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지는 함께 사는 가족이 되었다.
누군가 우리 집 현관문을 두드리거나 초인종을 누른다면, 나는 몹시 당황스러울 것이다. 함께 사는 강아지가 짖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물론 집주인에게 강아지와 함께 살 예정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입주했다. 하지만 계약할 당시에 강아지로 인한 민원이 발생하면 퇴거당할 수 있음을 합의했던 터라, 예상치 못한 외부인의 방문은 항상 조심스럽다. 더군다나 강아지와 함께 살 수 있는 집은 찾기가 쉽지 않기에, 나는 집을 지키는 강아지를 지키는 파수꾼이 되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2년 기준으로 '1인 가구'의 수는 750만 2천 가구로 전체의 34.5%였다. 세부적으로 보면 청년 1인 가구가 36.5%, 고령 1인 가구가 35.3%를 차지했다. 1인 가구가 증가하는 것처럼, 급격히 증가하고 있는 것이 있다. 바로 '반려동물 양육 가구'다. 2022년 기준으로 552만 가구에서 1,262만 명이 반려동물과 함께 살고 있다. 반려동물 등록제 신청이 아직 저조한 것을 감안하면 그 수는 더 많을 것이 분명하다.
1인 가구와 반려동물 양육 가구에 대한 교차분석 자료가 없어서 명확한 인과 관계는 추론할 수 없지만, 반려 동물과 함께 사는 1인 가구는 상당할 것이다. 즉 나를 포함한 1인 가구가 반려 동물과의 교감으로 외로움을 관리하고 있을 수 있다. 반면에 오히려 고립감 경험 정도를 심화하는 경우도 가능하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나는 본가에서 독립하기 전까지만 해도 고립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다. 일주일에 3일 정도는 친구나 선후배, 직장 동료들과 저녁 약속이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독립하면서 강아지와 단 둘이 살게 되었다. 강아지를 내가 온전히 책임져야 한다는 뜻이다. 나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강아지와 산책을 한다. 비가 오지 않는 한 매일 산책을 하는데, 보슬비 정도로 비가 내리면 비를 맞으면서라도 산책을 한다. 내가 출근하면 혼자 있을 강아지에 대한 죄책감, 책임감, 걱정 등은 쏟아지는 비로 인해서 씻겨 내려가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의 경우에도 어린아이가 고된 육체 놀이 후 잘 자는 것처럼, 강아지도 산책 후에 잘 잔다. 내가 출근해 있는 시간 동안 깊게 잠들기를 바라다보니까, 평일에 약속을 잡는 경우가 거의 없다.
아무리 하루에 두 번 산책을 한다고 해도, 내가 두 번이나 외출하는 것은 강아지가 허락하지 않는다. 퇴근하고 집에 왔다가 바로 다시 외출하면, 분리 불안 증상을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피치 못할 사정으로 약속이 있는 날이면 휴가를 사용한다. 다만 내가 유별난 것은 아닌 듯하다. 1인 가구 청년 전부의 삶을 대변할 수 없지만, 반려동물에 대한 인식이 많이 변한 것 같다. 법에 적힌 것처럼 반려동물을 물건으로 보지 않고, 책임져야 하는 존재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이는 반려동물의 수명 증가와 건강한 사료, 케어 서비스 등 반려동물 관련 산업 시장의 확장세가 증명한다. 예상치 못한 외부인의 접근이 두려운 1인 가구 청년인, 나는 강아지와 가족이 되었다.
1인 가구와 반려 동물 양육, 사회적 고립.
누군가는 '1인 가구와 반려 동물 양육 가구 증가, 사회적 고립이 무슨 관계가 있냐?'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시민 의식이나 사회 문화, 삶의 양식 등이 변하면서 다른 것에 영향을 준다. 의료와 과학 기술 발달로 건강한 삶이 관리가 가능해짐에 따라 인구가 고령화되는 것이 그 예다. 이는 의료나 과학 기술의 발달 정도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사회 구조인지에 따라 고령화의 정도는 다르게 나타난다. 선진국의 상징인 미국의 경우에 충치 치료를 위한 '레진' 정도는 편의점에서 구매 후, 직접 시술해야 한다.
