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래 심줄 같은 지난날
아마드는 지금 막 파리에 도착했다. 4년째 별거 중이던 아내 마리와 정식으로 관계를 끝내기 위해서다. 다음날 아침 9시, 독촉하는 마리와 함께 법원에서 이혼 절차를 마쳤다. 그러나 관계는 서류처럼 깔끔하게 끊어지지 않는다.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다고 말하는 마리에게 부아를 낸다.
마리는 새로운 연인 사미르와 동거 중이다. 아마드와 이혼하고 나서 사미르와 결혼할 계획이다. 이란에서 지내던 아마드를 파리로 부른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호텔에 묵겠다는 아마드를 전에 함께 살던 집으로 데려오고, 딸 루시의 문제를 일임하는가 하면, 한 집 한 식탁에서 아마드와 함께 사미르와 생활하는 복잡한 모습을 보인다. 결국 마리와 사미르는 다툰다. “그랬다면 임신은 왜 했겠어?” “옛날 남자 잊으려고 그런 거지. 억지로 잊고 새 삶 시작하려고. 문제는 아직 못 잊었단 거야.”
사미르는 애 딸린 유부남이다. 아내 셀린이 음독으로 자살을 기도한 이후로 8개월째 혼수상태다. 매일 뭔가를 쏟고 부수고 말썽을 부리는 어린 아들 푸아드와 함께 마리 집에서 지내고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 병원에 입원한 아내가 의식을 찾을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마리는 이런 사미르를 보며 “집사람의 빈자리를 메우는 기분이 든다”고 털어놓는다.
루시는 마리와 첫 번째 남편 사이에 태어난 딸이다. 엄마가 새로 사귀는 사미르가 못마땅하다. 그래서 사춘기 딸은 집을 겉돌며 속을 썩이는 중이다. 아니다. 생부보다 믿고 따르는 두 번째 아빠 아마드에게 ‘실은 사미르가 문제가 아니라 엄마가 남자와 금방 또 헤어질까 봐 걱정’이라고 말한다. 마음을 바꾸라고 말해달라고, 엄마가 사미르와 사귀는 건 아마드를 닮아서라고 말하기도 한다.
“지금 분명히 말하는데 이제 다 끝난 일이야. 지금은 뱃속에 애를 생각해서라도 이제 다 잊자.”
“그럴 수 있을까?”
“그렇게 해야지.”
마리와 사미르, 대화를 마치고도 두 사람의 눈빛은 계속 흔들린다.
❚ 엇갈리는 말, 바벨탑을 쌓다 흩어진 사람들처럼
영화는 마리와 아마드가 공항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만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유리벽 때문에 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지만 두 사람은 마치 상대방의 모든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마주 보고 웃으며 자기 말을 한다. 제대로 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유리벽이 사라지고 그들이 나누는 대화가 오디오로, 자막으로 나오면서 두 사람의 엇갈린 말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시작한다. 유리벽이 여전히 가로막혀 있는 것처럼. 호텔 예약이 안 됐다는 사실에 분통이 터진 아마드와 아마드의 말을 확신할 수 없어 예약을 하지 않았다는 마리. 남자를 새로 만나 동거를 시작했고 재혼할 거라는 얘기도 모두 메일로 써서 보냈다는 마리와 메일을 받은 적이 없다는 아마드. (와중에 루시는 엄마 마리가 주고받는 메일들을 몰래 지켜보고 있다. 그래서 엄마가 말을 하지 않아도 아마드가 집에 온다는 사실을 다 안다.)
아마드가 파리에서 친하게 지내던 친구 샤르야 부부와 나눈 대화다.
- 아마드 : (아내와) 아직 같이 살아?- 샤르야 : 그럼, 통하는 데가 있으니 여태 같이 살지.
- 아마드 : 뭐 아직도?
- 샤르야 : 국기 색깔이 같잖아.
- 샤르야 아내 : 웃기지 마. 말이 너무 많아서 안 들어.
듣지 않는다는 점에서, 자기 말만 한다는 점에서, 사미르와 그의 아내 셀린 역시 다를 바 없는 행보를 보여주었다.
❚ 엇갈리는 마음, 독약이 되다
사미르의 아내 셀린은 음독으로 혼수상태다.
“여자가 남편 세탁소에 가서 그것도 아들 앞에서 세제를 들이마신 게 단지 그냥 죽고 싶어서겠어? 그냥 수면제 먹고 혼자 죽어도 되잖아.”
루시는 ‘마리와 사미르가 바람피워서’ 셀린이 자살을 기도했다고 생각한다. 아니다. 사실은 본인 때문에 셀린이 죽었다고 생각한다. 셀린이 죽기 전날 세탁소로 전화 걸어 통화한 후, 마리와 사미르의 메일을 전해줬다. 루시는 셀린이 그 메일을 보고 자살했다고 생각한다. 다들 루시가 사미르를 왜 그렇게 싫어하는 거냐고 묻는 사이, 루시는 울면서 이렇게 고백한다. “내 잘못으로 아내를 잃은 남자랑 어떻게 봐? 아들 얼굴을 어떻게 보냐고?”
