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입학하고 나서 처음 떠나는 견학이었다. 샤워하고 거울 보면서 치장을 하는 데 한 시간 정도를 썼다. 기껏해야 청바지에 티셔츠와 카디건을 입는 수준이었지만. 집에서 학교까지 버스를 타고 가는데 한 시간 정도가 걸렸다. 가는 중간에 거울을 꺼내서 몇 번씩 얼굴을 확인했다. 코 옆에 땀구멍이 커다랗게 보이는 것이 신경 쓰여서 기름종이를 꼭꼭 눌러 문질렀다.
단과 대학 건물 앞에는 'C대학교 사회복지학과' 라고 써 붙인 빨간색 관광버스 두 대가 서 있었다. 조교 선배와 신입생 몇몇이 버스 옆 화단 모서리를 둘러앉아서 자판기 커피를 홀짝이는 모습이 보였다. 다 모여서 출발하려면 한참은 더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건물 안 과방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커다란 테이블 위에 가방을 던져놓고 모여 있던 몇 사람이 인기척을 듣고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호기심과 호감이 가득한 눈을 하고 장난스럽게 손을 흔들어 보이는 그 몇 사람이 반가워서 웃음을 터뜨렸다.
사회복지가 뭔지는 잘 몰랐다. 어쩌다보니 사회복지학과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사회복지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지만 원하던 곳에 원서를 쓰기에는 점수가 모자랐다. 한번도 받아본 적 없는 최저 성적이 하필 수능 성적이었다. 재수를 하려면 학원비가 더 든다는 소리를 듣고 나서 집 근처 국립대학교에 점수 맞춰서 원서를 쓰기로 했다. 미래 사회에는 사회복지가 전망이 좋을 거라는 담임 선생님의 막연한 한마디가 나를 결심하게 만들었다. 영혼이 없는 것 같은 담임 선생님의 표정이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전망이 좋다’는 말은 왠지 지금의 나를 다른 곳으로 데려다줄 거라는 기대 같은 걸 하게 만들었다. 예를 들면 영구임대아파트에서 사는 지금의 삶과는 차원이 다른 삶 말이다.
신입생들이 모두 버스에 앉았다. 이윽고 전공 교수님이 조교선배와 함께 메가폰을 들고 버스에 올랐다. 이번 사회복지시설 견학지는 한 지역 복지관과 근처 아파트라고 했다. 공들여 채비를 하고 버스로 한 시간에 걸쳐서 온 길을, 학교에서 대절한 관광버스를 타고 다시 돌아가게 되었다. 견학을 간다는 아파트는 우리집이었다. 대학교 전공 첫 견학지가 우리집이라니. 관광버스를 타고 우리집으로 견학을 가다니.
견학을 가기 며칠 전이었다. 삐삐로 몇 통의 메시지를 받았다. K방송국의 유명 프로그램 작가라고 했다. 방송국이라니 마음이 들떴다. 삐삐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에 입학하게 된 사연을 방송에 나와서 자세히 소개해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처럼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는 어린이들에게 희망과 본보기를 줄 수 있는 기회라고 했다. 봄날 저녁, 해가 떨어져 으슥해진 학교 공중전화부스였다. 그렇게 추운 날씨가 아니었는데 수화기를 든 손이 덜덜 떨렸다. 나를 대단하다고 추켜세우는 온갖 말을 듣으면서도 몸이 굳어지는 상황이 혼란스럽고 서글펐다.
기대하던 답변을 내놓지 않자 작가는 언성을 높였다. 부모의 장애와 가난은 부끄러운 게 아니라고, 그것을 부끄러워하는 학생이 부끄러운 거라고,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는 동생들에게 귀감이 되지는 못할망정 스스로에게까지 떳떳하지 못한 거냐고 몰아붙였다. 반응이 시원찮다고 여겼는지 급기야는 나를 보고 비겁하다고 했다. 나는 방송에 나가고 싶지 않을 뿐, 떳떳하지 못한 것도 아니고 부끄러운 것도 아니라고 소리를 지르고 전화를 끊었다. 잔디밭 어딘가에서 소주를 홀짝이며 나를 기다리는 친구들에게 다시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깜깜한 교정을 돌아다니면서 숨죽여 울었다. 이렇게 볼 위로 흐르는 눈물이야말로, 스스로 떳떳하지 못하고 부끄러워하는 증거인 건가 싶어서 눈물이 그치질 않았다. 하루종일 나만 기다리고 반기는 엄마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는 것도 버겁고 부담스러웠다.
