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베낀 명화에 관하여

세상의 모든 다정한 I에게_삶은 슬프고 아름다워_내가 베낀 명화에 관하여_오랑

2024.12.12 | 조회 9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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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문화

총 20여명의 작가들이 세상의 모든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매일 전해드립니다.

두 아이와 물고기와 게. 종이에 붓펜과 수채.
두 아이와 물고기와 게. 종이에 붓펜과 수채.

물고기야 물고기야.’

우리 아이 고추를 문 게는 이쁘다.’

오늘 그림을 베껴 그렸습니다.

푸르고 너른 바다에서 아이 둘이 놉니다. 물고기도, 게도 함께 깔깔거립니다. 발가벗은 아이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해맑게 웃습니다. 또 웃습니다.

바다를 떠올리며 아이 마음이 되어 부드러운 붓펜으로 선이 끊어지지 않게 이어갑니다. 지울 수 없는 선들이 종이 위를 흐릅니다. 선이 지나갈 때마다 깔깔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립니다. 볼록한 엉덩이와 배를 지날 때는 꼬르륵 소리가 들립니다. 물고기 비늘을 지날 때는 선들이 펄떡입니다. 게의 집게발을 이을 때는 살짝 따끔하기도 합니다. 모두 즐겁습니다. 다정한 소리가 흘러넘칩니다. 바다는 푸른 빛으로 반짝이고 발가벗은 아이들의 살갗은 붉은빛으로, 초록빛으로 반짝반짝합니다. 파닥거리며 노는 물고기와 커다란 집게발을 흔들며 노는 게도 신이 났습니다. 기쁨이 넘칩니다. 바다는 다정하고 상냥합니다.

그림을 따라 그리는 동안 행복한 마음이 차올랐습니다.

나의 바다는 나의 처음 바다는 어땠는지 아쉽게도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입술을 달싹거리며 바다를 불러봅니다.

바다! 나의 처음 바다, 푸른 바다, 기쁨의 바다, 슬픔의 바다, 나의 언제나 바다.

내게 기억되는 바다는 사내아이 하나와 할머니가 등장합니다.

아이가 묻습니다.

할머니는 여기 와 봤어요?”

할머니가 대답합니다.

할머니는 바다가 처음이란다.”

아이는 눈이 커져서 또 묻습니다.

정말로 바다에 한 번도 온 적 없어요?”

할머니가 웃으며 대답합니다.

그래, 바다도 할머니가 처음이지.”

이제 아이는 성인이 되었습니다. 할머니는 기억을 잃어버렸고 언어마저 잃어가고 있습니다.

슬픈 바다입니다. 그러나 다정한 말들이 잔잔하게 파도치는 바다입니다.

당신은 한없이 다정합니다. 보고 싶습니다. 손잡고 싶습니다. 껴안고 싶습니다. 함께 비를 맞고 싶습니다. 같이 걷고 싶습니다. 사랑을 속삭이고 싶습니다. 상냥한 당신에게선 향기가 납니다. 수박향입니다. 오이향입니다. 당신 곁에 있으면 상큼한 기분이 차오릅니다.

당신에게 처음 바다는 언제인가요?

내가 따라 그린 그림의 화가는 자신을 화공이라 불렀습니다. 스스로를 낮추는 말이지요. 그 화공은 참 다정한 사람인 것만 같습니다. 그가 아내에게 남긴 수많은 편지 중에 단 한 편만 읽어보아도 그가 얼마나 다정한 사람인지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너무도 다정하여 화공은 아내를 발가락 군이라거나 아스파라거스 군이라 불렀습니다. 웃음꽃이 절로 피어납니다.

하루빨리 기운 차려 내가 좋아하고 좋아하는 발가락 군을 마음껏 어루만지도록 해주시오. 아! 나는 당신을 아침 가득히, 태양 가득히, 신록 가득히, 사랑하고 사랑하고 열애해 마지않소.

하하! 조금은 오글거리지만, 이 얼마나 다정한 글인지. 화공은 엽서에 글은 쏙 빼고 그림으로 아침 가득히, 태양 가득히, 신록 가득히 사랑하고 사랑한다는 말을 대신하기도 했습니다.

소가 오리에게. 종이에 연필과 수채_오랑.
소가 오리에게. 종이에 연필과 수채_오랑.

1940년 12월 25일에 보낸 이 엽서화(9*14)에는 반은 물고기고 반은 소인 동물이 등장합니다. 사람의 형상을 한 것 같은 오리도 나옵니다. 언뜻 보아도 소가 오리에게 깊은 사랑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그림입니다.

