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네시, 알람이 울리자 눈이 번쩍 뜨였다. 평소보다 훨씬 일찍 아침이 시작되었음에도 나는 후다닥 침대에서 내려와 세수를 하러 화장실로 향했다. 분명 어제까지도 아침마다 귀를 때리는 듯한 알람 소리가 들리면 무심결에 꺼버리고 적어도 십분 정도는 이불속에서 몸을 뒤척였는데. 오늘은 특별한 날이다. 두시간 뒤, 나는 비행기를 타고 하늘 어딘가를 날아가다 제주도에 떨어진다. 이미 일렁이는 에메랄드빛 제주 바다가 눈앞에 펼쳐진 것만 같다.
얼른 준비를 끝내고, 공항으로 향하기 직전, 방안을 한번 스윽 스캔하다 저만치 떨어진 까만 노트북 가방을 보자 시선이 멈춰버렸다. 17인치 노트북이 들어간 등짝 만한 백팩. 왜소한 체격이 커다란 가방을 메고 다니면 가끔 친구들이 니 몸보다 더 큰 가방을 등에 이고 다닌다고 했는데, 오늘만큼은 저 가방과 함께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인지 이번 여행 만큼은 가벼운 어깨 덕분에 하루 종일 걸어도 힘이 계속 남아돌 것 같았다.
지난 몇 년간 나는 거북이 같았다. 매일 아침 커다란 가방은 언제나 나의 어깨위에 올려졌고, 그제야 하루가 시작되었다. 출퇴근, 출장, 박사과정을 밟아가는 동안, 심지어 논문을 쓰기 위해 시작한 6개월의 휴직 기간 동안에도 백팩은 매일 나의 등에 디폴트처럼 붙어 있었다.
올해 1월, 논문 마무리를 위해 휴직을 시작했다. 처음엔 논문만 쓰면 되는 줄 알았으나, 실제 삶은 계획대로 일어나지 않았다. 코끝에 따뜻한 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3월 초, 오랫동안 병과 함께 살아가던 아빠는 하늘나라로 여행을 떠났고, 정리의 시간이 순차적으로 따라왔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논문을 쓰는 동안에도 무언가 하고 있지만 졸업은 할 수 있을지, 휴직 동안 얇아진 지갑을 나중에 어떻게 채워야 할지에 대해 불안감과 고민들이 불쑥불쑥 스며들었다.
하지만 일어나는 일들과 수시로 피어 오르는 걱정들을 나의 의지대로 피할 수는 없었다. 대신 그 안에서 유일하게 스스로 선택하고 할 수 있던 건, 매일 오전 커다란 가방을 메고 학교로 가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루를 시작했고, 며칠 전 드디어 논문 초고를 완성했다.
지난 몇 년을 돌아보니, 내 삶이 바다거북의 여정과 묘하게 닮은 것 같이 느껴졌다. 바다거북들은 산란기가 되면 안전한 바다를 떠나 힘겹게 육지로 올라와 알을 낳고, 다시 바다로 돌아가 자유롭게 헤엄친다. 나 역시 내 의지와 무관하게 찾아온 여러 일들을 마주했지만, 무거운 짐을 짊어진 채 느리지만 꾸준히 하루하루를 쌓아왔다. 이제는 거북이처럼 충분히 고난의 여정을 거친 나 자신에게, 가벼워진 어깨와 함께 한결 홀가분한 마음으로 물속을 유영하듯 휴식의 시간을 허락해도 좋을 것 같다.
사실, 이번 여행 결정은 단 30분 만에 이루어졌다. 며칠 전, 논문 마무리를 위해 학교에 갔던 날, 우연히 동료를 만났다. 나는 그녀에게 논문이 끝나고 온전히 쉴 수 있는 시간이 3일 남짓이라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동료는 망설임 없이 만약 그녀라면 제주로 떠난다고 했다. 짧은 시간 동안 멀리 떠나는 기분을 느끼려면 '비행기’만한 교통수단이 없다고 했고, 올레길 산책을 하고 난 후 숙소는 꼭 게스트하우스로 가라고 말해주었다.
