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니 뎁을 좋아했어요.
초콜릿색 머리칼과 깊은 눈동자를 지닌 그 시절의 조니 뎁을 좋아하지 않은 여자들은 아마 없었을 거예요. 조니 뎁이 나온다고 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영화를 보게 되었던 것 같아요. 그의 대표작은 누가 뭐라 해도 ‘캐리비언 해적’일 거예요. 그러나 제게 조니 뎁은 ‘초콜릿’에 나오는 집시, 루 (Roux) 로 남아있어요. 건들 건들,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루. 그러나 누구보다 상냥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남자. 프랑스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시작되는 영화는, 종교의 엄격한 규율과 도덕적인 삶을 강요받는 마을 사람들과 어느 날 마을에 찾아온 자유로운 이방인, ’비앤(Vianne)과의 갈등을 그립니다. 그리고 초콜릿은 이들을 화합하는 마법의 매개체 역할을 하지요.
시작은 분명 조니 뎁이었어요. 그런데 영화에 등장하는 초콜릿을 만드는 과정이 너무나 달콤해 보여 여러 번이고 보게 되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 조니 뎁은 온데간데없고, 제게는 오직 초콜릿만 남더라요. 아… 비앤이 타주는 알싸한 카카오를 마셔보고 싶다. 아… 진열장에 전시된 저 아기자기한 초콜릿들, 한 조각씩 먹어 보고싶다! 달콤함이 진동하는 비엔의 초콜릿공방에서 나도 함께 프랄린을 만들고 싶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초콜릿을 정말 좋아했답니다. 그 시절 ‘블랙로즈’라는, 당시 가나 초콜릿의 두 배 이상 가격의 다크초콜릿은 제가 가장 좋아한 초콜릿이었어요. 빳빳한 금색 종이 포장에, 이름도 고풍스런 블랙로즈! 용돈을 아끼고 모아 블랙로즈를 하나 사들고 재빨리 종종걸음으로 집에 와서 혼자 몰래 한 조각을 입에 넣으면 세상이 다 내 것 같았죠. ‘아… 이 달콤한 걸 평생 먹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달콤 쌉쌀한 네모 조각이 오래도록 혀끝에 남아있도록 천천히, 천천히 요리조리 굴려 녹여 먹다 보면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마는 귀한 보물 덩어리. 한 조각 더 먹을까 고민하다 오랫동안 먹고 싶은 마음에 보석 상자에 넣어놓고 내일이 오기만을 기다렸던 소중한 기억이 있네요. 그렇게 초코홀릭이었던 저에게 초콜릿이라는 영화는 처음부터 조니 뎁보다는 초콜릿에 더 눈길이 갈 수밖에 없었을 운명이었을 거예요.
조니 뎁이 여전히 멋지긴 하지만, 이제는 조니 뎁이 나오는 영화를 찾아보지는 않아요. 대신 조니 뎁을 향했던 마음이 다른 곳으로 옮겨간 것 같아요.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면, 등장인물 보다는 등장인물이 무엇을 먹는지에 눈과 귀가 쫑긋해져요. 최근에 즐겨본 넷플릭스 시리즈, 황후 엘리자베트(오스트리아의 마지막 황제와 황후 이야기)의 서사도 흥미롭지만, 식기류가 달그락거리고 만찬에서 잔을 들고 건배를 외치는 장면들이 더 끌리는 건 왜일까요? 무슨 술을 마시고 있었을까? 그때의 오스트리아 와인은 지금과 많이 다를까? 저 샴페인은 어디에서 왔을까? 프랑스와 틈만 나면 싸움을 벌인 콧대 높은 합스부르크 가문이지만 그래도 샴페인은 프랑스에서 들여왔을까? 실의에 빠져있던 황후가 기운을 차리며 찾았던 저 수프는 우리 아들도 좋아하는데!
쉿! 스크린속 등장인물들의 메뉴도 재미있지만, 생활 속에서 다른 이들은 무엇을 먹는지, 마시는지 엿보는 것도 저의 은밀한 취미입니다.
장을 보고 계산을 할 때에 앞에 있는 사람들의 장바구니를 슬쩍 보며 무슨 음식을 해 먹나, 재료를 보며 가족들을 상상하고는 해요. 식당 옆자리 테이블의 손님의 주문한 와인을 보며 어떤 취향을 좋아하는지, 특별한 와인을 시키면 축하할 일이 무엇일까 궁금해하기도 하고요. 한국에 계시는 부모님에게 안부전화를 걸면 무엇을 드시는지, 어제의 메뉴는 무엇이었는지, 이번 주 특별식은 무엇인지, 단순히 ‘식사 잡쉈어?’ 를 넘어선 진지한 인터뷰를 하곤 합니다.
초대받은 집에 가면 부엌 구경이 제일 재밌어요. 식사 준비를 해 주는 과정을 보는 게 즐거워 손들어 주방 보조를 합니다. 양파를 까고, 마늘을 다지고, 찌개의 국물을 맛보며 간을 보고. 분명 같은 음식인데, 그 사람이 묻어나는 요리에요. 슴슴 하기도 하고 오묘하기도 한. 나와는 다르지만 자꾸자꾸 손이 가는 정겨운 맛. 다른 레시피를 보며 영감을 얻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 사람의 먹고사는 모습 그대로를 보며 더 가까워지는 것 같아요.
“Happiness. Simple as a glass of chocolate or tortuous as the heart. Bitter. Sweet. Alive. 행복이란. 한 잔의 초콜릿처럼 단순하면서도, 마음처럼 복잡한 것. 쓰기도 하고, 달기도 하며, 생생히 살아있는 것.”
비앤은 초콜릿을 만들고 나누면서, 그리고 천천히 음미하면서 행복을 발견해요. 그리고 이웃들도 비앤을 통해 초콜릿 한 조각을 녹여 먹으며 인생을 더욱 생생히 살아가려 하구요. 비앤과 그의 이웃처럼 저도 먹고 마시며 삶을 온전히 느끼고 싶어요. 그리고 그 달콤 쌉쌀한 이야기를 남겨 놓고 싶어, 이 글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일상 속, 먹고 사는 소소한 이야기가 내가 제일 간직하고 싶은 저의 초콜릿 같은 보물이거든요. 조각조각 보물은 시간이 지나도 그날의 식탁이 눈앞에 펼쳐지는 마법의 힘을 선사해 줍니다. 생생하게 살아 숨쉬는 그날의 부엌 풍경, 지글지글 기름 냄새가 퍼지면 어느새 옆에서 조잘조잘 거리는 시끄럽게 보조하는 아들, 고기 한 조각 얻어먹을까 부엌에서 야옹거리는 우리 고양이 자매님들, 요리에 넣을 와인 한잔 홀짝하며 흥얼흥얼 요리하던 그때의 나, 그리고 국적 불분명한 요리를 누구보다 맛있게 먹어주는 남편.
초콜릿처럼 좋아하는 것들을 찾아내어 좋아하는 이야기로 삶을 채우고 싶어요. 나의 탐구 기록이, 행복 레시피가 되어 근사한 인생요리책이 된다면 더없이 기쁠 것 같아요. 그리고 저의 일상 이야기가 다른 이들에게 색다른 레시피가 될 수 있다면, 그래서 우리네 식탁이 다채롭고 풍성해진다면 그것만큼 귀한 것이 또 없겠죠.
이 달콤한 행복을 나누고 싶어 오늘도 요리하고, 마시고, 탐구하며 적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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