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육아의 기쁨과 슬픔

2024.06.02 | 조회 9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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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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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과 출산의 복선

7개월 된 우리 아들이 태어난 건 새로 입사한 회사의 팀장님 덕분이었다. 만난지 세 달도 안된 상사는 나에게 나이가 적지 않으니 아기를 낳을 생각이 있다면 빨리 가지라고 했다. 예기치 못한 말에 “입사한지 얼마 안되었는데 바로 임신하면 욕먹는 거 아닌가요?”라고 농담으로 받아쳐봤지만 대답은 “그렇게 생각할까봐 말한거에요”였다. 용기를 얻은 나는 신랑과 ‘베타 테스트’를 해봤는데 바로 임신이 되었다. 둘이 노는 게 재밌어서 6년 연애, 6년의 결혼 생활 동안 미루고 있었던 임신인데 이렇게 바로 아기가 찾아올 줄 몰랐다. 시작이 좋으니 임신과 출산이 순조로울 거 같았다. 

“왜 대학 병원에 오셨어요?” 산부인과 첫 진료에 의사가 물었다. 보통 고령의 산모, 고위험 산모들이 대학병원을 찾는데 나는 둘 다 해당되지 않았기에 의사는 궁금해했다. 머쓱한 이 질문이 내 임신과 출산의 복선이 될 줄은 이땐 알지못했다. 바로 임신이 된 그 순탄함부터가 내 임신 기간의 복선이었던 거 같다. 정기 검진 받으러갈 때마다 태아는 항상 건강했고 나는 입덧도 불면증도, 그 어떤 불편함도 없었다. 임신 초반에 심적으로 힘든 일이 있었지만 나는 뱃속의 아기를 위해 여러 방면으로 노력해 극복했다. 이후 만나는 사람마다 임신부 맞냐고, 표정은 밝고 피부에선 광이 난다고 했다. 나는 임신 기간 내내 날라다녔다. 

 

예상보다 슬프고 기대보다 기쁜

왜 대학병원에 왔냐는 그 질문에 “이 병원에는 신생아 중환자실이 있어서요.”라는 이유는 없었다. 단지 물리적으로 가까워서, 친척이 병원장인 적이 있던터라 심리적으로 가까워서 왔을 뿐이었다. 하지만 출산 직후 신생아 중환자실이 꼭 필요한 상황에 놓인게 어쩌면 출산의 슬픈 복선이었나 싶었다. 지금도 배고플 때 빼고는 잘 안 우는 우리 아기는 태어날 때도 거의 울지 않았다. 출산의 고통이 탁 끝난 그 순간, “에엥!”하고 분만실을 흔들어대는 울음이 아니라 “이잉"하고 잦아드는 희미한 울음만이 들렸다. 정기 검진을 받으러 갈 때면 억지로 질문을 쥐어짜야할 만큼 나와 태아는 늘 건강했기에 이런 상황은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소청(소아청소년)과에 콜해", 의사의 말에 나는 의학 드라마의 한 장면에 들어가있는 듯했다. 곧 의료진 두 명이 분만실로 뛰어들어왔고 내 아기를 데려가버렸다. 응급 상황에 신랑은 탯줄을 자르자마자 분만실 밖으로 쫓겨났고 나는 방금 막 태어난 내 아기를 한 번도 안아 보지도 못 한 채 회복실로 옮겨졌다. 아기의 이산화탄소 수치와 염증 수치가 높아 신생아 중환자실에 입원해야했다. 내가 출산 직전에 코로나에 걸려서 그랬을 수도, 아기가 산도에 좀 끼어있어서 그랬을 수도 있다고 했다. 이유를 콕 찝을 순 없었지만 아기가 힘든 건 분명했고 모든 가능성이 날 가리키는 거 같아 힘들었다.

아기 없이 혼자 들어간 조리원에서는 하루하루 피가 말랐다. 하루에 한 번 가능하던 면회마저 내가 퇴원한 후에는 정책상 할 수 없었기에 언제 올지 모르는 병원 전화를 마냥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다. 인큐베이터 너머로 입에는 양압기를, 손에는 바늘을 꽂고 쌔근쌔근 자고 있는 모습이 내가 본 아기의 마지막이었다. 아기가 입원한지 열흘쯤 되던 날, 이제 아기와 집에 가라는 전화를 받았다. 언제 퇴원할 수 있을지 물어봐도 병원에선 늘 확답해 주지 않았어서 갑작스러운 소식이었다. 그때 나는 조리원에서 모유 마사지를 받고 있었기에 앞섶을 제대로 여미지도 못한 채 바닥에 퍼질러 앉아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아기가 건강하게 퇴원만 한다면 난 더 바랄게 없다고 기도했고 그 소원이 이루어진 순간이었다.

