탱고에 바나나

임신부의 탱고 생활_탱고에 바나나_보배

2023.08.30 | 조회 1.4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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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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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 중기가 되면 탱고를 맘 놓고 충분히 출 수 있을 줄 알았다. 입덧도 사라지고, 몸도 전보다 가벼워졌으니 말이다. 하지만 오산이었다. 우선은 홍대까지 장시간 차를 타는 것도 무리고, 밤늦게 밀롱가가 여는 것도 문제였다. 임신 전에는 새벽 2~3시에 자는 것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임신 후에는 12시만 되어도 눈이 감긴다. 평소 같았으면 훨씬 길었던 집중력도 한두 시간이면 국수 면발 끊기듯 뚝 끊어져 버린다. 생체 리듬이 많이 달라진 걸 느낀다. 아기랑 하나의 신체를 공유해서 그런지 ‘원래의 나’와 ‘아기’의 취향이나 리듬이 한 몸에 섞여있는 것 같다.

자꾸만 잠들고 싶고, 한동안 안 먹던 달달한 것들을 찾고, 생전 안 좋아하던 김 반찬에 밥 한 그릇을 뚝딱한다. 매운 음식 킬러였던 나는 맵거나 짜거나 고추장이 들어간 음식만 보면 눈살을 찌푸리는데, 이러다가 곧 김치도 맹물에 헹궈 먹는 거 아닌가 싶다. 그래도 아기와 나의 공통된 취향이 있다. 탱고다. 태동이 시작될 때부터 뱃속 아기는 탱고 작곡가 다리엔소(Juan d’Arienzo)의 음악만 들리면 콩콩 움직였다. 지금은 밀롱가에 가서 탱고 음악을 가만히 듣고 있으면 악단 가릴 것 없이 신나게 태동을 한다. 아기가 궁금할 땐 탱고 음악을 틀면 된다.

한 번은 내가 임신했다는 걸 모르던 사람과 춤을 췄는데, 한 곡을 추고 나서는 꼭 안아주며 축하한다고 박수를 쳐 주었다. 나도 모르게 아기가 움직였나요?”라고 되물었던 적도 있다. 물론 태동 때문은 아니었고, 제법 동그래진 배 때문이었다. 탱고를 추면 물에 몸을 가볍게 띄우는 것처럼 음악과 상대에 나를 맡기고 가벼워진 느낌이 든다. 가벼워진 신체, 괜한 우울감이나 곧 다가올 출산에 대한 무거움이 사라진 내가 남는다. 그 느낌이 좋아서 1~2주에 한 번쯤 한산한 밀롱가에는 꼭 가려고 한다.


임신 전처럼 춤을 많이 출 수는 없다. 그래도 한두 시간 멍하니 음악을 듣고, 남편과 춤을 추고, 사람들과 안부를 주고받을 수 있다. 임신, 출산에 골몰되어 있을 때 벗어나기에 더없이 좋다. 우리 부부는 임신 안정기에 접어들자마자 다니던 요가원을 다시 등록했다. 오전 7시부터 한 시간 반 정도 땀을 흠뻑 흘리다 보면 왠지 이번 주에는 탱고를 추러 가도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게 된다. 가동력이 전 같지 않은 내 몸을 보면 괜히 주눅이 들기도 하니까 자꾸만 운동을 찾게 된다. 임신했다고 무거워진 몸으로 상대를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크고 말이다.

사실 자주 하는 생각인데, ‘탱고를 안 췄으면 과연 나는 지금처럼 운동을 했을까?’ 하고 의심이 든다. 탱고가 운동을 평생 습관으로 만들어 준 것도 같다. 덕분에 임신기도 신체적으로 큰 불편함 없이 보내는 듯하다.

탱고를 추고 싶어 운동을 다닐 만큼, 춤추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도 막상 탱고를 추러 가면 자리에 앉아 있기 일쑤다. 커진 배가 아직은 낯설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해서 춤추는 걸 꺼리게 된다. 배가 낯을 가리나 싶다. 그럴 때면 나는 가만히 앉아서 내 배의 목소리를 듣기도 하고, 아기의 움직임을 느끼기도 하면서, 그럼에도 춤추고 싶은 마음을 가득 품고서 시간을 보내다 오는 것이다. 그렇게 앉아 있으면 꽤 오랜 시간 봐온 밀롱가 친구가 춤 신청을 한다. 나이도, 성격도, 하는 일도 잘 모르는 사이로 몇 년을 봐왔다. 어떤 정보도 모르지만 참 친숙하다.

가볍게 눈 인사를 하고, 커진 배를 소개했다. 오늘은 왕 배예요.” 그는 하얀 웃음으로 화답하고 누구보다 조심스럽게 춤을 추기 시작한다. 빠른 음악도, 거센 음악도 그와 추면 느긋하고 차분하다. 아무래도 나의 움직임에 맞춰 주며 추고 있는 것이겠지 싶어 고마운 마음이 솟는다. 그럴수록 혹시 내가 무겁게 기대지는 않을까, 조금 더 편안하게 아브라소(탱고 기본 자세)할 수 있을까 하며 나를 정돈한다. 한 곡, 두 곡, 세 곡 정도 흐르다 보면 춤을 시작할 때의 걱정은 슬그머니 사라지게 되는데, 그럴 때면 바다 수영을 즐기는 멸치 한 마리가 된 것 같다. 음악 속에 자유롭게 바다를 건너는 멸치.

네 곡으로 이루어진 한 구성의 음악이 끝나면 각자 앉아 있던 자리로 간다. 마지막까지 따뜻하고 호의적인 배웅에 기운이 솟아난다. 자리에 돌아와서는 막 춤추고 들어와 앉은 언니와 또 한참을 나의 임신에 대해서, 수업 때 들은 탱고 스텝에 대해서 신나게 수다를 떤다. 방금 함께 춤을 춘 분의 아내이기도 한 언니. 어쩐지 모두가 연결되어 있는 듯한 안전함에 마음이 편안하고 느긋해진다.

바닷속에서 멸치는 생각한다. 이 밀롱가만큼 안전한 곳을 찾기는 쉽지 않다고 말이다. 배부른 멸치는 아마 그날이 그의 임신기 중 배가 가장 작은 날이었을 테다.


임신 중 오랜 파트너와 탱고를 추는 아르헨티나 댄서 Roxana Suarez

* 글쓴이 - 보배

탱고 베이비에서 탱린이로 변신 중. 10년 정도 추면 튜토리얼 단계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하여, 열심히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청년> 프로젝트에 참여했습니다.

Brunch: https://brunch.co.kr/@se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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