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아끼던 칼이 하나 있었다. 하도 갈고 다듬어서 윤이 나던 단도였다. 무섭게 생기긴 했어도 과일 깎아 먹을 때나 꺼내 쓰던 칼이었는데, 아빠는 그걸 집어들 때마다 전국팔도로 여행을 다니며 사냥을 하고 다녔던 이야기를 무용담처럼 꺼내고는 했다. 특히 친구들과 함께 노루를 사냥해서 그 칼로 생간도 꺼내먹고 피도 받아다 마셨다고 하는 부분에서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하면, 나는 그 장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나가는 것 같았다.
아빠는 다리가 한쪽 없었다. 통상 사람들이 “왼발, 오른발”하면 떠올릴 수 있는 동작이, 아빠한테로 가면 “딱, 따가닥, 딱”하고 복잡한 소리를 내었다. 오른쪽 다리를 앞으로 내딛고 나서, 어깨부터 웨이브를 넣어서 만든 반동으로, 의족을 낀 왼쪽 다리를 앞으로 내밀어 보내면, 지팡이로 최종적으로 균형을 잡는 식이었다. 아빠에게는 그게 한 걸음이었다. 이렇게 지팡이를 짚고 절뚝거리는 모습에, 낡아서 마구 삐걱거리는 의족 소리까지 요란하게 보태고 나면 아빠를 사이에 두고 사람들이 홍해처럼 갈라지고는 했다. 어디서 주웠는지 모를 깃털로 장식한 중절모에, 노란색 선글라스를 매미처럼 낀 아빠는, 내가 보기에도 별난 모습이었다.
아빠는 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비가 오는 날도 눈이 오는 날도 참지 못하고 밖을 나서야 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어느 날엔 지체장애인협회 사람들이던가, 평소 알고 지내던 상이군인 아저씨들이던가, 돈을 모아서 봉고를 대절해다가 기어이 여행 같은 여행을 진짜로 떠난 적도 있었다. 결국 차가 뒤집어져서 놀지도 못하고 한 달이 넘도록 입원을 해야 했지만 말이다. 머리도 깨지고 갈비뼈도 부러질 만큼 큰 사고였는데, 그 후로도 아빠는 비슷한 여행을 수차례 떠났고, 비슷한 사고로 두어 번 입원을 더 했다. 어떤 부상도 트라우마도 아빠의 여행에 대한 열정을 주저앉힐 수가 없었다. 이럴 때마다 나는, 아빠의 단도에 얽힌 팔도여행기 중에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희망사항일까 되짚어보고는 했다.
뇌성마비 장애인이었던 엄마의 여행을 떠올리면 마음이 더 복잡해진다. 엄마는 ‘장애’라는 씨실에 ‘여성’이라는 날실까지 엮어서 풍파를 살았던 사람이다. 장애인 교회에서 단체로 여행을 떠나는 날마다 엄마는 물을 마시지 않는다고 했다. 화장실에 갈 때마다 누군가 본인을 업고 나서야 하는 번거로움을 줄이고 싶기 때문이라고 했다. 뙤약볕 아래 갈증 하나도 시원하게 해갈할 수 없는 날, 엄마는 뭐가 그리 좋다고 제일 예쁜 옷을 골라 입고 채비를 서둘렀을까?
다섯 살 무렵인가, 엄마와 보건소에 다녀온 날이었다. 갈 때와 달리 올 때는 엄마와 나 단 둘이서 택시를 타고 온다고 휑한 거리에서 하염없이 서 있던 장면이랑 매우 힘이 들고 화가 났다는 기억이 꼭 붙어서 남아 있다. “아침부터 여자가 타면 재수 없다고 안 태워 주는가 보다.” 그렇게 이른 아침도 아니었는데, 엄마는 나에게 그 말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문밖을 나서는 별일도 아닌 일이, 매번 엄청난 사건이 되는, 엄마의 세상을 이해하려면 나는 한참 용을 써야 했다.
내가 겨우 걸음마나 하던 시절, 대구 시내에 있는 달성공원을 방문해서 사진사를 통해 찍어놓은 우리 세 사람의 사진 두어 장을 본 것 같기는 한데, 그야말로 우리가 여행이란 걸 나란히 경험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내가 다 커서 결혼을 하고 차를 사고 나서도 두 사람의 휠체어를 몽땅 싣고 다닐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아주 가끔이나마 병원을 함께 가기는 했었다. 가는 곳곳이 문턱과 계단으로 이어진 그 험난한 여정을 마치고 나서는 비장애인인 나조차 매번 몸살을 앓고는 했다.
‘여행’ 하면 나는 나의 결핍을 떠올린다. 의족 안에 넣어둔, 그 짧은 다리의 살갗이 빨갛게 벗겨지도록, 길거리를 쏘다니는 것 말고는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었던 아빠라는 골짜기와, 여행지로 나설 때마다 입술이 하얘지도록 물마시기를 마다하던 엄마라는 골짜기를 넘지 않고서는 여행의 낭만과 여유를 나는 얘기할 수가 없을 것 같다. 시혜와 동정이라는 굴절 없이 마음껏 문밖을 활보하는 것이 불가능하던 엄마아빠에게 과연 여행은 무엇이었을까?
내게 여행은 ‘다른 세계’에 속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오래도록 보이지 않는 어떤 경계 밖의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온 것 같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나는 경계 밖의 사람은 아니었다. 단지 여행의 풍요를 내 것인양 누리고 싶을 때마다, 내 안에 설명할 수 없는 죄책감이랄 것이 매번 막아섰을 뿐이다.
오디션 프로그램 <싱어게인>에서 30호 가수가 했던 말이 머리를 맴돈다. 자신은 항상 애매한 사람이었다고, 그래서 존재의 의의를 구체화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했다. 애매한 경계에 있기 때문에 오히려 더 많은 걸 대변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고 하면서 말이다.
내 글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여행이 주는 낭만과 여유를 담담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세계와 문밖을 나서는 사건 자체가 모험이 되는 세계, 그 경계 어디쯤 서서 어떤 목소리도 가질 수 없었던 내가, 지금 여기에 주단을 깔아놓고 경계 위 사람들의 묵은 이야기를 기다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엄마 아빠는 더 이상 여행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행’이라는 단어 앞에서 목마름을 느끼는 사람들의 삶은 어제와 다름없이 진행 중이다. 여행의 낭만과 여유를 마음껏 이야기할 수 없는 사람들 말이다. 여행은 즐거운 것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그 즐거움이 더욱 가혹한 세상이 여전히 진행 중이다.
‘보이지 않는 가슴’
그룹홈에서 일하는 보육사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에 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그룹홈에서 일하는 나의 이야기가 당신과 우리의 이야기로 나누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수영
아동그룹홈에서 일하는 사회복지사입니다. 내 시간의 45%는 네 아이와 함께 그룹홈에서 보내고, 나머지 55%는 내가 낳은 두 아이와 남편이 있는 집에서 보냅니다. 집과 일터, 경계가 모호한 두 곳을 오가며 겪는 분열을 글쓰기로 짚어보며 살아갑니다.
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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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znslow@funandlearn.co.kr
항상 글이 너무 좋습니다. 저도 돌아가신 아버지가 그리워지네요.
수영
깊이 읽고 감상 나눠주시며 글을 완성시켜주셔서 감사합니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함께 그려주신 모습이 떠올라서 위안이 많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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