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 내일와요?”
월요일 오후, 친한 동료의 딸 J에게서 문자가 왔다. 그런데 마음 한구석이 무거워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J와는 오년 전, 코로나가 한창일 즈음 컴퓨터 모니터에서 처음 만나게 되었다. 당시 나는 대학원을 다녔고, 코로나의 한 가운데를 지나던 때라 모니터로 수업을 듣곤 했다. 수업에서는 가끔 학생들의 자녀들이 등장하기도 했는데, J는 그 중에서도 매주 교수님과 동료들을 일부러 만나러 화면에 고개를 빼꼼히 내미는 꼬마 친구였다. 네다섯 살 즈음 만난 J는 화면 너머로 우리와 함께 수업을 들으며 함께 자라났다.
삼년 전, 파란 햇살이 가득한 봄과 여름의 경계선 어느 즈음의 날이었다. 빨강 노랑의 꽃이 가득한 꽃가게를 지나자, J를 처음 만나기로 한 식당에 도착했다. 동료의 손을 꼬옥 잡고 걸어오는 꼬마 아가씨를 보니 나도 모르게 반가움이 솟아올라 양손을 흔들었고, 그녀는 수줍은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빨간 장미꽃 한송이를 내밀었다. 그렇게 우리 셋은 함께 나는 함께 식사를 시작했다.
J는 내가 만난 여섯 살 중에 가장 마음이 깊은 꼬마 철학자였다. 그날 나누었던 이야기 주제는 내가 겪고 있던 힘든 순간이었고, 나와 동료의 대화가 한참 무르익을 즈음이었다. J는 우리 대화를 말없이 듣다 갑자기 동그랗게 눈을 뜨고 질문을 했다. 내용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지만 당장 도망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정말 중요한 순간에 이길 수 있도록 힘을 내 준비하라는 말도 포함되어 있었다. 책에 나올법한 말을 어린이의 입에서 들으니 신기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당시 우리 아빠는 힘겨운 항암을 하고 있었는데, J는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오늘부터 자기가 매일 꼭 기도를 하겠다고 했다. 어린아이에게 위로도 받고 마음도 촉촉해진 점심이었다.
몇 주가 지난 어느 날이었다. 나는 학교에서 J의 엄마를 만나 대화를 나누다 J가 매일 밤마다 우리 아빠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J는 매일 밤 침대에서 세상의 수많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데, 나를 만난 날부터 매일 “지은이 이모 아빠가 얼른 낫게 해주세요”라는 문장을 더했다고 했다. 그렇게 J는 약속을 하면 꼭 지키는 어린이였다. 그렇게 고마운 J는 나와 점점 더 가까워졌다.
지난 3월, 오랜만에 J를 만나러 동료의 집으로 갔다. 어느 새 2학년이 된 그녀는 나를 만나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고 했다. J는 요즘 배우고 있다는 아이돌 댄스를 선보이고, 까만 글씨가 빼곡한 독서감상문을 보여주기도 했다. 동료는 J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자랑을 잘 하지 않는 편인데, 나에게는 좋은 모습을 많이 보여주고 싶었나 보다고 말해주었다. "이모, 이제 게임할까요?" J가 알까기 게임판을 나에게 보여줬고, 우리는 바닥에 나란히 앉아 바둑알을 튕겼다. 어느 새 나도 모르게 "아싸!"를 외치며 J와 함께 웃음꽃을 피웠다. 내가 그녀와 놀아주는 건지, 그녀가 나와 놀아주는 건지 모르게 시간은 금세 흘러갔다.
헤어지는 순간이 다가왔고, 나는 유난히 아쉬워하는 표정을 보이는 J를 바라보며 말했다.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너랑 동료를 만나러 놀러 올게.”
우리는 약속을 했다. 그리고 일상을 살다 보니 시간은 휘리릭 지나가 버렸다. 그리고 한달의 마지막날을 하루 남긴 오후, J의 문자를 받은 것이다.
나는 메시지를 보자마자, 나는 알 수 없는 죄책감에 휩싸였다. 왜 죄책감이 올라왔을까? 사실 한 달의 마지막 주를 시작하며 문득 문득 J가 떠오르긴 했다. 하지만 이제 동료도 나도 수업이라는 접점이 없어 각자의 일상을 살다 연락하는 날도 아주 가끔 이었다. 나는 연락이 없으니 ‘그냥 지나가겠지’라 생각을 했고, 동료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만약, J의 연락이 없었다면 우리 둘은 아마도 잊고 그 약속을 지나쳐 버렸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와 J의 약속의 무게는 한참 차이가 났던 것 같다. 한달에 한번 만나러 올게. 그 말이 J의 세계에선 아주 커다란 크기로 다가왔던 걸까. 아니면 나와 보냈던 시간이 정말 기다려질 만큼 즐거웠던 걸까. 작은 두 손을 모아 “지은이모 아빠 낫게 해주세요”라 매일 기도 한다는 J의 모습이 떠올랐다. 만나러 오겠다고 내가 먼저 J에게 말을 해 버렸는데, 그 말 속에 기대와 설렘까지 가득 담겨 있는 줄은 몰랐다. 먼저 말해버린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렇게 4월의 마지막날이 왔고, 나는 불가피한 일정으로 J를만나러 가지 못했다.
바로 다음 날, 5월이 시작되자 마자 나는 다행히 시간이 생겨 동료와 그녀의 딸 J를 만나러 갔다. 그날 나는 J가 무엇을 하고 싶었는지, 먹고 싶은 것이 있는지, 표정과 목소리 하나까지 놓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함께 J가 원하는 것들을 하나씩 해 나갔다. 물론 J도 나와 동료가 함께 대화를 나누는 시간까지 기다려 줬다. 그렇게 봄날의 약속을, 우리는 하루가 늦었지만 하나씩 지켜 나갔다.
그리고 벌써 6월이 왔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지난 주에 J를 만났 어야 하는데, 어쩔 수 없는 일정 때문에 약속이 연기되고 있는 중이다. 이번에는 한달 전부터 달력에 미리 만날 날짜를 표시해 뒀는데 아쉽기만 하다. 동료는 J에게 일정이 늦춰지게 된 이유를 차분하게 말했다고 했지만, 마음 한구석에 미안함이 자리 잡고 있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그래서였을까, 오늘은 내가 먼저 언제 동료와 J의 시간을 물어보았다. 이번 달은 J가 아니라 내가 먼저 그녀와의 약속을 기다려 보려 한다.
꼬마 아가씨가 나와 하고 싶은 것이 뭘까? 알까기를 또 하고 싶다고 했는데, 상상만 해도 벌써 깔깔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다가오는 여름은 꼬마 아가씨와 웃으며 시작하고 싶다. 이번엔 내가 빨간 꽃이 가득 핀 화분을 준비하고 그녀를 만나러 가야겠다.
* 글쓴이 - 지은이
우연히 만난 이들과 함께 만든 순간을 기록합니다. 감정을 글로 풀어내는 것을 좋아하며 <세상의 모든 청년> 프로젝트에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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