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크를 쓰고 병문안을 온 아버지의 손에는 검은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다. 뭐예요? 보신탕이다. 요즘에도 파는 곳이 있어요? 수소문해서 사왔다. 나는 그렇게까지 사올 일인가 싶었다. 최근에는 개식용 자체를 반대하는 목소리도 많으니까.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아버지에게 하지는 않았다. 그저 감사하다고 말하며 병실 구석 선반에 검은 비닐봉지를 올려두었다.
아버지 얼굴을 보는 건 오랜만이었지만, 마스크를 쓰고 있는 탓에 표정을 모두 볼 수는 없었다. 결핵균의 경우 치료 초기에는 아직 전염성이 남아 있기에 우리는 마스크를 벗지 않고 침대 반대편 끄트머리에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결핵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유행하는 코로나19 때문에라도 조심해야 했다. 폐결핵에 걸린 상태에서 폐로 감염되는 코로나19에 감염되면 위험할 수 있다던 의사의 말이 떠올랐다.
보호자 외에는 병문안이 허락되지 않아 여러 안부 전화를 받기도 했다. 소식을 듣고 일부러 연락을 준 이들도 있었다. 대부분은 기쁜 마음으로 서로의 안부를 물었지만, 어떤 대화는 유독 나를 지치게 했다. 나의 병이나 상황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그랬다.
특히 ‘왜 아프냐’고 묻는 사람과 대화할 때면 자주 말문이 막혔다. 내가 폐결핵으로 입원해 있다고 대답하면, 상대방은 다 안다는 듯 병은 스스로 자초하는 거라고 말했다. 그제야 나는 그 질문이 ‘어떤 병에 걸려서 아프냐’고 묻는 게 아니라 ‘왜 아플 때까지 몸 관리를 하지 않았냐’고 탓하는 것임을 알았다.
그는 내가 혼자 살면서 밥도 잘 챙겨 먹지 않고, 잠도 제대로 자지 않고, 운동도 게을리 하고, 규칙적으로 생활하지 않아서 안 아플 수 있는데 아팠다고 했다. 나는 딱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우리의 대화에는 ‘결핵’이라는 질병의 구체성도, ‘나’라는 개인의 고유함도 없었다. 나는 화를 내거나 왜 그런 식으로 말하냐 따지지 않았다. 다만 조금 숨이 막혔고, 되도록 빨리 그 전화를 끊어버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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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아프냐'는 질문에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했을까. 원인이라고 부를만한 건 무수히 많아서 하나하나 따져보자면 끝이 없을 텐데. 결핵은 감염병이라 나도 어디선가 감염된 거라고, 발병 시기가 사람마다 달라 감염원을 찾기 어렵다고, 어떤 사람은 균에 감염되어도 평생 증상이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나의 생활 습관은 악화의 이유일 수는 있어도 직접적 원인은 될 수 없다고, 과학적 사실을 들먹이며 자신의 아픔에 대해 변명이라도 해야 했던 걸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대답이 궁색해서라기보다는, 질문 자체가 온당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부당한 질문을 받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코로나19의 전국적 대유행으로 우리는 ‘역학조사’라는 말을 쉽게 접할 수 있게 됐다. 스마트폰의 QR코드 기능을 활용해 감염자의 동선을 파악했고, 감염 경로가 예측되어 실시간으로 재난문자가 전송됐다. 거미줄처럼 촘촘한 시스템을 통해 사람들은 자신이 다녀간 곳에 감염자가 있었는지 확인하고, 빠르게 검사를 받아 추가적인 확산을 예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역학조사가 정밀하게 이루어질수록 부작용도 생겨났다. 개인의 아픔이 당사자의 부주의 때문이라는 여론이 그랬다. 사람들은 아픔의 이유를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판단하기 시작했다. 누군가 특정한 시간대에, 특정한 장소에 갔기 때문에 아픈 거라고 했다. 그러게 조심했어야지. 저런 데는 가지 말았어야지. 괜히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나 주고 말이야. 이유가 분명해보일수록 사람들은 타인의 아픔 위에 쉽게 말을 얹었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코로나19 감염자들 중 일부는 자신의 감염 사실을 부끄러워하고 숨기기도 했다. 역학조사의 본래 목적이었던 ‘감염병 예방’에도 부합하지 않는 결과였다. 게다가 질병은 조심한다고 피할 수 있는 종류의 사건이 아니었다. 오히려 개인의 선택과는 무관하게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사고(재난)에 가까웠다. 나와 전혀 다른 삶을 살았을 누군가도 언제든지 이러한 사고에 휘말릴 수 있었다. ‘왜 아프냐’는 질문은 애써 변명해야 할 이유도, 당위도 없는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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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몸 상태를 물었을 때도 나는 괜찮아지고 있다고 짧게 대답했다. 전화 너머로 들었던 막막한 질문을 마주보고 들으면 더 힘들어질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아버지와의 대화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렀다. 아픈 이유는 뭐라데. 그냥 뭐 운 안 좋아서 걸린 거죠. 의사가 다른 이야기는 안 하더나. 결핵균 자제는 누구나 감염될 수 있데요. 저는 과로 때문에 면역력이 떨어지면서 증상이 나타난 경우라고 했어요. 아니…… 혹시 유전이나…… 그런 말은 안 하더나. 에이, 결핵 자체가 유전병이 아닌데요. 그렇나.
