤버가 함께 후미를 지키며 응원해주고, 짐을 덜어준 덕분에 내려왔다. 백담사가 보이니 이제 살 것 같았다. 찜질하면 나을 거라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무릎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자고 일어나니 앉았다 일어나기를 하기 어려울 정도로 점점 더 통증이 심했고 그 길로 병원에 가 거의 한 달간 물리치료를 받았다.  

무릎이 아파 제대로 걷지도 못하면서, 등산 못가 너무 심심하고 재미없다는 내 푸념에 아빠는 뜻밖의 40년 전 추억을 들려주었다. 한때 산쟁이(술쟁이)였던 아빠도 설악산이 좋아 몇 번이나 갔는데 어느 산행에선가 맹장염 걸린 줄도 모르고 산타다 대피소에서 군의관 치료를 받고 하산했다는 이야기였다. “그 정도면 너무 미련한 거 아니야?” 말하다 서로 쳐다보며 웃었다. 그게 무릎 망가진 네가 할 말이냐는 아빠의 표정을 너무 읽을 수 있었기 때문에.  

무릎은 잃었지만 생애 최고의 가을빛과 생각지 못한 아빠의 산행 에피소드까지 듣게 됐으니 무릎 때문에 속상한 게 아니라 무릎 덕분에 두 가지나 얻었으니 이득이라고 한다면, 이 또한 말도 안 되는 정신승리이려나? 그렇지만 그 산행을 간 지 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진을 보며 빙그레 웃고, 그날의 산행을 문득문득 떠올리게 되니 자연이 준 치유의 힘은 사라지지 않는 게 분명한 것 같다.  

다음 산행 페이지는 아직 쓰이지 않았지만, 가을 산에서 얻은 온전한 힘으로 지금을 잘 살아내다 보면 언젠가 다시 등산화 끈을 묶게 되겠지. 그런 생각을 하니 벌써 설렌다. 무언가를 진심으로 기다리는 마음은 언제나 기대로 물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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