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을 보다가 침울해졌다. 혹시 출산 후에 머리카락이 빠지고 있지는 않은지 예의주시하고 있다. 임신기에 생긴 비립종은 출산 후에 피부과에 달려가 제거했더니 얼굴에는 의료용 밴드가 덕지덕지 붙어 있다. 임신기에 늘어난 뱃가죽은 줄어들고 있기는 한 건지 나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못생겼어.
혼잣말을 한다고 했는데 남편이 듣고는 깜짝 놀라 얼른 얼러준다. 우리 와이프가 최고 예쁘다고 해주는데 마음은 풀리지 않는다. 나도 눈이 있기 때문이다. 임신 기간 동안 살이 많이 찌지는 않아서 몸은 금방 회복되었는데 어쩐지 푸석푸석한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깐 달걀 같던 피부가 지나친(?) 모유 수유로, 수분기 없는 늦가을 텅 빈 논의 건초 같아졌다. 그래도 아기는 잘 먹고 잘 자라고 있어서 마음만큼은 풍족하다. 그래, 푸석푸석해진 건 다른 걸로 어떻게든 회복해 보자.
집에서 매일 땡땡이 잠옷 바지에 아기용 앞치마를 걸치고, 베이지색 손목 보호대를 하고 있으니 흡사 전쟁터에 나가는 장군 같다. 어쩐지 용감무쌍해 보이는 건 좋은데, 내 안에 감춰진 아름다웠던(다소 미화되었다) 여성스러움은 대체 어디로 숨어버렸는지 안타깝기만 하다. 아기를 낳은 뒤에 나는 모성성을 얻는 대신 여성성을 포기한 걸까.
지난 주말, 남편은 회사 일이 바빠 주말 내내 일을 했다. 집에서도 금방 회사에 갈 기세로 옷을 갖춰 입고 열 시간이고 꼬박 일을 했다. ‘남편 힘내’라고 응원하면서도 제발 아기가 응가하면 슈퍼 내니(nanny)처럼 나타나서 엉덩이 좀 씻겨 줬으면 하고 바랐지만, 서재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꼬박 2주간 혼자 육아를 했더니 그나마 건초 같던 내 얼굴은 극심한 가뭄에 갈라져버린 흙바닥이 되고 말았다.
모빌을 틀어주고 3분 만에 감은 머리에, 로션은 하루 한 번만 발라 하얗게 일어난 얼굴, 다 부르터버린 입술. 이게 진정한 엄마의 모습이라면 자랑스럽게 받아들여야지, 하는 기특한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서둘러 내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 아기가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면, 이제 엄마는 본인 스스로를 잘 챙겨야 한다. 남편이 바빴던 2주 동안, 천천히 씻거나 낮에 산책을 가는 일은 사치였다.
남편의 중요한 업무가 모두 끝나는 날, 나는 밤에 화장실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다. 10분 동안 머리를 감고, 5분 동안 이를 닦고, 15분 동안 샤워를 하고, 10분 동안 머리를 말렸다. 머리를 말리면서 야무지게 마스크팩도 붙였다. 혹여 무슨 일이 났을까 화장실 문을 열고 남편에게 아기는 어떠냐고 묻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아기는 소형차 같은 내 품보다 SUV 같은 남편의 품을 좋아했다.
그리고 주말에는 아기를 남편에게 맡기고 곧장 햇살이 따끈한 정오에 가벼운 옷차림으로 산책을 나섰다. 좋아하는 우롱티를 사러 가겠다고 했다. 남편은 한 15분이면 돌아오겠지 생각했겠지만, 나는 골목에 나가, 천변을 걷다가, 냇물 소리, 새소리 다 듣다가 남의 집 강아지 산책하는 것도 실컷 구경하고 나서야 우롱티 가게에 갔다. 가장 큰 사이즈의 음료를 주문해서 마시며 근처 뷰티 스토어에 들렀다.
가려고 해서 갔던 건 아니었는데, 세상의 기운이 나를 그곳으로 이끌었다. 화장을 가장 공들여 예쁘게 한 알바생에게 물었다.
요즘 마스카라는 뭐가 잘나가나요.
아이돌처럼 화장을 한 아르바이트생은 속눈썹을 뭉침없이 한올 한올 바르려면 **이, 풍성하게 보이고 싶으면 ***이 좋다고 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브랜드였다. 마스카라를 마지막으로 발라본 게 결혼식에서였나 떠올리다가 냉큼 마스카라 하나를 집어들었다. 산 김에 속눈썹을 올리는 뷰러도 물었다. 센스 넘치는 알바생은 내게 계속 단 두 개씩의 선택지만 제시했고, 오래 고민하지 않고 하나씩 골라왔다.
밀크폼을 올린 우롱티를 마시면서, 주머니에는 마스카라를 넣고 햇볕 쬐며 집에 들어오는데 그 이상 행복할 순 없었다. 마스카라를 주머니에 넣기만 해도 벌써 나는 요술봉을 든 세일러문처럼 예뻐진 것만 같고, 모성성에 휘발되어버린 나의 여성스러움이 회복된 것 같았다. 그제야 한동안 침울해졌던 나를 돌아볼 수 있었다.
‘그래, 나는 엄마이기 전에 여자라고!‘
모든 엄마는 엄마이기 전에 여자이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인간이자 여자. 무엇에 아름다움의 가치를 부여하느냐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엄마가 되었다고 해서 엄마 이전에 내가 추구하고 사랑했던 것을, 혹은 나의 아름다움을 포기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새싹처럼 예쁜 아기를 낳았으니, 엄마인 나는 조금 더 단단하고 비옥한 땅이 되어줘야 하지 않을까 싶다. 좋아하는 모습으로 예쁘게 꾸미기도 하고, 밝고 화창한 표정을 짓는, 마음도 피부도 촉촉한 엄마 말이다.
아기야, 백일 축하해.
* 글쓴이 - 보배
'세상의 모든 문화'에서 <탱고에 바나나>를 연재하다가 23년 12월 출산 후 <육아에 바나나>로 돌아왔습니다. 의지하고 싶은 가족 품에 있다가 지켜주고 싶은 가족이 생긴 요즘입니다. 공저 <나의 시간을 안아주고 싶어서>, <세상의 모든 청년>에 참여했습니다.
* 작가의 브런치 https://brunch.co.kr/@se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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