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에 바나나

모든 소리가 아름다워_육아에 바나나_보배

2024.05.31 | 조회 1.05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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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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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를 하다 보면 하루 24시간이 모자라다. 육아에 집안일에, 식재료 정리까지 부지런한 개미처럼 한참을 움직이다 정신을 차리면 어느새 깜깜한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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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이 쨍쨍한 낮에 아기를 부엌에 앉혀놓고 다음날 마실 야채 스무디를 준비한다. 깨끗하게 흐르는 물에 레몬을 씻고, 양배추와 브로콜리를 꺼내 들었다. 헹굼 볼에 브로콜리를 내려놓자 발 근처에서 웃음소리가 들린다. 바운서에 앉아 있던 아기가 브로콜리가 통에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꺄르르 웃는다. 서둘러 만들려던 생각은 잠시 접고, 아기와 한참을 브로콜리를 통에 떨어뜨리면서 논다. 텅 빈 집이 아기의 웃음으로 가득 찬다.

부엌 정리를 해놓고, 아기를 거실 놀이 매트로 데려온다. 기저귀가 젖지는 않았는지, 침을 너무 많이 흘리진 않았는지 확인한다. 기저귀를 갈아주는데 채워놓은 기저귀가 모두 소진된 걸 발견한다. 부랴부랴 새 기저귀 한 팩을 뜯어 기저귀 수납함을 채운다. 기저귀 포장 비닐이 바스락거리자 아기는 옆에서 새까만 눈을 반달 모양으로 만들며 킬킬 웃는다. 기저귀 수납함은 뒷전으로 두고, 아기의 웃음소리를 더 듣고 싶은 마음에 보라색 비닐을 손에 쥐고 한참을 바스락바스락 소리를 만든다.

이외에도 영양제를 챙겨 먹으려다가 영양제 통에서 통통나는 소리에 아기는 꺄르륵 웃고, 저녁을 먹다가 콧물이 난 아빠가 코를 하고 삼키는 소리에 웃는다. 그럴 때면 우리는 영양제가 멋드러진 장단을 만들어내는 악기인 양, 남편의 콧물 삼키는 소리가 재미있는 음악인 양 유치하게 큰 몸짓으로 반복한다. 끊이지 않는 아기의 웃음소리는 우리를 그 순간 세상에서 가장 충만하고, 행복한 사람으로 만든다. 세상 그 무엇도 부럽지 않은 존재가 되는 순간이다.


아기는 이 세계의 모든 소리에 귀를 쫑긋 세운다. 아기에게는 브로콜리가 볼에 떨어지는 소리도, 세면대에 물 흐르는 소리도, 아빠의 재채기 소리도 모두 새롭고 즐겁다. 아기의 웃음을 듣다 보면, 아기의 웃음이야말로 가장 순수하고 진실함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싶다. 한 번도 기저귀의 포장 봉투가 내게 즐거움을 줄 거라곤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브로콜리가 볼에 떨어지는 소리가 특별히 다르게 들렸던 적도 없다. 무의식적으로 소거하던 세상의 소리를 아기를 통해 다시 듣는 요즘이다.

태어난 지 반 년도 안 된 아기와 함께 휴지통에 들어가기 전의 기저귀 봉투와 한참 낄낄거리다 보면 수월하게 마음이 가뿐해지고, 즐거워진다. 이 작은 아기 천사는 내게 무엇을 가르쳐 주려고 찾아왔을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까맣게 칠해버린 이 세계의 다채로운 소리를 다시 한번 들어보라고 알려주기 위해서 와주었을까.

세상에는 온 가족이 행복해질 만한 것들이 곳곳에 보물처럼 숨어 있다고, 즐거움으로 덧칠해서 엄마 아빠에게 보여주겠다고 우리에게 찾아온 걸까.

아기가 찾아온 뒤 제2의 인생을 살게 된 것 같다고 말하는 이들은, 어쩌면 오늘의 나처럼 이전에는 감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아기로 하여금 다시 감각하게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기와 함께라면 어쩐지 내가 사는 세계를 조금 더 순수하고 진실되게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어쩌면 아기 천사들은 음소거된 세상의 아름다움을 들려주기 위해 어른들을 찾아온 걸지도 모르겠다.

엄마 아빠를 찾아온 아기의 발 
엄마 아빠를 찾아온 아기의 발 

  * 글쓴이 - 보배 

'세상의 모든 문화'에서 <탱고에 바나나>를 연재하다가 23년 12월 출산 후 <육아에 바나나>로 돌아왔습니다. 의지하고 싶은 가족 품에 있다가 지켜주고 싶은 가족이 생긴 요즘입니다. 공저 <나의 시간을 안아주고 싶어서>, <세상의 모든 청년>에 참여했습니다.


  * 작가의 브런치 

https://brunch.co.kr/@se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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