나의 남덕 군에게

당신이 사랑하는 유일의 사람 아고리 군은 머릿속과 눈이 차츰 더 맑아져서 자신이 넘치고 넘쳐서 번쩍번쩍 빛나는 머리와 안광으로 제작, 제작-표현 또 표현을 계속하고 있다오. 한없이 살뜰하고. 한없이 상냥한. 오직 나만의 천사여, 더욱더 힘을 내어, 더욱더 올차게 버티어 주시오. 기필코 화공 이중섭 군이 가장 사랑하는 현처 남덕 군을 행복의 천사로 높게 아름답게 널리 빛내어 보이겠소. 자신만만. 나는 당신들과 선량한 사람을 위하여 참으로 새로운 표현을, 더없는 표현을 계속하고 있소.

내가 가장 사랑하는 아내 남덕 천사, 만세 만세.

*아고리 : 일본 유학 시절 친구들이 턱(あご,아고)이 긴 중섭을 성()과 붙여 부른 애칭.

*남덕 : 남쪽에서 온 덕이 있는 여자, 라는 뜻으로 이중섭이 부른 부인의 이름.

이렇게 다정한 편지를 쓰고 사랑스러운 그림을 그린 사람은 화가 이중섭(1916. 9. 16 ~ 1956. 9. 6.)입니다. 거침없는 황소 그림과 빛나는 은지화로 아주 유명하지요. 호는 대향大鄕입니다.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태어났습니다. 평양 공립종로보통학교와 평북 정주 오산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고 1936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제국 미술학교 문화학원에서 공부했습니다. 후배인 야마모토 마사코를 만나고, 두 사람은 열렬히 사랑해 1945년에 원산에서 결혼합니다. 독립한 이후 전쟁이 터져 1950년 12월에 아내와 두 아이를 데리고 월남합니다. 부산을 거쳐 제주도에 머물다 다시 부산에 정착하는 고단한 피난 시절을 겪습니다. 일본에서 장인의 부고가 날아들고 1952년 6월 아내와 두 아들을 일본으로 보냅니다. 홀로 남았던 이중섭은 1953년 7월에 일본으로 건너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가족들을 한 차례 만나게 되지만 일주일 만에 홀로 돌아옵니다. 이중섭은 자신의 무능을 책망하며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애를 썼습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살기 위해 그림에 매진합니다. 통영과 진주에서 보낸 시절이 있었고 1954년 6월에 서울로 갑니다. 1955년에 두 차례 개인전을 엽니다. 1월은 서울 미도파 화랑에서, 4월은 대구 미국공보원 갤러리에서 그의 그림이 걸렸습니다. 결과는 좋지 않았습니다. 그림이 팔렸지만, 수금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중섭은 크게 실망하게 됩니다. 그 후에 그는 병을 얻게 됩니다. 대구, 서울 등 여러 병원을 전전하며 회복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정릉에서 보낸 시절이 있었고 다시 병이 재발하여 서울 서대문 적십자병원에서 1956년 9월 6일, 마흔 생일을 열흘 앞두고 홀로 외롭게 세상을 떠납니다. 그의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이남덕)는 그가 떠난 뒤 70년 가까이 홀로 지내다 2022년 8월 13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정신병원에서 앞으로 일주일이면 퇴원입니다. 마음 놓아요. 너무 당신을 만나고 싶어 무리한 탓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남덕 군에게 태현과 태성을 맡겨놓고 고생시킨다는 게 너무 미안합니다. 부족한 나를 부디 이해해주길 바라요.” _1955년 12월에 도착한 편지.

그림은 하나도 없는 채로 검은 잉크가 번진 편지는 온 힘을 다해 쓴 마지막 편지였습니다.

이중섭과 절친이었던 시인 구상이 떠난 이중섭에게 보내는 추도문은 담담하고 또 다정합니다.

그는 더 이상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그림 도구가 없어도, 그림을 그려도 그리지 않아도, 아무것도 아쉬울 게 없는 세상으로 여행을 떠났으리라.

더 이상 스스로를 책망하지 않아도 괜찮아. 평온하게 잠들기를.

 

<겨울은 끝났다>

겨울은 끝났습니다. 포근한 빛은

밝은 천지에 가득 넘쳐.

아무리 슬픔 마음도

대기 속으로 흩어져

이 기쁨에 굴복해야만 합니다.

(중략)

여름이여 오라! 가을도, 겨울도 다시 찾아오라!

어떤 계절도 나에게는 분명 즐거울 터이니

오오, 그대여, 내 좋은 사람이여!!

그대여 오라, 그대(남덕 군)여 오라.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에도 적었던 이 시는 프랑스 시인 폴 베를렌의 시입니다.

이중섭은 시를 읽고 시를 쓰고 시를 좋아했습니다.

