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고 나면 보이는 것들_그림책을 보다가_우선영

2022.10.25 | 조회 9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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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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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오늘 해야 할 것들을 기록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앱에 설정된 기능 덕분에 오전이면 새해 목표가 핸드폰 화면에 자동으로 튀어나온다. 아직 완성하지 못한 것들도 많은데 눈치 없는 한 해가 두 달 남짓 남았을 뿐이다. 지나간 시간들을 돌아볼 겨를도 없이 하루하루가 발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사라지는 시간들은 어디로 가버린 걸까? 그 시간들이 내게 남긴 것은 무엇일까? 그 질문으로 집어 든 그림책은 할아버지의 바닷속 집이다. 노란색과 바다의 색이 겹쳐지면서 전해지는 느낌이 아련하고 그윽하다. 수상 가옥도 아니고 바다 한가운데 있는 집이라니. 창문 밖에 고개를 내밀고 있는 할아버지는 여유로움을 넘어 적적하게 보인다.

<할아버지의 바닷속 집 / 가토 구니오 그림, 히라타 겐야 글, 김인호 옮김 / 바다어린이>
<할아버지의 바닷속 집 / 가토 구니오 그림, 히라타 겐야 글, 김인호 옮김 / 바다어린이>

 

삼 년 전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혼자 사는 할아버지는 소소한 일상들을 보내며 지내고 있다. 아침으로 먹을 생선을 잡거나 이웃과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멀리 떨어져 사는 자식들이 보낸 편지를 읽기도 하는 날들이다.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일상이지만 바닥에 물이 차기 시작하면 집을 지어야 한다. 바다에 잠기기 전에 집을 쌓아 올려 계속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어느 날, 발 사이로 찰랑이는 물을 본 할아버지는 익숙한 듯이 연장을 챙겨 집을 짓기 시작한다. 하지만 익숙했던 일에서도 실수는 일어나기 마련이다. 바닷속 깊이 빠져 버린 톱과 망치를 찾기 위해 할아버지는 잠수복을 입고 뛰어 든다.

첨벙.

그렇게 바닷속에 오래 잠겨 있던 공간을 마주한 할아버지는 할머니와 함께 했던 시간들을 떠올리게 된다. 할머니가 떠나던 마지만 순간을, 가족들과 참여했던 마을 축제를, 키우던 고양이를 잃어버렸던 날까지 크고 작은 일들이 잔잔하게 떠오르는 것이다. 아래로, 아래로, 아래로. 바다가 깊어질수록 기억도 깊어진다. 할아버지를 따라 내려가다 보니 내가 지나온 시간들까지 덩달아 떠오른다. 나도 그럴 때가 있었는데 싶었던 순간도 만나고, 나는 왜 그러지 못했을까 싶은 순간도 만나며 뒤섞이는 감정들이 마음을 뜨겁게 만들어 눈가가 촉촉해진다.

어느 해 겨울, 이 책으로 그림책테라피를 진행한 적이 있다. 5주 차의 마지막 시간에 이 그림책을 읽으며 나를 알아보는 그림책테라피라는 주제의 과정에 마침표를 찍는 날이었다. 그 당시 매 시간마다 제일 먼저 강의실에 들어와 있던 열정적인 분이 있었다. 초등학교를 정년퇴직하신 후 봉사 활동을 하며 지내는 분이셨다. 함께 하는 시간 동안 항상 밝은 미소를 보여주셨는데, 이 그림책을 읽는 동안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테라피가 끝난 후 나의 손을 꼭 잡고 이런 책을 만나게 해줘서 고맙다고, 앞으로도 계속 그림책 읽어주는 일을 해달라고 부탁하시던 모습은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림책이 전달하는 힘을 종종 경험하는데, 그때의 감동은 나에게도 매우 크다.

새해마다 목표를 설정하고 열심히 달리는 이유에는 개인적인 성공에 대한 욕망이 가득 담겨 있다. 뭐라도 돼 보겠다고 열심히 살고 있는데 여전히 아무것도 되지 못한 것 같은 생각이 드는 날, 딸에게 투덜투덜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엄마도 이름 앞에 그럴듯한 명칭 하나 달고 싶다 했더니 딸이 말한다. “엄마는 00이의 엄마가 됐잖아. 나 같은 딸을 둔 엄마가 됐으니 성공한 거지.” , 누구에게 좋은 말인지 조금 헷갈리지만 성공했다니 기분은 좋다.

그래, 어쩌면 우리는 이미 각자의 삶에서 성공하며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딸이나 아들로, 누군가의 보호자인 것만으로도 서로에게 존재의 의미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림책 속 할아버지가 지나온 시간들 속에도 가족과 함께한 일상의 소소함이 가득했다. 개인적인 성취도 중요하지만, 결국 나를 일으키는 건 관계 속에서 나누는 따뜻한 마음과 일상이 아닐까. 마주 앉은 밥상에서의 웃음소리, 외출할 때 나누는 따듯한 포옹, 서로를 응원하는 다정한 메시지들처럼 말이다. 하고 싶은 것들을 생각하느라, 할 수 있는 것들을 놓치며 살지 말아야겠다. 오늘 해야 할 일의 목록에 한 줄을 더 넣어 본다. 다정한 시간 만들기. 누군가와 다정하게 보내는 수많은 날들이 미래의 어떤 날까지도 웃게 만들 수 있음을. 그림책 속 할아버지가 흐뭇한 미소로 말해주고 있다.

 

* 매달 25일 '그림책을 보다가'

삶에서 주어지는 수많은 질문들에 그림책으로 답을 찾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림책을 보다가 떠오른 생각이나 일상 깨달음을 적어보려 합니다. 제 글과 만나는 시간이 여러분 삶에 작은 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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