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닿는 길

"이성적으로 말해야겠어?"_목담

2024.05.02 | 조회 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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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요일들

우리들의 이상적인 시간 기록 일지

나와 딸아이는 사이가 좋다. 그렇긴 해도 ‘구애’를 하는 쪽은 주로 내 쪽이다. 나는 하루에 한 번 이상 딸아이에게 전화를 한다. 그냥 뭐 하나 궁금하고, 목소리가 듣고 싶고, 그러다 보니 습관적으로 하는 것 같다. 다행히도 딸아이는 아직까지는 귀찮아하지 않는 눈치다.

연애와 비교를 하자면, 일방적으로 전화를 하는 입장이니 짜증 나고 자존심이 상할 터이다. 그런데 딸아이에게 전화할 때는 이런 생각이 일도 안 든다. 왜 그런 거지? 갑자기 궁금해진다. 자식에 대한 사랑은 보상을 바라지 않는 사랑이어서 그런 것일까? 이성에 대한 사랑도 이렇게 하면 될 텐데 왜 안 되는 걸까? 짧은 순간 허튼 생각을 해본다.

그런 딸아이가 나에게 전화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대부분이 돈이 필요할 때다. 아마도 20대 전후의 청소년들을 둔 부모들은 거의 공통된 경험일 것이다. 그런데 가끔은 예상을 벗어난 일로 전화를 해오기도 한다.

며칠 전 늦은 밤, 귀가하고 있는 딸아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친구와 술 한 잔을 한 모양인데, 내가 전화를 받자마자 그날 저녁 술자리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두서없이 하기 시작한다.

함께 학생회 일을 하고 있는 친구가 자신에 대한 ‘뒷담’을 했다는 말을 듣게 된 것이다. 최근 딸아이가 친했던 친구와의 갈등에 대해 나에게 말했던 것이 생각났다. 그 친구가 왜 그러는지, 자신이 어떻게 하면 좋을지 이해를 구하기 위해 나에게 이야기를 하곤 했었다. 딸아이 역시 그 친구에 대한 불만이 있었지만, 함께 일하는 동안에는 갈등하고 싶지 않아 웬만하면 참고, 삭이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그날 술자리에서 다른 친구를 통해 ‘뒷담’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다. 딸아이는 그동안 참았던 것이 억울한 지 울먹이며 속상한 마음을 표현했다. 집에 오기도 전에 전화부터 해서 나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쏟아낸 것이다.

‘나도 하고 싶은 말이 많고, 불만이 많았지만, 둘이서 해결해야 할 일이니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계속 일을 같이 할 친구이니 솔직하게 이야기를 하고 서로 잘 해 보자고 했다, 그런데 내 앞에서는 그러자고 하더니 뒤에서는 내 욕을 한 것이더라, 그런 친구의 모습에 실망했다,...’

나는 딸아이가 사람 관계 때문에 속상해하는 모습을 보고, 내가 그동안 살면서 겪어왔던 조직 내의 갈등, 일과 관계의 문제 등이 떠올랐다. 서로 다른 소통 방법을 이해하고, 각기 다른 입장을 이해하기까지 많은 경험과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딸아이가 앞으로 겪게 될 갈등을 생각하면서 덜 상처받고 빨리 냉정해졌으면 하는 마음이 나도 모르게 앞섰다.

“사람들은 다 다르고, 다 내 맘 같지가 않아. 그런 일들이 앞으로 또 있을 거야. 서로 입장들이 달라서 그런 거니까, 너무 속상해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그런데 속상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내 마음과 달리, 이런 내 말이 딸아이의 마음을 더 속상하게 만들어 버렸다.

“엄마, 나두 그런 거 다 안다구! 그런 말 들으려고 전화한 거 아니야, 그냥 내 말 들어달라고 전화한 건데, 꼭 그렇게 이성적으로 말해야 되겠어?...”

딸아이의 목소리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나는 ‘아차, 잘못했구나’ 생각되었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딸은 믿었던 친구에게서 받은 상처 때문에 나에게 위로를 받고 싶었던 것이지 조언을 듣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냥 충분히 들어주고, ‘많이 속상했겠구나!’ 하는 한 마디의 위로, 그것이면 충분했을 텐데, 나는 그 한마디를 해주지 못한 것이다.

돕는 마음이란 상대방이 정말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피고, 그것을 내어줄 수 있어야 한다. 나는 내가 주고 싶은 것을 베풀고는 도움이 되길 바랐다. 내가 주고 싶은 것은 사실은 나의 욕망일 뿐 베품도 아니고 사랑도 아닌 것을, 그렇게 많이 경험하고도 나는 또 놓치고 말았다.

시도 때도 없이, 내가 원해서 했던 전화를, 내가 먼저 했고 더 많이 했다는 이유로, 내가 더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딸아이는 어쩌다 한 번이었지만, 나의 위로가 필요한 그 순간에 나에게 전화를 걸어 주었다.

집에 온 딸아이에게 ‘많이 속상했겠구나!’ 뒤늦은 위로의 말을 건넸지만, 딸아이는 이미 이성을 차린 후였다. 지금은 위로가 아니라 ‘사과’가 필요한 타이밍이라는 것을 말한 직후에야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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