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들은 불편한 것을 싫어한다. 특히 빠른 속도의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그러니까 내가 그러하다. 거의 평생을 대도시 서울에서 산 나는 붐비는 지하철역에서 빨리 걷지 않는 사람을 보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화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낀다. 물론 어떤 행동을 취하지는 않는다. 그만큼 화가 나지 않아서가 아니라, 멈춰 서서 그 사람에게 한마디를 할 시간에 어서 그 사람을 제치고 지상으로 올라가는 것이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살아가다 보면 불편한 상황을 피할 수 없을 때도 생기기 마련이다. 그리고 우리는 늘 불편한 상황을 회피할 수만은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불편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된다. 아무래도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 중에 하나인 것 같다. 불편한 상황을 견디는 것을 어른이 되는 것과 관련짓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진정한 어른은 하기 싫은 일을 책임감으로 하는 사람이다. 고로 불편한 상황 가운데 도망가 버릴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남기로 선택하여 해야 할 일을 해내는 사람이 진정한 어른이라는 것이다. 물론 과도한 스트레스는 건강에 해악을 초래하지만, 나는 가끔 우리 사회가 너무나 이기적인 방향으로 개인주의적이게 변모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런 현대인인 나에게 감정적으로 불편한 상황은 누군가의 악의를 느낄 때이다. 나에게 악의는 피곤이다. 어린 시절에는 나를 향한 저 뾰족뾰족한 감정이 그저 아프기만 했다면, 이제 나에게 향한 악의는 그저 나를 콕콕 찔러서 성가시게 만드는 주원인 중 하나다. 아프지 않다는 것은 아니지만, 악의란 주로 말보다는 행간, 어투, 행동 등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이러한 방식으로 표출되는 악의는 ’내가 너 때문에 기분 나쁘다’는 것을 알아달라고 떼쓰는 아이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한다. 자고로 어른이라면 본인의 감정을 말로 잘 풀어서 말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말로 표현하지는 못하면서 딱히 내 잘못이 아닌 일에 대해 나에게 어떤 해결을 요구한다는 점이 나를 참 피곤하게 만든다.
하지만 세상에는 나와 다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도 다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나를 정상인으로 추켜세우고, 그들을 비정상인으로 매도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물론 나의 생각과 논리가 적절하다고 생각하지만, 나의 이러한 의견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존재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리고 이는 반대로도 마찬가지이다. 어차피 서로 피할 수 없이 부딪히며 살아가야 하는 이 좁은 세상, 서로의 악의를 견디며 함께 살아가는 것 만이 답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 옆의 존재를 견뎌주는 것, 누군가의 악의를 그저 귀찮음 정도로 쳐 내는 성숙이 결국 우리를 진정한 어른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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