어렵게 루시의 고백을 들은 사미르는 루시가 오해한 것이라 대답한다. 아내가 죽기 4~5일 전쯤, 세탁소 손님과 얼룩 때문에 크게 다툰 후 자살을 했다는 거다. 우울증이라 사소한 일로 자살까지 한 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사미르는 루시의 오해를 풀기 위해 당시 셀린의 동선을 쫓다가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된다. 죽기 전날 루시의 전화를 받고 이메일 주소를 알려준 사람은 아내 셀린이 아니라 세탁소 직원 나이마라는 사실을.
“왜 그랬어? 왜 그랬냐고? 왜 집사람인 척하고 메일 주소 줬어?” “죄송해요.” “사과하란 게 아니야. 이유를 말해.”
손님과 얼룩 때문에 다투던 날, 셀린은 나이마를 붙들어 경찰이 오면 상황을 증언하라고 독촉했다. 미등록이주민 신분이라 범죄자처럼 경찰에게 쫓기던 나이마는 필사적으로 자리를 피할 생각으로 사미르를 부른다. 이윽고 사미르가 와서 나이마의 손을 잡고 손님이 보는 앞에서 부인을 해고한다. “넌 여기 있어. 당신이 가.”
“날 미워했어요. 우리 둘 사이를 의심했어요. 셀린이 그런 거예요. 분명해요. 그런 얼룩은 처음 봤다고요. 제가 경찰한테 잡히길 바란 거예요. 항상 날 걸고넘어지니까 제 생각에…….”
“한 번도 널 자르라고 한 적 없어.”
“아니, 맨날 저만 보면 못 잘라서 안달했다고요. 우리가 아무 사이 아닌 걸 알리고 싶었어요. 사장님이 매일 짜증만 내고 생각이 딴 데 있으니 날 의심한 거예요.”
“네가 한 짓 때문에 내 아들의 엄마가 8개월째 식물인간이야.”
“제 탓이 아니에요.”
“네가 계집애한테 메일 주소를 줬잖아.”
“메일 안 봤어요. 봤으면 다 알았겠죠. 왜 내 앞에서 세제를 마셨겠어요? 알았다면 약국에 가서 죽든가 당신 앞에서 그랬겠죠. 왜 나한테 왔겠어요?”
사미르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다. 알면 알수록 누가 범인이라고 특정할 수 없게 되는 상황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느 누구도 범인이 아니라고 할 수 없는 상황 때문이었을 것이다. 본인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고 생각한 셀린의 마음이 지금에 와서야 조금씩 그려지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 가능한 순간
영화는 사미르가 셀린과 대화하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셀린이 입원한 병원이었다. 방금 셀린을 진찰한 듯한 의사가 사미르에게 말했다. 셀린이 기억할만한 몇 가지 향수로 병원에서 의식 반응 검사를 해봤지만 셀린은 아무 반응이 없다고.
“그럼 배에 긁힌 상처는 무의식적인 거예요? 전에는 긁힌 상처가 없었어요.”
사미르는 의사 말만 듣고 셀린에게서 돌아서지 않았다. 외려 셀린이 몸에 남긴 흔적으로 하는 말에 귀 기울였다. 그리고 셀린이 좋아하던 향수를 직접 목덜미에 뿌리고 셀린을 향해 몸을 숙였다. 사미르가 셀린에게 말했다.
“이 향수 냄새가 느껴지면 내 손을 꽉 잡아봐.”
셀린이 사미르의 손을 꽉 잡았다.
❚ 사랑 때문에 애태우는 사람들
마리든 아마드든 누구든, 영화 속 인물들이 나눈 대화가 답답하기는 했지만, 주인공들을 탓하고 싶지는 않았다. 인간 사이에 완벽한 소통 자체가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애끓는 마음은 늘 엉켰고 그나마 풀어보려고 꺼낸 말은 일을 키우기도 했으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붙잡으려고 한 행동은 상대에게 닿지 못했고, 나를 향한 마음은 뒤늦게 도착했다. 심지어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해 끊어낸 관계는 고래 심줄처럼 질기게 매달려 나를 괴롭혀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순간이 영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서 그 아픔 속으로 뛰어들고 또 뛰어들었던 것 같다. 당신과 나는 너무나 다르지만, 그래서 너무 아프지만, 이 모든 걸 감수하고서라도 당신과 함께하는 이 순간에 비길 것이 없는 것 같아서다. 이 마음이 무엇인지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보이지 않는 가슴’
그룹홈에서 일하는 보육사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에 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그룹홈에서 일하는 나의 이야기가 당신과 우리의 이야기로 나누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수영
아동그룹홈에서 일하는 사회복지사입니다. 내 시간의 45%는 네 아이와 함께 그룹홈에서 보내고, 나머지 55%는 내가 낳은 두 아이와 남편이 있는 집에서 보냅니다. 집과 일터, 경계가 모호한 두 곳을 오가며 겪는 분열을 글쓰기로 짚어보며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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