마스크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버지는 뭔가 석연찮은 표정이었다. 마주앉은 내가 아니라 더 먼 곳으로 초점을 두고 있는 것 같았다. 혹시 내 탓인가 해서……. 네? 아빠도 결핵이었다이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제야 나는 아버지의 시선이 어디에 머물러 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기억을 되돌려보고 있던 것이다.
20대의 아버지는 직업훈련소를 졸업하고 첫 직장에 다니기 시작했다. 울산에 세워진 규모가 큰 목공소에서 공무 일을 했는데, 손재주가 좋아 일도 금방 잘 배웠다. 아버지는 거기 계속 다녔다면 생계에 큰 지장이 없었을 거라고 했다. 편모가정이었던 아버지가 고생 끝에 겨우 들어간 번듯한 직장, 그곳을 나온 이유가 결핵 때문이었다.
1980년대에 결핵은 불치병은 아니었지만 지금보다는 훨씬 큰 병이었다. 무엇보다 환자를 대하는 사회적 인식과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급한 대로 연차를 사용해 고향으로 돌아와 치료를 받았다. 그리고 다시 회사로 돌아가지 못했다. 치료 기간이 길고 다른 직원에게 병을 옮길 수 있다는 게 복직이 거부된 이유였다. 아버지는 문제를 제기할 틈도 없이 직장을 잃었다.
할머니는 아버지가 없는 형편에 제대로 ‘못 먹어서’ 아프다고 여겼다. 주변에서 아무리 아니라고 말려 봐도 날이 갈수록 수척해지고 허옇게 뜨는 아버지의 얼굴을 볼 때면 까무러치셨다고. 할머니는 온 동네를 돌며 몸에 좋다는 건 다 구해왔다. 귀하다는 약초나 삼, 녹용을 달인 보약, 개구리나 꼼장어, 무엇을 가져오든 아버지는 억지로 먹으려고 노력했다. 그중 할머니가 가장 자주 구해오신 게 보신탕이었다.
그때는 지금보다 더 흔했지. 아버지는 선반 위에 올려 진 비닐봉지를 보며 중얼거렸다. 금방 날아갈 듯한 얇은 표면이 용기의 무게에 가만히 짓눌려 꼿꼿한 형상을 하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의 그림자 같기도 했다. 오랜 시간 닫혀 있던 기억에 햇살이 들이치며 만든 그림자. 아버지는 거기에 나의 아픔을 포개어 보았던 걸까. 그때 당신은 부모의 마음이었을까, 아니면 세상에 내버려진 듯 당혹스런 이십대 당신의 마음이었을까. 가늠조차 하기 어려웠던 나는 자신이 답할 수 있는 질문 앞에서만큼은 단호해지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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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은 온전히 개인의 탓인가. 사회역학자 김승섭 교수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그는 저서 <아픔이 길이 되려면>에서 개인의 질병에 사회적 책임이 있음을 드러낸다. 단순한 의견이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거쳐 쌓아온 연구 사례를 통해 이를 더 선명히 보여준다. 김승섭 교수는 단호히 말한다. “사회적 환경과 완전히 단절되어 진행되는 병이란 존재할 수 없”다고, “사회적 원인을 가진 질병은 사회적 해결책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그가 자신이 연구하는 ‘사회역학’이란 학문을 소개하는 글에서 나는 막혔던 말문이 트이는 것 같았다.
질병에는 “그물망처럼 얽힌 여러 원인들”이 있다. 하지만 결핵의 원인은 결코 유전이 아니며, 못 먹어서 생기는 병은 더더욱 아니다. 결핵은 결핵균이 감염된 후 면역력 저하로 인해 활동하기 시작하면 증상이 나타난다. 그런데 이러한 증상을 ‘사회문화적 환경’으로 분석하면 새로운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면역력 저하’라는 원인에는 제대로 언어화 되지 못한 사정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1997년 IMF 당시 결핵환자가 급증했다는 통계는 이러한 이면의 사정을 유추하게 한다. 그들 대부분은 면역력이 떨어질 때까지 쉴 수 없었다.
