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어린 아이처럼 살수는 없지만, 어린 아이같은 마음을 간직하며 살고 싶었다. 중학생 시절에는 ‘어린왕자’ 이야기에 푹 빠져서 이해할 수 없는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는 다짐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아이들과 쉽게 친해지는 편이고, 아이들에게 호감을 사는 편이기도 하다. 이십대를 함께 한 직장에서도 외부 행사가 있을 때마다 종종 직원들의 아이들을 맡아서 놀아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런 나에게도 온전히 아이들만 바라보는 시간은 녹록하지 않았다. 최대한 늦게 기관을 보내려는 마음에 큰 아이는 다섯살 중반까지, 둘째는 다섯살까지 데리고 있었다. 아이 둘과 함께 한 시간은 매일매일이 행복과 고단함의 줄다리기 같았다. 그럼에도 우리의 시간이 조금 더 행복으로 기울 수 있는 이유는 함께 읽은 그림책 덕분이었을 것이다.
그림책을 읽다 보면 아이들의 천진함에 절로 미소지어지는 순간이 참 많다. 그 중에서도 말도 안되는 상상이 주는 즐거움은 빼놓을 수 없는 재미이다. 박현주 작가의 ‘비밀이야’라는 그림책을 읽고 있으면 울컥하는 감정과 피식하는 미소가 함께 새어 나온다. 어른들은 어디를 가신 걸까? 어린 남매만 있는 집에는 주방에 차려진 밥상만 살짝 보인다. TV를 보던 남동생의 질문으로 시작된 이야기가 상상력으로 가득 채워지기까지 몇 장이 걸리지 않았지만 책을 덮고 나면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면서 어린 시절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아이들과 주고 받는 대화가 즐거운 이유는 말도 안되는 상상이 현실처럼 느껴지는 마법 덕분이 아닌가 싶다.
어린 시절, 나만 볼 수 있는 상상친구가 있었다. 책상 앞에 놓인 인형이나 소품과도 소리내어 말하기를 즐겨했다. 이불 하나를 펼치면 꿈꾸는 모든 것들이 생겨났다. 종이 한장에 쓱쓱 그려진 보물 지도는 몇 시간을 거뜬히 놀 수 있을만큼 재미있는 놀이였다. 상상이 주는 즐거움을 온 몸으로 느꼈던 나였기에 그림책을 읽다 보면 절로 그 시절이 떠오른다.
‘너는 뭐가 되고 싶어?’라는 그림책 속에는 마법사 같은 토끼와 두 아이가 등장한다. 토끼는 아이들의 소원을 들어줄 것처럼 뭐가 되고 싶은지 계속 묻는다. 그런데 그 질문이 심상치 않다. 어른의 입장에서 생각할만한 것들은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그 덕분에 이런 저런 상상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는 것이 재미있다. 아들이 세살 즈음에 뭐가 되고 싶냐고 물으면 소방차나 구급차가 되고 싶다고 답을 했었다. 그당시 그 대답에 소방관이나 의사가 되고 싶냐는 나의 질문은 정말 바보같은 것이었다. 아이는 정말 소방차나 구급차가 되고 싶었을테니 말이다. 그러고 보면 어릴 적 나도 다람쥐가 되고 싶었다.
물론 상상속에서만 그 재미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이들은 현실 속에서 주어지는 작은 발견에도 큰 기쁨을 누리고는 한다. ‘나뭇잎이 달아나요’라는 그림책 속에는 떨어진 나뭇잎을 치우는 아이가 등장한다.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으로 모아 놓은 나뭇잎 중에 하나가 날아가고 그 나뭇잎을 쫓아가는 장면들이 이어진다. 장면이 바뀔 때마다 친구가 함께 달리며 아이들이 늘어나는데 나뭇잎을 따라 달리는 모습이 사랑스럽게 담겨 있다. 언젠가 아이가 바람에 날리는 낙엽을 보며 "엄마, 나뭇잎이 달아나."라고 말하며 신이 나서 달리던 순간이 기억난다. 작가들은 그런 순간을 놓치지 않고 담아내는구나 싶기도 했다. 그렇게 그림책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과 비슷했던 아이들이 훌쩍 커서 중학생이라는 시기를 지나고 있다.
어느 날, 문득 중학생인 딸이 이렇게 말했다 ‘삶의 기본 값은 고통인 것 같아.’ 그 말에 어떤 말도 덧붙이지 못했다. 중간 고사 기간을 보내고 있는 아이에게는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않을게 뻔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아이의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 같은 일들이 때론 삶을 고통스럽게 만들 수 있다.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것도 우리에겐 필요한 일이고 중요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한 번 뿐인 삶을 고통으로만 여기며 살기에는 너무 억울하다. 고통을 덮을 수 있는 삶의 재미를 찾아 채워가면서 살고 싶다. 잠시라도 아이처럼 순간의 재미를 만끽하며 시간을 보내고 싶다. 다시 어린 아이로 돌아가는 일은 불가능하지만, 아이처럼 살아가는 일은 생각보다 쉬운 일일지도 모른다. 지나온 그 시절의 천진난만함을 기억해 낼 수 있다면 말이다. 그런 의미에게 나에겐 그림책 만큼 좋은 도구가 없다. 다시 찾고 싶은 아이의 마음을 기대하며 그림책을 펼쳐 본다.
그림책 ‘코를 킁킁’ 속에는 겨울 잠을 자는 동물들이 등장한다. 겨울 잠을 깨우는 봄의 냄새에 옹기종기 모인 동물들이 발견한 것은 노란색의 아주 작은 꽃 한 송이었다. 그 꽃을 보며 감탄하는 순간 겨울이 모두 녹아내리는 것만 같다. 천진난만한 아이의 시선으로 바라보던 세상을 기억해 내자. 더 많이 궁금해 하고, 더 많이 발견하면서 삶 속에 재미를 쌓아가자. 행복한 시간은 그렇게 만들어질 것이다. 그림책 ‘코를 킁킁’의 원 제목이 ‘The Happy Day’인 것처럼 말이다.
<비밀이야 / 박현주 지음, 이야기꽃>
<너는 뭐가 되고 싶어? / 윌리엄 스타이그 글,해리 블리스 그림, 김미련 옮김, 느림보>
<나뭇잎이 달아나요 / 올레 쾨네케 글.그림, 임정은 옮김 / 시공주니어>
<코를 킁킁 / 루스 크라우스 글, 마크 사이먼트 그림, 고진하 옮김 / 비룡소>
* 매달 25일 '그림책을 보다가' 글쓴이 - 우선영
삶에서 주어지는 수많은 질문들에 그림책으로 답을 찾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림책을 보다가 떠오른 생각이나 일상의 깨달음을 적어보려 합니다. 제 글과 만나는 시간이 여러분의 삶에 작은 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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