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한 하루

글자 감옥에서 헤엄치기_우연한 하루_지은이

2024.12.30 | 조회 1.05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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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겨울은 글자 감옥에 갇힌 것 같다

주말도, 친구도, 심지어 크리스마스인 오늘까지 172,339자 글자 속에 파묻혀 하루를 보내고 있다.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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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초엔 졸업 논문 1차 심사가 있었다. 학위 마무리를 짓기 위해서 휴직까지 하고 논문에 매달렸지만, 심사 후 돌아온 결과는 전면 재수정이었다. 남은 시간은 한달 남짓, 전체 200장 정도의 분량에서 절반 정도인 100장, 그 이상이 될지도 모르는 양을 30일도 안 되는 시간 안에 완성도 있게 다시 써야 한다는 뜻이었다. 제대로 완성되지 않으면 졸업은 다음 학기로 밀릴 수 있다는 심사 교수님의 피드백은 덤으로 따라왔고, 마음엔 무거운 걱정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어떻게 그 많은 내용을 다 쓸 수 있지? 이미 복직을 한지 한참은 지난 시점이라 수정할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빠르게 머리를 굴려 논문만 생각하고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계산해 봐도 네 번의 주말, 8일 남짓이었다. 나머진 시간을 쪼개고 만들어야 겠다는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렇게 부담감을 잔뜩 짊어진 채 논문 수정의 쳇바퀴에 들어섰다. 낮에는 회사에서 일을 했기에 매일 밤을 샜고, 주말 아침엔 눈을 뜨자 마자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책상 의자에 초강력 본드를 발라 놓은 것처럼 몸을 고정한 채 글을 쓰고 고치는 반복 향연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시계바늘이 돌아가는 속도는 타이핑을 하는 속도보다 저만치 앞서 쏜살같이 흘러갔다. 하루하루 날짜가 바뀔 때 마다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갔고, 어디에도 풀 수 없는 불안 들이 켜켜이 쌓였다. 그렇게 2차 심사가 채 일주일도 남지 않은 어느 날 아침까지 와버렸다

 

출근을 위해 준비하던 때였다. 새벽 세시 반까지 작업을 하고 잠을 청했지만, 거울 속에 비친 나의 표정을 보자마자남은 시간 동안 아무리 애써도, 달라질 게 없겠다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리고 왈칵 눈물이 터져 버렸다. 애써 억누르던 감정이 한꺼번에 와르르 쏟아졌다. 무언가 하고 있지만, 아무것도 못한 것 같은 나 자신이 바보 같기도, 앞으로 무엇을 더 해도 미래는 바뀌지 않을 것 같았다. 모든 것이 끝난 것 마냥 엉엉 소리 내어 울어 버렸다. 야속하게도 그 순간 하늘엔 첫눈이 내리고 있었다.

 

겨우 감정을 추스르고 출근한 후 일을 하려는 순간, 한 통의 카톡이 왔다. 올해 봄, 논문 연구를 위해 진행한 실험에 참여했던 이가 보내온 연락이었다


* 내가 진행한 연구는성찰 글쓰기를 쓰는 것이 개인의 정서 조절에 변화가 일어나는지 알아보는 실험이었다. 대학생을 대상으로 총 2주간 참여자들은 글쓰기를 했고, 카카오톡으로 연락한 이는 당시 글쓰기 실험 연구에 참여했던 이들 중 한 명이었다.

 

카톡 내용을 읽어보니 올해 겨울 논문이 완성된다고 했는데, 연구 결과가 궁금하다는 내용이었다. 첫눈이 논문을 떠올리게 만들어 연락을 주었다는 이의 카톡을 읽자 마자, 아침 내 흘렸던 눈물이 쏙 들어간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분명 아침 까지만 해도누가 나의 글을 읽어 줄까? 어차피 졸업하고 나면 도서관에서 잠자게 될 글이 될 텐데라는 마음을 그 누가 시킨 것이 아닌 나 스스로 끌어오고 있었다.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기계적으로 작업했던 나 자신이 보였다. ‘글을 쓰면서 몸이 꼬였고, 뭔가 했지만 한 것 같지 않은 느낌이 들었던 것도 이것 때문이었던 걸까라는 마음도 함께 들었다.

