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고립 청년입니다.
한 사람이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있는지 판단할 때, 가장 흔하게 착각하거나 실수하는 것이 있다. 바로 '직장을 다니고 있는가?'다. 당사자는 고립되어 있다고 느끼더라도, 직장이 있으면 배제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재용(글쓴이)은 직장이 있으니까, 집 밖에 나오잖아?’라는 식이다. 사회복지사는 외로움과 사회적 고립 정도를 판단할 때, 척도 조사표를 사용한다. 하지만 이 결과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이것은 고립을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하고, 문제 상황을 곪아 터지게 만들며, 사각지대를 적극적으로 방치하는 것과 다름없다.
이렇게 방치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나는 사회복지사로 일하고 있고, 한 주에 5일씩을 출근한다. 하루에도 수 차례 업무 전화를 하고, 회의를 진행하고, 행정 서류에 결재를 받는다. 그럼에도 나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한다. “저 고립 청년입니다”. 이 말을 하면 열에 아홉은 웃어넘기거나, “너는 고립 청년이 아니야.”라고 말하면서 나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나는 정말 고립 청년이 아닐까? 나는 독립해서 혼자 살고 있다. 아침은 거르고 하루에 두 끼를 먹는데, 두 끼 모두 혼자 먹는다. 점심은 개인적인 신념에 따라 채식을 하다 보니, 다른 사람들과 함께 먹는 것이 여러모로 쉽지 않다. 저녁을 혼자 먹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해 보이기도 한다. 혼자 밥 먹을 때면, 유튜브나 웹툰, SNS 등에 몰두한다. 먹는 것은 그저 살기 위한 행위일 뿐이며, 이 과정에서 다른 사람과 어떠한 소통이나 연결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의 상황이 독특하다거나, '일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겠지'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먼저 1인 가구의 급격한 증가는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현재 우리나라의 가족 구성원 비율 중 가장 높다는 사실(34.5%)은 알기 쉽다. 다만 결재를 위해 보고 하거나 회의를 할 때 나의 생각을 말하는 것, 업무 전화 할 때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에서 전적으로 사적인 이야기는 배제해야 한다. 아마 스스로에게 물어본다면 답을 쉽게 알 수 있을 듯하다. 업무 관련 이야기를 하는 것은 외로움 해소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나는 혼자서 사무실을 쓰게 되며 고립감이 더욱 심화되었다.
나는 하루에 단 한 마디조차 사적인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날이 많다. '배달의 민족' 같은 기업이라면 잡담을 권하는 조직 문화가 있을 수 있지만, 대부분의 근무 환경에서 잡담 혹은 사적인 이야기는 금기시된다. 특히나 개인주의 문화가 확산되면서 ‘업무 시간 외 연락’이나 ‘회식’ 등은 구시대의 산물이 되었다. 물론 다시 옛날로 돌아가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하루에 1/3 이상을 보내야 하는 일터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과 사적인 이야기를 할 수 없다는 것은 인생의 1/3을 기계로 사는 것과 다름없지 않을까 싶다. 관계의 단절이 유행처럼 번지면서 사적인 대화는 더욱 할 수 없는 현재 다시 되묻고 싶다. “나는 정말 고립 청년이 아닐까?”.
노리나 허츠의 <고립의 시대>에 따르면, 직장에서 외로움을 느낀다고 말한 전 세계 사무실 노동자 비율은 40%다. 이것은 단순히 불안이나 우울, 개인의 외로움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직장에 친구가 없는 사람은 자기 일에서 지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몰입하지 못하는 정도가 7배나 더 적다. 더군다나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있는 사람은 하루에 담배 15개비를 피우는 것과 같다. 이들은 동기부여가 되지 않고, 덜 열정적인 데다가, 실수가 잦고, 작업 성과도 낮다. 따라서 노리나 허츠는 고용주가 적극 장려해야 할 것으로 점심 식사를 동료들과 함께 한다고 말한다. 그녀는 장 시간 노동으로 인한 관계의 단절을 지적하기도 하고, 일터 밖에서도 직원의 외로움 해소를 위한 방법을 회사가 찾도록 권한다. 그녀가 제안하는 다양한 해결 방법은 책을 참고하기를 바란다.
사회복지의 시스템으로 오히려 고독사가 늘어난다?
서술한 것과 같이 단순히 '직장이 있는가?'만으로는 사회적 고립 여부를 판단할 수 없다. 직장 내에서도 충분히 외로움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 행정복지센터나 사회복지시설에서 '직장인'은 사회적 고립 지원 대상에서 배제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크게는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예산의 문제고, 다른 하나는 외로움이나 고립을 개인의 문제로 여기기 때문이다.