나도 유추할 수 있다. 20대의 아버지는 하루 이틀이 아니라 몇 년에 걸쳐 자신을 혹사했을 것이다. 개인의 선택으로 보이는 그 결정에는 사실 가정환경에서 비롯된 불안이나 기대, 압력이 작용했을 것이다. 기침이 계속 되어도 가벼운 감기로 여겼을 것이고, 주변에서 병원에 가보라고 타이른 후에야 마지못해 발걸음을 옮겼을 것이다. 그리고 아픔을, 아픔으로 인한 부당한 대우와 질문을 자신의 탓으로 여기며 괴로워했을 것이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당신도 그랬을 것이다.
기술의 발전으로 이뤄낸 코로나19 역학조사는 달랐을까. 아쉽지만 그곳에도 여전히 언어화 되지 못한 사정이 있었다. 코로나19 집단 감염 대부분은 불안정한 노동환경에서 일어났다. ‘구로 코리아빌딩 콜센터’가 그랬고, ‘부천 쿠팡 물류센터’가 그랬다. 재택근무가 불가능한 근무 형태, 노동자의 안전에 책임지지 않는 간접고용 형태가 근본적 원인이었다.
역학조사는 어쩔 수 없이 그곳에 가야했던 사람들. 아무리 몸이 아파도 쉴 수 없던 사람들. 무리해서라도 계속해서 일을 해야 했던 사람들. ‘밥도 잘 챙겨 먹지 않고, 잠도 제대로 자지 않고, 운동도 게을리 하고, 규칙적으로 생활’할 수 없던 사람들. 아플 수밖에 없던 사람들의 사정을 보여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둘러싼 구조적 차별을 외면한 채 모든 책임을 당사자에게 떠넘겼다. 정작 아픔에 얹어진 무수한 말들 중에는 꼭 필요한 말이 없었다.
아빠 탓이 아니에요.
하고 싶은 모든 이야기에 가장 앞서 그렇게 말했다. 나의 아픔은 당신 탓이 아니다. 당신의 무엇도 나를 아프게 한 적 없다. 당신은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다. 우리의 아픔에 무엇 하나 죄책감을 느낄 필요 없다. 그건 부당한 일이었다. 말도 안 될 정도로 부당한 일이었다.
그렇나. 마스크 때문에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버지는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조금은 다행스러운 표정으로, 조금은 후련한 표정으로. 결국 모든 책임을 스스로 져야 했던 그 시절의 당신을 온전히 위로할 수 없겠지만, 당신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처음으로 결핵에 걸려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그 후에도 몇 가지 이야기를 더 하다가 헤어졌다. 나는 다시 혼자 남은 병실에 멍하니 있다가, 아버지가 남기고 간 비닐봉지를 주섬주섬 꺼내어 보았다. 둥근 플라스틱 용기에 담긴 보신탕과 일회용 수저가 두 개 들어 있었다. 이건 아버지가 자신의 아픔을 기억하는 방식이었다. 나는 내 아픔은 어떻게 기억할까. 그 끝에서 무엇을 건넬 수 있을까. 그러면서 우리 사회는 아픈 이들에게 무엇을 건네고 있는지 떠올려 보았다.
환자나 코로나19 감염자가 아니라도 마찬가지였다. 노동자, 청년, 여성, 기초수급자, 장애인, 산업재해 피해자, 재난 유가족……. 저마다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아픈 사람들에게 우리 사회는 너무 쉽게 ‘왜 아프냐’고 물었다. 때로는 당사자의 의견을 반영하겠다는 취지와 그들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한 질문이었지만, 때로는 아픔의 책임과 원인 심지어 해결책까지 개인에게 떠넘기는 부당한 요구였다.
당사자가 너무 많은 요구를 받는다는 건, 누군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지 않다는 의미가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이 누구인지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그들이 당사자에게 무엇을 전가하고 있는지, 우리가 믿고 있는 촘촘하고 과학적인 시스템이 그들을 어떻게 책임에서 자유롭게 하는지 따져 물어야 하는 게 아닐까. 나는 우리의 질문이 닿아야할 온당한 방향을 생각하며 수저를 들었다. 동시에 닫힌 마음을 열고, 자신을 탓하며 숨겨두었을 누군가의 기억을 덥힐 언어를 찾아 용기를 뒤적였다. 국은 아직 뜨거웠다.
'아픔에 이름이 생겼다'
결핵 환자로 지냈던 경험을 진솔하게 전달하는 에세이입니다. 단순한 치료 과정보다는 ‘환자’라는 정체성이 어떻게 생겨나는지, 자신의 아픔을 말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허태준
직업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현장실습생을 거쳐, 산업기능요원으로 지역 중소기업에서 근무했다. 당시의 경험으로 <교복 위에 작업복을 입었다>를 썼다. 회사를 그만둔 후 모든 삶은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는 믿음으로 우리 사회의 이름 없는 시절에 대해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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