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삶

계란 할머니 이야기_월요

2024.05.20 | 조회 2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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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요일들

우리들의 이상적인 시간 기록 일지

어릴 때 계란을 이고 다니며 집집마다 들러 팔던, 오래 적 돌아가신, 동네 할머니가 있었다. 지금은 볼 수 없는 낡은 헝겊으로 만든 둥근 똬리를 머리 위에 얹고 그 위로 계란이 담긴 커다란 광주리를 이고 다니셨다. 손도 검고 거칠고 무엇보다 가는 귀가 먹어 대화를 하려면 얼굴을 보고 또렷하게 이야기해야 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작은 단칸방에 자식들과 사는 동네 주민이기도 했다.

내가 예진이를 낳고 친정에서 산후조리를 할 때 계란 할머니도 한동안 함께 머무셨다. 좁은 집에서 며느리랑 사이가 안 좋아져서 잠시 떨어져 시간을 가지기로 하셨기 때문이다. 내가 기억하는 계란 할머니의 모습은 그때의 모습이다, 까만 얼굴을 찌푸리시고 냉장고 야채를 다듬고 계시거나 주름이 깊고 머리를 하얗게 파마하시고 손에 묵주를 쥐고 돌리고 계시던 모습.

우리는 아기를 앞에 두고 밥도 같이 먹고 차도 같이 마셨다. 나이가 많아 떨어뜨릴까 봐 무섭다고 아기는 안지 못하셨지만 아기 기저귀는 팡팡 두드려 깔끔하게 널어주셨다. 계란 할머니는 말이 많은 분은 아니셨다. 다들 고생을 했는데 나 고생한 얘기를 해서 뭐 하냐고 하셨단다. 가는 귀가 먹어서 대화가 잘 되지도 않았다. 그런데 나에게 하신 이 한 마디는 기억이 난다.

“내가 매일 예진이를 위해서 20단씩은 돌리거든.”

그 말이 고맙기도 하고 계면쩍기도 하고 그랬다. 아마 감사합니다, 하고 받았을 것 같다.

얼마 전에 어머니께서 성당 장례식에 다녀오셨다. 나는 모르는 분이지만 시골에서 자식들만 데리고 상경한 계란 할머니를 한동안 자기 집에 머무르게 해 주고 이 동네에 살게 해 주신 분이라고 했다. 그분 이야기를 하다가 계란 할머니 이야기가 나왔다. 아래 글은 우리 어머니가 들려주신 내가 알지 못했던 계란 할머니의 이야기이다.

어느 날 집에서 성당 모임을 하고 있는 것을 본 계란 할머니가 어머니에게 물으셨단다.

“글을 몰라도 성당 다닐 수 있어요?”

그렇게 해서 계란 할머니는 성당에 다니게 되셨고 반 모임도 하게 되셨다. 꾸준히 미사도 모임도 참석하시고 기도문을 하나도 외우지 못해 떨어뜨리면 어쩌나 무척 걱정을 하셨지만 영세도 받으시고 마리아라는 세례명도 받으셨다. 그러던 어느 날 모임의 한 분이 특별한 꿈을 꾸었다시며 나누고 싶다고 하셨다.

“우리들이 모여서 반 모임을 하는데 마리아 할머니가 집을 샀다고 광고를 하는 거에요… 그래서 모두 놀랍고 반가워 모임 마치고 가보자고 했지요…. 갔더니 정말 커다란 집이 있는 거에요… 아니 어떻게 이런 근사한 집을 사셨어요? 우리가 서로 감탄하고, 할머니는 좋아하며 웃으시고… 그런데 문을 열고 들어가니 바닥이 너무 경사가 심하게 기울어 있더라구요. 서 있을 수가 없을 정도로요. 아니, 왜 이렇게 바닥이 기울어 있어요? 그랬더니 반장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기도가 부족해서 그래요. 기도를 많이 하면 돼요. 그리고 꿈이 깼어요! “

모두 시선이 계란 할머니에게 모아지고 할머니는 얼굴이 빨개진 채 고개를 숙이고 계셨다. 사람들은 자자, 우리가 기도를 많이 해드립시다, 하고 모임을 마무리했는데, 아무 말 없이 돌아간 할머니는 그 후 한 달 동안 성당에도 반 모임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다들 걱정하는 와중에 어머니가 다니시는 세탁소 앞에서 할머니를 만났다. 어머니를 일부러 기다리신 것 같았다. 할머니는 대뜸 말씀하셨다. “나, 사도신경이랑 주기도문 외워요!”

어머니는 깜짝 놀라셨다. “정말요? 어떻게요? 한 번 해 봐요!”

할머니는 줄줄 하나도 틀림없이 외우셨다. 어머니 입이 딱 벌어지셨다. 성당에 얼굴도 비치지 않다가 수녀님께서 옆에서 아무리 가르쳐도 안되었던 주기도문을 혼자 외워오다니, 이건 무슨 조화인 것일까?

할머니의 설명은 다음과 같았다. 계란 할머니는 그 꿈 이야기를 듣고 집에 가셔서 서러워 우셨단다. 이생에도 이렇게 단칸방에 사는데 천국의 집도 기울어 있으면 어떡하냐고, 자기는 글을 몰라 기도도 배울 수 없는데 어쩌냐고 엉엉 우셨단다. 누워서도 눈물이 그치지 않아 귀에까지 눈물이 차서 귀가 앵앵거렸는데, 그게 자꾸 어떤 소리처럼 들렸단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

이 소리가 계속 되풀이되고 또 되풀이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홧김에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고 하셨다.

“그래요, 전능하신 천주 성부!”

그러자 다음 말이 들렸다.

“천지의 창조주를 저는 믿나이다…”

이렇게 조각조각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이 되풀이 되풀이 귀에서 들려오더라는 것이다. 외울 때까지!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의 증거가 자신만만하게 서서 미소를 짓고 있지 않은가!

할머니가 다니시던 작은 성당은 그 일로 인하여 난리가 났다. 사람마다 계란 할머니를 붙잡고 외워보라고 성화였고 할머니는 여기저기서 붙잡혀 기도문을 외우시며 좀 피곤한 인기를 누리셔야 했다. 당연히 다른 기도문도 가르치려고 주위에서 시도했지만 기적은 거기까지였다. 사실 그 두 가지 기도문으로 충분했다.

계란 할머니는 그렇게 여전히 가난하고 여전히 배운 것이 없었지만 그때부터는 주님의 기적을 함께 한 존귀한 성도가 되어 사셨다. 돈이 없어 온 며느리와의 갈등도 성당 식구들의 도움으로 이겨내셨다. 그 이야기를 듣자니 우리 딸을 위해 기도해 주신다고 하셨던 그 기도가 보통 기도가 아니구나 생각이 들었다. 서투른 엄마 밑에서 지금 어엿한 청년으로 자란 딸 뒤에는 계란 할머니의 기도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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