 

생각을 하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논문이 잘 되고 있냐는 질문에 대답은 해야 하니, 연락을 주어 고맙고 열심히 쓰고 있다는 답을 했다. 혹시라도 졸업이 연기될 수 있다는 말까지 조심스레 덧붙였다. 그렇게 답을 보내고 나자, 뭔지 모를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쌓였던 졸음부터 달아나기 시작했다

 

지금 어디에서 인가 내가 쓰고 있는 글을 기다리는 누군가 있다. 이 사실은 내게 비타민이 되어 다가왔다. 왠지 모를 힘이 솟아났다. 그 누군가는 대학생이었고, 이제부터 내가 쓸 글은대학생이 읽었을 때 쉽게 술술 읽히는 글이 되어야 했다.

 

그날 밤부터 모니터를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졌던 것 같다. 독자가 대학생이라 상상하며 여태껏 써놓은 글을 읽어보았다. 그제야 쌓여 있던 문제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려운 용어, 고고한 표현, 여러 곳에서 짜집기 한 문장들이 뒤죽박죽 엉켜 있었다. 논문 심사 때 받았던 피드백 중 하나도내용이 어렵게 쓰여 있다였는데, 기회는 이때다 싶었다

 

아예 첫 문장부터 다시 쓰기 시작했다. 한 문장씩 읽어가며 ‘이렇게 쓰면 이해가 잘 되려나?’ 고민하며 한 줄씩 내용을 늘려 나갔다. 속도는 빠르지 않았지만, 다시 수정할 내용들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탄력을 받기 시작하니 집중력도 함께 올라갔다. 그렇게 수정본 제출일 전 마지막 1주일은 이전의 3주 동안 쓴 시간을 합한 것보다 더 많은 양을 살펴보고, 고치고 글을 써내려 갔다.

 

12월이 되어 2차 심사일이 다가왔다. 교수님들의 표정은 1차 심사 때보다 부드러웠지만, 안심하기에는 이른 듯했다. 졸업 여부를 결정하는 최종 회의가 시작되었고, 나는 별도 공간에서 대기하며 1차 심사 때 들었던 '졸업이 미뤄질 수 있다'는 말을 되뇌며 마음의 준비를 했다. ‘이번에 밀리면 또 수정해야지 뭐라는 생각과 함께 말이다.

 

다시 교수님들이 모인 회의장에 들어가니 교수님들은 심사 점수표에 서명을 하고 있었다. 몰래 쓰는것이 아니라 내가 들어가도 아무렇지 않게 쓰는 모습을 보자 아 통과 했구나라는 안도감이 몰려왔다. “감사합니다 교수님!”이라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교수님 중 한 명은 나를 보며 말했다. "축하합니다 박사님" 그 말을 듣는 순간, 눈물이 찔끔 흘러내렸다. 여러 감정이 스쳐 지나갔지만 가장 먼저 든 마음은 이번 겨울이 가기 전에 논문을 대학생 친구에게 전해 줄 수 있어서 다행이다.’였다.

 

그렇게 2차 심사가 끝나고 졸업이 확정되었다. 하지만 완전한 끝이 아니다. 통과를 했다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싶지만, 12월의 마지막 주, 나는 아직도 모니터 앞에서 작업 중이다. 박사 논문은 보통 2~3번의 심사 과정을 거치는데, 최종 심사를 끝냈다고 해서 바로 끝이 아니다. 제출 마감일 까지 완성도 있는 논문을 만들어야 한다. 마치 한 권의 책을 출간하기 위해 교정과 교열작업을 하듯, 나는 오늘 밤도 심사 때 받은 피드백을 반영하고 논문의 내용을 들여다 보고 또 들여다 보는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눈앞에 보이는 자음과 모음의 창살을 빠져나가려면 아직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더 흘러야 한다. 하지만, 나의 글을 기다리고 있는 누군가를 상상하니 오타 하나라도 더 찾고 어색한 문장을 다듬고 싶은 마음 뿐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나는 지금 글 감옥이 아니라 글 바다에 빠져 헤엄을 치는 것 같다.

 

오늘 이렇게 나의 논문이 세상에 곧 나올 것이라 이야기를 하면, 나의 글을 기다릴 사람이 열 명 정도는 더 생기지 않을까? 진짜 그렇게 된다면, 최종 제출일이 될 때까지, 힘은 더 솟아날 것만 같다. 이번 주말은 하루 종일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고 있어도 몸은 가벼워질 것 같다.


* 글쓴이 지은이

우연히 만난 이들과 함께 만든 순간을 기록합니다.감정을 글로 풀어내면 좋은 건 알겠는데, 좋은 걸 '구체적으로 어떻게 표현하지?' 고민 하다 '글쓰기'가 정서에 미치는 영향을 직접 연구하기도 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청년> 프로젝트에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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