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을 통해 한국을 알 수 있다?
그는 항상 그렇듯이 토요일마다 피자를 주문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피자를 배달하자 이상함을 감지한 그는 용기 내 그녀의 상황을 물었고, 그녀는 히키코모리가 됐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가 고립에 빠지지 않도록 하려고 그는 안간힘을 다해 바깥세상에 뛰쳐나오지만, 도쿄가 전부 히키코모리 상태에 빠져있음을 알게 된다. 그녀를 겨우 찾은 그는 말한다. "나와주세요. 지금 나오지 않으면, 평생 못 나와요". 이 영화는 은둔하는 사람의 생활을 어렴풋이나마 추측할 수 있게 하고, 곧 도래할지 모르는 사회적 재난인 고립과 은둔 사회를 엿볼 수 있게 한다.
봉준호 감독의 단편 영화 《흔들리는 도쿄》는 10년 동안 히키코모리로 고립을 선택했던 남자가 피자 배달부 여자를 사랑하게 되는 이야기다. 히키코모리의 사전적 정의는 '오랫동안 기간 집에 틀어박혀 사회와의 접촉을 극단적으로 기피하는 행위, 혹은 그런 사람을 칭하는 일본의 신조어'다. 이 문제를 곪아 터지게 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은둔 특성상 정확한 실태조사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일본의 경우 2010년 기준으로 이미 100만 명을 가볍게 돌파한 것으로 추정했다.
최근에는 더 심각하다. 2019년 일본 내각부가 발표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40~64세의 중고령 히키코모리는 약 61만 3천 명이다. 이들 중 70% 이상은 은둔 기간이 7년 이상이고, 고령 부모의 연금이 가족의 주된 소득이다. 그뿐 아니다. 15~39세의 히키코모리는 54만 1천 명에 이른다. 은둔하는 사람이 일본의 심각한 사회문제가 된 것은 앞서 말했듯 최근 일이 아니다. 이들의 인간다운 최소한의 삶을 국가가 보장한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감히 사회적 재난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이는 일본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멀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한국도 은둔하는 청년이 있다.
일본과 한국은 인구에서 비슷한 경향을 보인다. 일본에서 저출생 문제가 부각된 것이 1989년이고, 우리나라는 2002년이다. 65세 이상 노인이 인구의 20% 이상을 차지하는 '초고령 사회'에 일본은 2006년 진입했고, 이에 질세라 우리나라도 2025년 초고령 사회로 진입할 전망이다. 1인 가구의 증가도 마찬가지다. 2020년 기준으로 일본은 38%, 한국은 31.7%다. 대략 15~20년의 차이를 두고서 한국과 일본은 평행선을 그리고 있는 셈이다. 봉준호 감독의 단편영화가 2008년 개봉작임을 감안하면, 《흔들리는 도쿄》는 더 이상 한국의 미래가 아니라 현실이다.
지 앞가림 지가 알아서 하는 거지.
"요즘 젊은이들은 너무 오냐오냐 자라서 문제야" 혹은 "젊은 애들은 조금만 힘들어도 그만둔다니까?". 아마도 대부분 한 번쯤은 들어본 말 일테다. 수년 전 유행했던 '노오오오력'도 사실상 단어만 다를 뿐이지, 맥락은 같다. 이처럼 사회문화적 동조 현상은 비겁하게도 사회 문제를 개인에게 올곧이 떠넘긴다. 경쟁 사회에서 도태되는 사람은 낙오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2022 서울시 고립·은둔 청년 실태조사'에 따르면, 45.5%가 '실직하거나 취업에 어려움을 겪어서'라는 이유로 고립 생활을 시작했다. 충격적인 것은 조사에서 성인기 이후 부정적 경험을 물었을 때, ‘내가 원했던 때에 취업을 못했던 경험(64.6%)’가 가장 많고, 다음은 ‘내가 원했던 직장에 들어가지 못했던 경험(60.7%)’ 순이다. 중소기업은 청년 구인난을 호소하는 반면, 2023년 고용조사에서 구직 활동을 하지 않은 채로 ‘쉬었음’이라고 응답한 20대 인구가 35만 7000명에 이르렀다.