제주도? 나의 여행 리스트에는 올라 있지도 않던 장소였다. 평소 비행기를 타고 가는 여행은 적어도 고민과 준비만 해도 일주일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는 어느 새 방아쇠가 되어버렸다. 항공권 사이트를 열어 제주행 비행기를 검색하는 순간. '단돈 3만원, 딱 1장 남았습니다' 그 문구를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결제 버튼을 눌러버렸다. 그렇게 점심시간이 채 되기 전 내일 출발 비행기 티켓을 사버렸다.
우연한 제주 여행은 나만 모른 채 이미 계획 된 것 같았다. 삼십대 후반의 나에게 이런 즉흥적인 결정은 꽤 오랜만에 만나는 순간이었다. 매일 함께하던 노트북 가방도 던져두고 떠나는 여행. 그 자체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다.
여행 첫날밤,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하니 20대 초중반의 여행객들로 가득했다. 처음 만난 이들이었지만, 여행지 특유의 분위기 속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를 꺼냈다. 대학을 갓 졸업한 청년부터 이직을 고민하는 직장인까지, 각자의 사연은 달랐지만 우리 모두 인생의 전환점에서 잠시 숨고르기를 하고 있었다. 그때 문득 깨달았다. 우리는 모두 바다거북이었다. 때로는 무거운 등껍질을 짊어지고 육지를 힘겹게 걸어가고, 가끔은 무게를 내려놓고 바다에서 자유롭게 헤엄치는 것처럼. 나와 그들은 기간은 달랐지만 각자의 속도로 퐁당퐁당 자신만의 휴식을 맞이했다.
다음 날, 특별한 계획 없이 올레길을 걸었다. 평소였다면 시간 안에 빨리빨리 도장 찍기를 하듯 이곳저곳 다니기 바빴을 텐데, 이번엔 달랐다. 해안길을 햇살을 듬뿍 받으며 걸었다. 바닷바람은 내게 평소보다 더 천천히 걸으라 말해주는 것 같았다. 배고프면 입안에서 톡톡 터지는 성게알이 들어간 미역국을 먹었다. 그렇게 물속을 헤엄치듯 나만의 가벼운 시간을 채워갔다. 그렇게 우연한 순간은 낯선 여행이 되었고, 그 시간이 쌓여 내게 선물이 되어버렸다.
여행은 눈 깜짝할 새 지나갔고, 나는 어느 새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느껴졌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삶에서 바다 거북이처럼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느리지만 차근차근 걸어가고 있다는 걸. 그리고 가끔은 그냥 저질러도 괜찮고, 자유를 충분히 느껴도 괜찮다는 걸 말이다.
어느새, 나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복직을 하고 다시 커다란 노트북 가방을 메고 매일 출근한다. 하지만 전처럼 발걸음이 무겁지는 않다. 가끔씩 제주에서의 시간이 떠오를 때면, 잠시 멈춰 창밖을 바라본다. 업무에 치여 숨이 막힐 때면, 그때의 바다를 떠올리며 깊게 숨을 들이쉰다. 가끔은 노트북 가방을 내려놓고 나만의 주말을 보내려 한다.
중요한 건 나만의 리듬을 잃지 않고, 느려도 조급해 하지 말고 차근차근 걸어가야 한다는 것. 그 사이에서 나만의 균형을 찾아가는 것이 다가올 계획이 되면 좋겠다.
* 글쓴이 - 지은이
우연히 만난 이들과 함께 만든 순간을 기록합니다.
감정을 글로 풀어내면 좋은 건 알겠는데, 좋은 걸 '구체적으로 어떻게 표현하지?' 고민 하다 '글쓰기'가 정서에 미치는 영향을 직접 연구하기도 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청년> 프로젝트에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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