세 가지 관계를 살펴보기 전에,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외로움'과 '사회적 고립'의 혼용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외로움은 '홀로 되어 쓸쓸한 마음이나 느낌'을 뜻하며, 일시적이고 다른 사람과의 접촉과 단절이 자발적이지 않다. 하지만 사회적 고립은 '개인과 사회의 접촉이 거의 혹은 완전히 없는 상태'를 뜻하며, 일시적일 수도 있지만 오랜 기간에 걸쳐 지속될 수도 있다. 또한 다른 지인이나 가족, 친구 등 상대와 의사소통이 없거나, 사람을 만날 기회가 생기더라도 자발적으로 회피하는 경우가 많다.
사회적 고립의 상태에서는 대부분 외로움을 느낀다. 즉 외로움은 사회적 고립의 필요조건으로 볼 수 있지만 외롭다고 해서 모두가 사회적으로 고립되는 것이 아니며,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있다고 모두가 외로운 것 또한 아니다. 사회적 고립은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나도 자발적 사회적 고립의 상태다. 1인 가구의 거주 환경임과 동시에 강아지에 대한 책임감으로 사람을 만나는 약속을 피한다. 사회복지사로서 일을 하지만, 일터에서도 고립을 경험할 수 있다. 노리나 허츠의 <고립의 시대>에서도 나와 있듯이, 직장에서 사적인 대화 없이 업무와 관련한 대화만을 종일 나누다 온 사람의 경우에도 외로움과 고립감을 느낄 수 있다.
과거에 비해 반려 동물을 가족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진 인식 변화와 1인 가구 위주의 거주 형태는 사회적 고립을 증가시킬 수 있다. "미안하다. 집에 강아지가 혼자 있어서". 누군가 나에게 밥을 먹자고 했을 때, 혼자 사는 내가 가장 많이 하는 거절의 말이다. 나는 상대와 밥을 먹기 싫었던 것이 결코 아니다. 다른 이유가 있었음에도 반복되는 거절은 다시 권유하지 않게 한다. 나는 "재용 독립 만세"를 외친 후 5년 동안, 점차 고립되고 있다.
1인 가구와 반려 동물의 조합이 언제나 고립을 유발한다는 뜻은 아니다. 이를테면 반려 동물과 감정의 교감을 깊게 나누는 종 이거나 독립적인 생활을 선호하는 종인지, 보호자의 생각이나 가치관, 책임감 등에 따라서도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절대 다수인 개와 고양이를 기준으로 보자면, 1인 가구와 반려 동물 양육가정이라는 변수가 고립에 영향 미칠 가능성이 높다. 특히 반려 동물에 대한 정서적 교감의 정도가 높은 보호자일수록 고립감의 정도가 높을 수 있다.
비록 가스 검침원이나 통/반장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당황하며 고립되고 있음을 깨닫는다. 나는 사회적으로 고립됨을, 동시에 빈번한 외로움을 느낀다. 그래서 주말에 테니스를 시작했다. 온전히 사회적 고립 때문만은 아니지만, 고립감 해소에 함께하는 팀 스포츠는 충분히 도움이 된다. 평일에 두 번의 외출은 어렵기에 주말을 활용하고, 함께 운동한 사람들과 항상 점심을 먹는다. 강형욱 훈련사 말에 따르면, '강아지도 자신의 보호자가 고립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라고 한다. 하루 한 번의 외출은 언제나 이해하는 강아지와 고립되지 않도록 관계 맺으며 살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관계를>
앞으로의 연재는 자발적으로 고립을 꾸준히 선택했던 청년이, 고립의 다양한 형태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자발적 고립을 개인의 문제로 바라볼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세상에는 다양한 형태의 고립이 존재합니다. 사회복지사인 동시에 고립에서 벗어나려 노력하는 청년으로서 <그럼에도 관계를>을 쓰려 합니다.
김재용
사회변화를 위한 글쓰기를 지속하며, 현재는 사회복지사로 노동중입니다.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