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기가 찾아왔다. 등산 가려고 회사 가고 돈 번다는 농담도 할 만큼 산이 좋았는데. 모든 주말 일정을 전국의 산들에 바칠 만큼 열정이 들끓었던 내가 어느 날부턴가 어떤 산이 등장하든 심드렁한 사람이 되었다. 가도 그만 안 가도 그만이었다. 달리 말하면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인 것. 그 대상에는 산도, 사람도 모두 포함이었다. 어떤 것에도 감흥이 일지 않았다. 연인 관계에도, 친구 사이에도, 회사 생활에도 한번은 찾아온다는 권태기가 내게도 온 걸까? 할 수만 있다면 나를 비껴가도록 하고 싶었다.
등산을 처음 시작했을 때는 모든 게 새롭고 신이 났다. 산은 같은 산이어도 한 번도 같은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으니까. 매번 새롭게 감탄했다. 봄에는 아직 여린 연둣빛이었다면 여름엔 깊고 진한 초록빛이었다. 가을엔 따뜻하고도 고운 빛깔로 그 자태를 드러냈다. 겨울이라고 빠질 수 없는데, 겨울에는 겨울산만이 가지는 순도 100퍼센트의 맑고 깨끗한 빛깔이 있었다. 치장 같은 걸 다 벗어버린 나무는 도리어 옹골져 보였는데 그게 꼭 본연의 단정한 아름다움 같았다. 유리 조각품처럼 반짝이는 상고대는 또 어떻고. 겨울 산의 마법 같은 매력에 한번 빠지면 헤어질 방법이 없었다.



산이 보여주는 풍경 자체로도 좋았는데, 나는 산 타려고 만난 사람들이 좋으니까 더 흥이 나고 좋았던 것 같다. 그들은 하나같이 따뜻하고 다정했다. 각자 등에 메고 온 배낭이 작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뒤처지는 일행이 생기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 배낭 짐을 나눠 들어줄 줄 알았다. 자꾸 멈춰 서는 일행에게는 “힘내”라는 말도 아끼지 않고 베풀었다. 수시로 손에 달달한 사탕과 초콜릿을 쥐여 주는 일행은 꼭 산에서 만나는 산타 같았다. 별것 아닌 농담에 웃고 떠들며 한발 한발 옮기다 보면 아무리 숨이 차고 힘들고 다리가 아파도 정상에 도달했다. 산 아래에서 우리는 모두 다른 얼굴이었지만 정상에서 환호하고 웃을 때 우리의 얼굴은 하나였다.

그렇게 좋고 재밌던 마음이 어떻게 하루아침에 식을 수가 있는지. 등산이 재미없고 힘들기만 하다고 말하자 주변에서는 잠시 산행을 쉬어 보라고 했다. 쉬다 보면 다시 등산 가고 싶어질 때가 찾아올 거라고. 그러나 나는 등산 고수 선배들의 만류에도 멈추질 못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동호회 커뮤니티에 들락날락했고, 산행 공지가 올라오면 기계처럼 참석 댓글을 달았다. 막상 산행일이 다가오면 귀찮은 마음이 커졌는데 그런 산행의 결과는 역시나 그저 그랬다. 산타는 길은 길고 지루하게만 느껴졌다. 얼른 집에 가서 쉬고 싶었다. 정말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지리산 성중종주 중탈의 여파가 너무 컸던 걸까? 체력도 안 되는데 욕심내며 등산 다니다가 탈 난 걸까? 이것이 바로 산신령의 저주 같은 것이었을까? 혼자 온갖 추측과 망상을 계속하다가 나는 내 의지로 산에 갔다 오고도 마치 억지로 끌려다녀온 것처럼 “재미없다, 재미없어”라고 말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계속 그렇게 안 좋은 말버릇으로 여기저기 나쁜 기운을 퍼뜨리고 다녔다면 아마 동호회 블랙리스트가 되었을 텐데 다행히도 나를 붙들어준 것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야근이었다.
나의 산태기(등산+권태기를 합친 말)는 아이러니하게도 야근으로 극복되었다. 가고 싶어도 체력과 정신력이 바닥나니 갈 수 없게 되자 정말로 다시 산에 가고 싶어진 것이다. 몇 달 동안 회사-집만 반복하다가 아주 오랜만에 관악산 등산로 초입 흙길을 디뎠던 때를 기억한다. 마치 처음 땅에 발을 디뎠던 사람처럼 낯선 소리와 질감과 여러 감각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느릿느릿 조용히 ‘혼산’ 했던 날을.
내가 가고 싶은 만큼, 가고 싶은 속도로 걸었다. 힘들면 쉬고, 괜찮아지면 다시 걸었다. 정상에 다다라 바위에서 내려다본 서울은 꼭 잘 닦아놓은 유리창으로 보는 것처럼 깨끗했다. 산 아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도 모르게 “아~ 좋다!”라는 말이 나왔는데, 그때 깨달았다. 내가 이 고요하고도 맑은 풍경을 좋아했다고. 오르는 동안 나무와 숲에 가리고, 바위에 가려 앞이 막막한 것만 같다가도 어느 순간 불쑥 내미는 낯선 풍경들을 좋아했다고 말이다. 다시 한번 “좋다, 정말 좋다.” 외쳐 보았더니 마음에도 정말 좋은 기운이 들어차는 느낌이었다.
여럿이 함께하는 시끌벅적한 ‘떼산’도 분명 매력 있지만 ‘혼산’이 주는 매력이 바로 이 점이 아닐까 싶다. 내가 진짜로 좋아하는 것을 잘 알게 해줘서 내가 나와 좀 더 가까워지게 하는 것. 내게 좋은 에너지를 스스로 불어넣어 주는 것. 그러자 내가 등산하며 좋아했던 것들이 줄줄이 생각났다. 힘겹게 정상에 올라 한입 베어 먹었던 사과의 꿀맛도 좋아했고, 보온병에 온수를 담아와 종이컵에 돌려 마시던 믹스커피 한 모금도 좋아했다. 가끔 정상에 올라 “이 산 아래가 다 내 땅이다~”라고 말도 안 되는 농담을 했는데, 그럴 때 정말 내가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들어 좋아했다는 것도.

좋아하는 것들을 하나씩 생각하고, 좋아하는 모양에 동그라미를 칠수록 나는 다시 산에 가까워졌다. 그러다 보니 산태기는 자연스레 자취를 감췄다. 흔히 인생을 등산에 비유하곤 한다. 거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텐데, 나는 권태기가 온다는 것이야말로 인생이 등산과 닮은 구석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나에게 만사 재미없고 귀찮고 하고 싶은 게 없는 시기가 찾아온다면 나는 등산 권태기를 빠져나왔을 때처럼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혼자일 수 있는 시간과 공간에서 내가 좋아했던 것들을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도 하나씩 떠올려보는 것. 아침에 집에서 마신 물이 시원해서 좋았고, 이불을 덮지 않고 잠이 들었는데도 감기에 걸리지 않은 것이 좋았다는 식으로. 그러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노잼 시기를 건너갈 수 있지 않을까. 지금 노잼 시기를 보내고 있는 독자님이 계신다면 꼭 해보셨으면 좋겠다. 삶에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반드시 동그라미를 찾아보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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