생방송이었다. 그 작가가 만든 방송이 얼마나 대단한가 지켜보아야겠다는 오기, 혹은 부끄러움에 사로잡혀서 놓쳐버린 것이 하나라도 있다면, 내 눈으로 확인해 보겠다는 미련 같은 것이 복잡하게 뒤섞인 마음으로 방송을 지켜보았다. “엄마가 이렇게 아프다가 곧 죽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마음이 어땠나요?” 일곱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는 질문을 받자마자 목이 메어서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아나운서는 이런 식으로 그날 방송에 나온 아이들을 하나같이 울렸다. 단체로 눈물을 닦지도 않는 걸 보니 어떤 연출을 위한 지시를 받은 것 같았다.
“저는 요 앞 네거리에서 한복점을 하는 사람입니다. 저기 저 빨간색 땡땡이 원피스를 입은 여자아이 사연이 제일 안 됐네요. 제가 저 아이에게 이십만 원을 후원하고 싶습니다.” 생방송 중에 연결된 시청자와의 전화통화 내용이었다. 빨간색 땡땡이 원피스를 입은 여자아이는 그날 눈물을 가장 많이 흘렸고 그래서 가장 안쓰러워 보였다. 전화로 언성을 높이던 방송 작가는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는 어린이들에게 희망을 보여주겠다고 호언장담했지만, 정작 그런 말로 불러 모은 아이들을 재료 삼아 이 아이들보다 덜 어려운 사람들에게 일종의 ‘안심’을 선물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배신감이 들었다.
관광버스는 아파트 안에 위치한 복지관 앞에 우리를 내려놓았다. 사회복지사 한 명이 나와서 우리를 맞았다. 그를 보자마자 등뼈를 타고 손끝까지 전기가 흐르는 것 같았다. 얼마 전에 나를 데리고 동네 경찰서 장학금 전달식에 다녀온 사회복지사였다. 뿐만 아니었다. 그는 우리 엄마가 몸이 불편한 걸 알고 집에 반찬도 배달해 주는 사람이었다. 교수님 앞에서 우리 엄마 안부를 묻기라도 하면 어떡하지? 동기들 앞에서 후원금은 잘 썼냐고 물어보면 어떡하지? 우리집으로 함께 반찬 배달을 가보자고 하면 어떡하지? 속이 타서 미칠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 사회복지사가 나를 본 후에도 철저히 모른 척 연기를 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기 시작하면서부터 조금씩 편안하게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안심을 할 수가 없었다.
복지관 앞마당에서 새빨간 조끼를 입고 행색이 별난 아저씨 아줌마들과 어울려서 햇빛을 쐬고 있을 아빠가 또 다른 복병이었다. 더군다나 그 새빨간 조끼는 ‘C대학교 사회복지학과’라는 글자가 새겨진 우리 과 조끼였다. 아빠는 그 조끼에 얼룩이 묻어도, 냄새가 나도 벗는 법이 없었다. 낯선 동네에서 과 조끼를 입은 아빠를 발견한 순간, 아이들이 달려가 반갑다고 아는 척이라도 할까봐 무서워졌다. 아니, 더 무서운 건 아빠가 이 무리를 찾아와 내 얘기를 꺼내는 순간이었다. 그랬다. 아빠는 늘 내 얘기를 하고 다녔다.
미래 사회에는 사회복지가 전망이 좋을 거라는, 그래서 지금의 나를 왠지 다른 곳으로 데려다줄 거라는 기대 같은 걸 하게 만들었던 사회복지는, 내가 가장 도망쳐버리고 싶은 이곳으로 나를 다시 데리고 돌아오고는 했다. 그러나 그 안으로 다시 돌려놓는 것이 아니라 안도 밖도 아닌, 경계 어디엔가 어정쩡하게 세워놓는 것이었다. 대학교 첫 견학지로 우리집을 간 것처럼 말이다. 나는 매일매일, 교과서 안에 적힌 장애인이라는 단어 안에서 엄마 아빠를 보았고 빈민이라는 단어 안에서 우리 가족을 보았고 영구임대아파트라는 단어 안에서 우리집을 보았다. 심지어 서비스 대상자라는 단어 안에서도 나를 보았는데, 동시에 나는 서비스 제공자의 입장에 서기도 했다. 수업시간마다 내가 쪼개지는 것 같았다.