아기와 같이 집에 오면 세상 행복할 거 같았지만 세상 힘들었다. 하루에 열 번 우유를 주고, 아홉 번 재우고, 여덟 번 기저귀를 갈면 하루가 끝났다. 신랑과 교대로 아기를 돌봤지만 두 시간마다 깨는 신생아 스케줄에 우리도 겨우 쪽잠을 잘 뿐이었다. 나는 몸이 출산 전과 같지도 않았다. 잠깐만 서 있어도 어지럽고 식은 땀이 줄줄 흘렀다. 출산할 때 피를 두 양동이 흘렸다던대 왜 아직도 내 몸에선 피가 나는지, 이게 회복이 가능한건지 알 수 없어 절망적이었다. 더구나 아기가 날 별로 안 좋아하는 거 같아 속상했다. 아기는 신랑과 우리 엄마 품에 안기면 잠투정을 바로 그치면서도 내가 어르고 달래면 더 칭얼거렸다. 자그맣고 동그란 머리도, 보드라운 손도, 오물거리는 입도 신기하고 앙증맞았만 아직 내가 아기를 사랑하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너네는 뭔 복이 있길래 이래 이쁘고 순한 아(기)를 낳았노.” 시어머니의 이 말에 진심으로 수긍하게 된 건 아기가 태어나고 두어달쯤 지난 후였다. 아기는 하루에 다섯 번씩 우유를 먹게 되었고 잠자는 시간도 네 시간 정도 되었다. 내 몸은 점점 회복했고 날 정신적으로 힘들게 하던 피도 멈췄다. 그제서야 나는 아기를 꼼꼼히 쳐다보고 따뜻하게 만져볼 여유가 생겼다.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난 머리는 어릴적 나와 똑같았고, 손가락 모양은 우리 신랑을 빼닮고, 입은 누구 지분인지 아직 판단이 안 서도 우유 달라고 뻐끔거리는 입술은 귀여웠다. 게다가 아기는 언제 병원에 입원했었냐는 듯, 너무 잘 먹고 잘 자서 키도 몸무게도 상위 1%의 왕 아기가 되어버렸다. 훅 커져버린 크기만큼 아기가 주는 기쁨도 덩달아 늘기 시작했다. 

한 생명이 성장하는 신비한 모습을 바로 옆에서 관찰하는 기쁨은 상상 이상이었다. 아기는 미숙하지만 천천히, 자신만의 속도로 자랐다. 손이 방울 토마토만할 때는 자신의 손을 펼 줄 조차 몰랐다. 늘 주먹을 꽉 쥐고 있어 손에선 쿰쿰한 냄새가 났다. 손이 알밤 크기가 됐을 때 본인 몸에 손이 달려있다는 사실을 인지한듯했다. 주먹 쥔 자기 손을 하루에 몇 시간이고 이리저리 돌려보며 뚫어져라 응시했다. 어느 순간 손가락을 하나 둘 펴보기 시작했고 지금은 단풍잎 같은 손으로 내 머리카락, 신랑 코, 우리 엄마의 멱살, 모든 걸 다 꽉 쥐고 흔들어댔다. 다음엔 무엇을 잡을까 어떻게 가지고 놀까 내일이 기대가 되었다. 

가족들은 아기로 인해 행복해했다. 여러 핑계로 아기 낳기를 미루자했던 신랑은 요즘 아기 보는 낙에 산다며 쉴 새 없이 아기에게 뽀뽀를 해댔다. 우리 아빠는 자기 손주가 이만큼이나 컸다고 너무 행복하다며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아기가 처음으로 뒤집기에 성공하던 날, 내가 찍은 영상은 서울 끝자락에 계신 우리 외할머니를, 한반도 우측 끝자락에 계신 시부모님을 환호하게 했다. 나는 더 이상 인스타그램에 나 이만큼 좋은데 갔어, 비싼 거 먹었어, 은근슬쩍 나의 기쁨을 인정 받기 위한 포스팅을 올릴 필요가 없었다. 내가 아기를 예뻐하는 것 만큼 우리 가족들이 같은 온도감으로 아기를 예뻐해줬기 때문이다.