소의 말_이중섭 높고 뚜렷하고 참된 숨결 나려 나려 이제 여기에 고웁게 나려 두북 두북 쌓이고 철철 넘치소서 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 아름답도다 여기에 맑게 두 눈 열고 가슴 환히 헤친다.

그의 생은 몸을 움츠리게 만드는 겨울이었습니다. 그는 영원히 잠들었고 그로 인해 그의 겨울은 끝이 났습니다. 그런데도 살아있는 동안 그는 봄과 여름을 그리고 가을을 그렸습니다.

그의 생은 추운 겨울이었지만 그림만은 온통 환하고 따스하고 풍요롭고 즐겁고 행복한 계절이었습니다.

두 어린이와 복숭아. 종이에 연필과 수채.
두 어린이와 복숭아. 종이에 연필과 수채.

멀리 떨어져 있는 가족이 이중섭에게는 크나큰 버팀목이었습니다. 두 아들 태현, 태성이 읽을 수 있도록 전부 가타카나로 쓴 편지에 이 그림을 덧붙였습니다.

더욱더 건강해지고 열심히 공부하세요. 아빠가 야스카타 군과 야스나리 군이 복숭아를 가지고 노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사이좋게 나눠 먹어요.

태성이 아빠의 편지를 보고 아빠는 다정해서 너무 좋아.”라는 말을 했다는 소식에 이중섭은 아주 기뻐했다고 합니다.

<가족을 그리는 화가>, 1950년대 전반, 은지에 새김, 유채, 15.2*8cm
<가족을 그리는 화가>, 1950년대 전반, 은지에 새김, 유채, 15.2*8cm

그에게 살아 움직이는 생명들은 모두 이쁘고 다정하고 소중한 것들이었습니다.

“나는 어쩌면 이 그림들에게 빚을 지고 사는 건지도 몰라요. 우리 아이들이 그렇고, 아내가 그렇고, 또 바닷가의 게가 그렇지요. 서귀포에 살 때 배가 고파서 바닷게를 잡아먹곤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내가 몹쓸 짓을 한 것 같아요. 그래서 게의 영혼을 달래주기 위해 그린 것이지요.”
<그리운 제주도 풍경> 1954년 전후 추정. 종이에 잉크. 35*24.5cm
<그리운 제주도 풍경> 1954년 전후 추정. 종이에 잉크. 35*24.5cm

예술은 무한한 애정의 표현이오. 참된 애정의 표현이오. 참된 애정이 충만함으로써 비로소 마음이 맑아지는 것이오. 마음의 거울이 맑아야 비로소 우주의 모든 것이 올바르게 마음에 비치는 것 아니겠소?

전시장 자신의 그림 앞에서.
전시장 자신의 그림 앞에서.

이중섭은 춥고 어두운 날도 맑은 마음으로 우주에 존재하는 자연의 모든 생명이 함께 어우러진 즐거운 모습을 그렸습니다.

<가족과 첫눈> 1950년대 전반, 종이에 유채, 32*49.5cm.
<가족과 첫눈> 1950년대 전반, 종이에 유채, 32*49.5cm.

겨울입니다. 찬 겨울날이 시작된다고 합니다. 여기에도 새하얀 눈이 나리길 바라봅니다.

그림을 그리고 시를 읽고 글을 쓰는 일상이 더없이 소중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서로에게 다정하고 상냥한 말이 필요한 때입니다.

우리는 다정한가요?

설령 오글거리는 말일지라도 우리는 사랑을 표현하고 살아가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정하고 상냥한 말들이 삶을, 세상을, 우주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먼저 건넨 다정한 말이 우선 나부터 구원할 것입니다.

당신은 요즘 어떤가요? 잘 지내나요? 언젠가 꼭 만나고 싶습니다. 그날까지 안녕히 잘 지내세요. 저는 이 글을 끝으로 <내가 베낀 명화에 관하여>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잘 읽어주셔서 참 고맙습니다. 그리울지도 모르겠습니다.


참고한 도서.

이중섭_고독한 예술혼. 엄광용. 산하.

그리움 너머 역사가 된 이름 이중섭, 그 사람. 오누키 도모코 지음. 최재혁 옮김.

이중섭 편지와 그림들 1916-1956. 이중섭 지음. 박재삼 옮김. 다빈치


내 안으로 들어온 명화를 보고 느끼고 베껴 그리며 생각한 것으로, 시와 짧은 단상들입니다.

글과 그림_오랑

추웠던 어느 저녁, 누군가 내민 재킷의 온기를 기억하며 따스한 일들에 대해 생각한다. 내 안의 온도를 높이려고 읽고 쓰고, 그림을 그리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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