언뜻 보면 기성세대가 말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젊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한다.'라며 눈높이를 낮추라는 말이 자동으로 떠오른다. 이미 고립된 청년은 개인 노력 부재와 나태, 능력 없음으로 낙오한 것일까? 절대 그렇지 않다. 사회적으로 규정된 '삶의 경로'가 있다. 예를 들면 공부를 잘해서 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에 진학하고, 연봉이 높은 대기업이나 '사'자 돌림의 전문직을 쟁취하는 것이다. 이 '삶의 경로'는 목표를 설정하고 묵묵히 노력만 한다고 해서 모두가 '원하던' 결과를 얻을 수 없다. 아무리 높게 잡아도 5%가 안 될 것이 분명한 게임이다. 바꿔 말하자면 95%는 실패자로 낙인찍힌다. 심각한 문제는 다른 삶의 경로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
취업은 청년의 은둔과 고립에 있어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대기업 채용은 계속 줄어들고, 연금개혁 이후 공무원 매력은 떨어지고, 전문직에 대한 온 국민적 갈망이 의료 붕괴 사태로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우리 사회가 선망하는 관념은 커지지만, 선망하는 곳으로 취직할 수 있는 확률은 계속 줄어든다. 더군다나 다른 기술은 배운 적도 없을뿐더러, 단기간 배울 수 있는 기술이라면 당연히 사회가 선망하는 직업일 확률도 낮다. 청년이 취업을 포기하는 것은 사회가 선망하는 욕구의 미충족 때문이며, 청년의 고립에 있어 '앞가림'은 이제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사회구조적 문제다.
역시, 돈 이야기를 하는 것이 가장 빠르겠지요?
고립 청년을 지원해야 하는 이유는 돈 문제기도 하다. 만약 청년 고립을 지원하지 않았을 때의 가상 시나리오를 보자면 다음과 같다. 청년의 고립은 중장년의 고립으로 이어진다. 일본의 중장년 히키코모리를 떠올리면 된다. 다행이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현재 고립 청년은 대부분 모아둔 돈을 소비하거나 가족에게 지원받는다. 하지만 더 이상 도와줄 가족이 없게 되거나, 모아둔 돈을 다 쓰게 되면 이들은 국가에서 보장하는 최저한의 삶을 살아야만 한다. 즉 기초생활보장수급자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청년의 고립은 거시적 관점에서 보면, 정기적 수입이 없으니 소비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이는 내수 경제가 돌지 않도록 하고, 그 결과 사회 활력이 줄어든다. 이것은 생산성과 경제 성장률에도 영향을 미친다. 유행에 민감한 시기인 청년을 타깃으로 하는 패션이나 사치, 뷰티, 문화, 여가 등의 산업도 마찬가지다. 보통 이러한 소비패턴은 은퇴 후 소득이 줄어든 시기인 노인에게서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청년 시기부터 나타나는 이러한 소비 패턴은 장기적인 경제침체를 부르는 원인이 된다.
심지어 장기적 고립을 경험하는 경우 정신 건강뿐 아니라 신체 건강에도 해롭다는 것은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2022년 부산시 은둔형 외톨이 실태조사'에 따르면 현재 은둔자 77.8%와 과거 은둔 경험자 79.2%가 자살을 생각한 적이 있으며, 현재 은둔자 21.5%와 과거 은둔 경험자 17.7%가 자살을 시도했다. 심각한 사회 문제인 '자살'마저 돈으로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지만, 자살 예방과 사후 처리에서도 막대한 사회 비용이 든다. 지금도 청년 1인 가구 거주 형태가 계속 늘어나는데, 단언컨대 고독사로 이어지는 경우 역시 늘어날 것이다.