사회복지 예산은 언제나 한정적이다. 쉽게 말해서 예산이 한정되어 있으므로 더욱 절박한 사람에게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 고정관념을 바꾸지 않는 이상, 앞으로 우리 사회에서 고독사 문제가 절대로 없어지지 않을 것이며 깊은 고립과 외로운 사회가 될 것이라 감히 전망한다. 그 이유는 애당초 문제 정의를 잘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독사는 단순히 외롭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고독하게 사는 것, 즉 고독생이 문제다.
즉 집 밖으로 외출은 하지만 고독하게 사는 직장인을 방치하면, 그는 결국 고독하게 죽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복지 현장에서는 사람이 고독하게 죽지 않도록 하는 것에만 혈안이다. ‘고독사’라는 것은 가족이나 친척 등의 주변 사람들과 단절된 채 홀로 사는 사람이 자살이나 병사 등으로 혼자 임종을 맞고, 일정한 시간 뒤에 시신이 발견되는 죽음을 말한다.
고독사의 기준은 72시간(3일)인데, 만약 혼자 죽었을지라도 3일 이내에 죽음을 확인하면 고독사가 아닌 것이 된다. 다시 말해, 고독하게 죽어도 뉴스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립이 예상되는 위기가구 명단을 만들고, 정기적으로 전화를 돌리거나 요구르트 배달을 한다. 자극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단지 죽었는지 살았는지를 확인하는 절차일 뿐이다. 이것이 2024년 대한민국의 사회서비스 현실이다.
외로움은 과연 개인의 문제일까.
또한 외로움이나 고립을 개인의 문제로 여기는 것도 심각한 사회 문제라고 생각한다. 가령 외롭거나 고립된 사람을 떠올렸을 때, 어떠한 생각이 먼저 떠오르는지 묻고 싶다. 아마 그의 개인적 성향이나 성격, 사회관계를 위한 노력의 부재, 고립된 상황 등이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원인은 전혀 개인적이지 않다. 경기 침체로 인해 일자리가 양극화되면서 청년 실업은 만성화되었고, 개인주의 문화가 확산하면서 손해 보는 인간관계에 대한 거부감이 늘어났고, 극한의 효율만을 추구하는 직장 내 분위기도 영향을 미친다. 특히나 근면 성실이 최고의 가치로 여겨지던 문화 탓에, 천성이 그렇지 않음에도 관계성마저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이라 여기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외로움과 고립을 느끼는 사람이 ‘문제자’가 된다.
따라서 문제의 원인은 사회적인 것이지만, 문제의 결과는 개인이 책임져야 한다. 이것은 더 많은 개인을 고립시키고, 개인 탓을 하도록 만든다. 고립을 심화시킬 뿐이다. 고립을 개인만의 책임으로 전가하지 않아야지만, 고립된 사람이 사회적 관계를 맺을 수 있다. 고립된 개인은 경제적 어려움과 외로움, 우울뿐만 아니라 고립되었다는 사회의 시선과도 싸워야 한다. 고립으로 인한 우울이 스스로를 더 옥죄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행정기관이나 사회복지시설의 입장이 전혀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고독사는 이미 행정기관 책임이 되었고, 지역 내에 고독사가 발생하면 각종 언론에서 보도가 쏟아진다. 언론의 자극적 보도는 점점 고독하게 사는 것이 아닌 고독하게 죽지 않는 것에 몰두하도록 한다. 그렇다 보니 다양한 고립의 상황과 고립하게 사는 저마다의 삶이 배제된다. 내가 경험하는 청년의 고립뿐 아니다. 사회의 고령화에 따른 고립 문제도 심각하다. 다양한 고립이 침잠하지 않도록, 더 많은 고립이 인정되어야만 비로소 고립이라는 단어가 사라질 것이다.
<그럼에도 관계를>
앞으로의 연재는 자발적으로 고립을 꾸준히 선택했던 청년이, 고립의 다양한 형태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자발적 고립을 개인의 문제로 바라볼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세상에는 다양한 형태의 고립이 존재합니다. 사회복지사인 동시에 고립에서 벗어나려 노력하는 청년으로서 <그럼에도 관계를>을 쓰려 합니다.
김재용
사회변화를 위한 글쓰기를 지속하며, 현재는 사회복지사로 노동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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