아기는 아직 말을 못하니, 어디 불편한데는 없는지 늘 면밀히 살펴야했고 그럴 수록 더 깊이 사랑에 빠졌다. 아기한테서 나는 냄새마저 귀여웠고 나만 매일 맡을 수 있는 우리 아가 냄새라 더 소중했다. 정수리에서는 들깨가루 냄새가, 입가에서는 분유 냄새가, 귀에서는 버터 냄새가 났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발가락 냄새였다. 매일 목욕을 씻겨줘도 금방 땀이 나서 달짝지근하면서도 시큼한 캔 옥수수 냄새가 났다. 나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아기 발가락을 킁킁 거리며 과장되게 “아고 꼬랑내”했고 이제는 내가 장난친다는 걸 안다는 듯 아기는 꺄르르 웃어주는 그 순간은 너무 행복했다. 

 

현생 육아

그렇다고 육아가 늘 즐겁기만 한 건 아니었다. 아직 자녀가 없는 친구들의 삶이 때론 부럽기도 했다. 친구들이 풀 메이크업에 하늘 거리는 원피스를 입을 때, 나는 늘 맨 얼굴에 무릎 나온 트레이닝 바지를 입는다. 친구들이 연휴에 해외 여행을 간다며 설레할 때, 육아 휴직 중인 나는 휴일 없이 늘 아기를 봐야 했거니와 아직 7개월 밖에 안 된 애를 데리고 멀리 가는 건 상상만으로도 힘들었다. 친구들이 불금에 힙한 펍에서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놀 때, 나는 아기를 재운 후 신랑과 소박하게 맥주 한 잔하는 것에 만족해야했다. 아기가 없던 때는 마치 전생처럼 두 번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인생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기가 없는 삶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여행이고 유흥이고 없어도 그만이지만 아기가 없으면 살 수 없을 거 같기 때문이다. 아기가 생존하기 위해선 내가 필요했지만 아기를 안아주는 시간이 쌓일 수록 이제 나에겐 아기가 꼭 필요해졌다. 자다가 눈을 막 떠서 나를 보고 씨익 햇님처럼 웃어줄 때는 눈물이 날 만큼 아기를 사랑하게 되었다. 육아 선배들의 경험담을 많이 듣고, 육아 브이로그를 백번 봐도 알 수 없었다. 내 아이가 주는 슬픔이 예상보다 크고 기쁨은 기대보다 크다는 건 직접 경험해봐야 알 수 있는 것이었다.

“냉정하게 말하면 희연 님의 회사 일은 대체 가능하지만 엄마 일은 대체가 불가능하니까요. 아기와 행복한 시간 잘 보내다 오세요.” 내가 휴직을 하면 남은 동료들의 업무가 과중될까 걱정하던 나에게 팀장님이 웃으며 말했다. 육아 경험자가 했던 그 말이 의례하는 말이 아니었다는 걸, 아기가 요즘 온몸으로 깨닫고 있다. 아기의 세상이 온전히 나이고, 나의 세상이 온전히 아기인 이 삶이 그리 길지 않을 거 같아 현재에 충실해야한다는 것을 말이다. 육아는 내가 컨트롤할 수 없기에 앞으로 얼마나 힘들지, 기쁠지 미리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지금은 내가 좋아하는 우리 아기의 꼬랑내를 기회가 있을 때 많이 맡으면 되는 거다. “아, 엄마 하지마!”라고 신경질낼 때까지 말이다.

 

* 글쓴이 소개

서른 중반의 서비스 기획자입니다. 콘텐츠를 소비하고 글로 생산하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라 블로그에 때때로 포스팅하였습니다. 현재는 육아 휴직 중으로 8개월 된 아기를 키우는 엄마가 임시 전업이 되었습니다. 

- 블로그 : blog.naver.com/yonofbooks

- 스레드 : @hihihiy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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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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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충온

    0
    5 months 전

    너무나 따뜻하고 뭉클합니다. 아이 셋을 키우고 있는 아빠인데, 아내 생각도 나고 아이들 어릴 때 생각도 나고요. 아기가 건강하길 바라고, 글쓴이 님과 남편 두 분 모두 강건하시길 빕니다.

    ㄴ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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