우리는 복지의 대상으로 '아동'이나 '노인'을 흔히 떠올린다. '아동'은 미래라는 이유로, '노인'은 과거의 노력에 대한 보상이라는 이유가 많다. 하지만 '청년'을 떠 올렸을 때는 어떠한지 묻고 싶다. 열 번 넘어져도 열한 번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존재라거나, 아프니까 청춘이라거나, 건강한 몸과 마음과 같은 이미지가 먼저 떠오를 테다. "나 때는..."으로 시작하는 말이 앞설 수 있다. 하지만 현재 상황은 전혀 나 때와 같지 않다. 그때는 노력만으로 내가 속한 경제 계급을 바꿀 수 있었지만, 지금은 계급을 바꾸기는커녕 부와 가난이 대물림되는 시대다. 심지어 국가 차원에서도 사회 비용 증가는 계속된 예산을 담보한다. 국가도 함께 가난해진다는 뜻이다.
김만권 교수의 <외로움의 습격>에 따르면, '외로움'은 급격한 기술 발달과 산업화의 영향으로 늘어난 것이다. 기술 발달로 산업화되며 기계가 사람의 일을 대신하면서 실업자가 생겼다. 직장을 잃게 된 사람은 자신의 쓸모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고, 스스로를 불필요한 존재라 여긴다. 이 과정에서 자아를 상실하고,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지 못하기에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도 어렵다. 고립이라는 상황이, 고립된 사람을, 더욱 고립시키는 이유다.
이처럼 '청년 고립'은 청년 세대만의 독립적인 문제가 아니다. 현재의 청년은 과잉 경쟁 사회 속에서 학령기를 보냈고, 기성세대는 호황기의 경제 성장기를 보냈던 자신의 경험으로 현재의 청년을 이해하지 못하고, 급격한 기술 발달로 스스로의 쓸모를 증명하기 힘들어졌다. 초연결 시대에 소수의 성공을 그 어느 때보다 가까이서 바라보며, 스스로를 비참한 존재로 만들 수밖에 없는 세대다. 단 하나의 문제가 아니기에 하나의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은 의미 없다. 하지만 그중 하나는 사회 구성원의 인식 전환임이 분명하다. 지 앞가림은 지가 알아서 할 수 없는 청년이 있다는 것을 나눌 수 있음으로 해결, 관계의 시작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관계를>
앞으로의 연재는 자발적으로 고립을 꾸준히 선택했던 청년이, 고립의 다양한 형태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자발적 고립을 개인의 문제로 바라볼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세상에는 다양한 형태의 고립이 존재합니다. 사회복지사인 동시에 고립에서 벗어나려 노력하는 청년으로서 <그럼에도 관계를>을 쓰려합니다.
김재용
사회변화를 위한 글쓰기를 지속하며, 현재는 사회복지사로 노동 중입니다.
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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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잇
이름 좋은 대학을 졸업 유예하고서도 일이 없는 상태로 3년을 부모님 집에서 보냈습니다. 대학교 다닐 때 함께 동아리를 했던 형이 국비 지원으로 프로그래밍이라도 배워보라고 해준 말이 도전이 되어서 중소기업에 취업한 지 어느덧 5년 차가 되었습니다. 아직 혼자 살며 집도 없이 고립감이 크게 느껴질 때가 있지만, 그럼에도 관계를 통해 주어진 삶을 묵묵히 잘 살아가려 합니다. 고맙습니다.
세상의 모든 문화 (4.52K)
독자님만의 '무업 청년'으로서 경험을 나눠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앞선 연재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고립이나 은둔이 드러나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이에 대한 세분화된 서비스도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그럼에도 관계를'을 통해 더 많은 고립 유형이 드러나도 괜찮은 것임을 쓰고 있습니다. 고립에는 고립을 드러나지 못하도록 내모는 사회적 환경이 필히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깊이 읽어주심에 다시금 감사드립니다. 오늘 하루도 고운 하루 되세요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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