집을 코 앞에 두고 관광버스를 타고 학교로 갔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왔던 그날 저녁, 아빠는 방안에서 과 조끼를 입은 채 TV를 켜놓고 혼자 앉아 화투패를 돌리고 있었다. 아빠를 보자마자 물었다. 오늘 낮에 어디에 있었느냐고. “시내 나갔다 왔지.” 무심코 답하는 그 소리가 어찌나 반갑던지 발끝까지 짜릿하게 웃음이 났다. 무슨 좀비나 되는 것처럼 두리번거리며 아빠를 찾아 경계하던 그날, 복지관 앞마당에서 과 조끼를 입은 아빠를 만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야말로 하루를 무사히 마쳤다는 안도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날의 웃음은 대학교 첫 견학지로 우리집을 갔던 날, 그 어떤 기억보다도 나에게 질기게 남아버리고 말았다. 아빠의 대답을 듣고 나서 웃느라고 잔뜩 잡아당긴 얼굴 근육의 느낌 하며 몸통을 갑갑하게 채우던 묵은 걱정 같은 것들이 시원하게 통과해 나가던 날숨의 느낌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다시 감각되고는 했다.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감각들이었다.
어쩌면 아빠는 그날 복지관에서 나를 보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러고도 다른 곳에 있었다고 대답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그러나 아빠에게 그날 일을 다시 물어보지는 않았다. 물질적인 궁핍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그 감정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서 혼란스러웠다. 어쩌면 내가 속해 있다고 생각하던 곳에서 타인이 된 것 같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이쪽에서도, 심지어 저쪽에서도.
“너거 엄마 병신이지?” 초등학교 3학년 어느 날, 같은 반 남자아이가 우리 엄마를 보았다며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몸을 꼬아서 뇌성마비 장애를 흉내 내었던 적이 있다. “그래. 우리 엄마 병신이다. 어쩔래?” 눈을 치켜뜨고 이 말 한마디를 했더니 정신 나간 것처럼 설쳐대던 아이가 할 말을 잃고 풀이 꺾이던 순간을 두고두고 기억해 왔었다. 움찔하고 눈빛이 흔들리던 순간, 자기가 너무 비열한 짓을 했다 싶었는지, 스스로를 혐오하듯 분열된 모습을 보이며 주춤하던 그 아이의 표정을 자랑처럼 보관해 왔었다.
부모님 몸이 불편하고 가난한 건 부끄럽지 않지만 그걸 부끄러워하는 것만큼은 부끄러워하겠다던 긍지였다. 그러나 그것은 무참하게 쪼그라들었다.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는 어린이들에게 희망을 보여주겠다고 호언장담하던 방송을 보고 나서, 어려운 사람을 돕겠다는 사회복지학개론서를 배우고 나서, 나처럼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는 어린이들에게 희망과 본보기를 줄 수 있는 대학생 언니 누나가 되고 나서 말이다. 하필 엄마가 가장 기다려오던 순간이었고 아빠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던 순간이었다.
어쩌면 내가 그룹홈에서 일하는 것을 좋아하게 된 이유는 이 압도적인 시선의 힘이 가장 희미해지는 곳이 바로 그룹홈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주체와 객체가 나뉘고 강력한 누군가가 문제를 가진 대상을 향해 힘을 베풀어버리는 순간, 누군가의 손길을 바라던 사람의 마지막 긍지까지도 빼앗아가버리는 아이러니를 가장 잘 비껴갈 수 있는 곳이라서 말이다. 오늘 아침도 아이는 식탁에 앉아서 반찬 투정을 하고 숙제는 다 했냐는 내 말을 씹으며 방문을 쾅 닫는다. 아이는 아이답게 나는 이모답게 그렇게 한판을 하고 나서 저녁엔 또 아무렇지도 않게 날씨 이야기를 할 것이다. 서로가 곁에 있어서 고맙다는 생각을 하면서. 가장 평범하고 가장 힘 빠지는 이 순간이야말로 가장 고마운 순간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보이지 않는 가슴’
그룹홈에서 일하는 보육사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에 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그룹홈에서 일하는 나의 이야기가 당신과 우리의 이야기로 나누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수영
아동그룹홈에서 일하는 사회복지사입니다. 내 시간의 45%는 네 아이와 함께 그룹홈에서 보내고, 나머지 55%는 내가 낳은 두 아이와 남편이 있는 집에서 보냅니다. 집과 일터, 경계가 모호한 두 곳을 오가며 겪는 분열을 글쓰기로 짚어보며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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